'어반 씨 호텔 아토차 113'에서의 이틀 밤
공항에서 코로나 PCR 증명으로 인해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우리는 조금 지쳤다. 마드리드에 도착하자마자 첫 일정인 프라도 미술관을 가기 위해 택시에 30유로를 쏟아붓고 지친 몸을 의자에 기댔다. 마드리드 시내까지 달려가야 할 택시는 고속도로 한복판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란 줄 서기에 동참해 버렸다. 줄 서기는 미술관 앞에서 해야 하는데. 망했다. 허탈한 심정으로 의자에 기대어 달려갈 순서를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마드리드 시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도를 보니 벌써 아토차 역 근처다.
마드리드 중심에 있는 역답게 여러 나라 관광객들이 아토차역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택시 의자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슬슬 내릴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 가는 숙소인 '어반 씨 호텔 아토차 113'(URBANSEA Atocha 113)에서 아토차역은 도보 12분 거리, 차로는 4-5분 거리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
걸음이 빠른 사람은
이 숙소에서 아토차 역까지
10분이면 간다.
역까지 이어진 큰 대로변에 위치한 숙소이기 때문에, 택시 기사님께 직접 내릴 위치를 말씀드렸다. 마드리드도 서울처럼 대로변 주차 때문에 난리여서 겨우 호텔 근처에 정차를 했다. 그래도 친절하신 기사님 덕분에 무거운 짐들도 도보에 잘 내렸고 호텔 위치도 다시 알려주신 덕분에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호텔의 아담한 입구를 지나자마자 보이는 프론트에서 친절한 직원에게 안내를 받고 방으로 향했다. 긴 비행과 공항에서 쌓인 육체적인 피로와 프라도 미술관에 가지 못한 정신적 타격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당장 방으로 달려가 침대에 다이빙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드리드가 준비한 이벤트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안내데스크를 지나 더 안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우측에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이 나온다. 이 호텔의 엘리베이터는 크지 않은 아담한 엘리베이터여서 큰 배낭을 매고있는 남편과 짐들 그리고 내가 타니 공간이 꽉 찼다. 아슬아슬하게 내 몸 앞으로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답답했다.
조금만 참자.
이제 곧 방에서 쉴 수 있다!
답답했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 도착한 103호. 베이지색에 선명한 주황색으로 표시된 심플한 방 문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제 저 문만 열면 사진으로 봤던 화이트톤의 화사한 방이 우리를 맞이해 주겠지! 드디어 숙소 방 앞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우리는 잠깐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들뜬 마음으로 방에 들어가자마자 10초간 정적이 흘렀다. 일단 무거웠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말없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방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분명히 에어비앤비에서 예약할 당시에 찾아봤던 방은 이렇게 어둡고 작은방이 아니었다. 우리가 짐을 이끌고 들어가자마자 귀엽고 자그마한 방은 마치 이 호텔 엘리베이터를 탄 것처럼 꽉 찼다. 정말 웃기고 아슬아슬한 심정이었다.
제가 예약한 방은 이 방이 아닙니다만..
마치 쇼핑몰에서 뽀얗고 멋지게 찍은 사진을 보고 물건을 구매했다가 상자를 열자마자 실망하는 느낌의 상황이랑 같은 심정이었다. "사진과 실물이 너무 달라요"라고 리뷰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생겼다.
하지만 금새 긍정 회로를 돌린 우리는 비교적 저렴한 이 방의 가격을 떠올렸다. 그리고 계속 보다 보니 깔끔하고 사이즈만 작을 뿐이지 있을 건 다 있었다. 그래, 짐 정리를 틈틈이 해서 공간을 넓혀보자! 사진과 조금 다른 규모에 놀랐던 것뿐이지 방 자체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욕실도 깔끔하고 세면대까지 잘 갖춰져 있었다. 딱 가격만큼 만족스러웠다.
충격적인 첫 만남이 있었지만 '호텔 아토차 113'에서 우리는 아주 가성비 좋은 여행을 했다. 숙소 비용을 포함해서 마드리드가 전체 여행 일정에서 가장 가성비 좋은 지출을 한 도시 중 하나일 것이다.(2022년 5월 당시 1박 기준 약 11만 원이었다.) 그리고 늦은 저녁마다 숙소 가는 길에 들러서 장을 봤던 까르푸도 가성비 여행에 한몫을 했다.
여행을 마치며 돌아보니 '어반 씨 호텔 아토차 113'은 2박 3일 마드리드 일정을 무사히 마치도록 빛내준 1등 공신이었다. 10분 거리에 아토차역, 레티로 공원, 티센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이 있고 그보다 더 가까이에는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도 위치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외에 나가면 너무나 그리워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파는 스타벅스도 10분 거리에 있다.(이때까지만 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그렇게 간절해질지 몰랐지.)
우리는 마드리드 여행 2박 3일동안 근교 도시인 톨레도와 세고비아를 다녀왔는데, 숙소가 아토차역 근처에 있다 보니 버스 정류장도 많아서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마드리드의 주요 관광지인 솔 광장, 마요르 광장, 산 미겔 시장까지도 도보로 20분 정도 걸려서 산책할 겸 다녀오기도 좋은 거리였다.
비용, 입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가장 가성비가 좋은 숙소!
첫인상과 달리 여러 면에서 숙소의 좋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객관적인 사실은 바뀐 것이 없지만 여행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바뀌면서 보이고 느끼는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마드리드에서의 3일을 이곳에서 살뜰히 아끼며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여행을 계획하던 단계에서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여행을 하다 보면 발견된다. 아무리 계획이 완벽하다 해도 첫 여행지 이거나 당시 상황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처음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더 철저한 계획과 수많은 플랜이 아니라 여행자의 마인드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철저한 계획과 많은 플랜을 가지고 있다면 앞의 오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 순간이 완벽할 수는 없다. 완벽할 수 없음을 즐기는 것이 여행자의 마인드이다.
중요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이고
이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기 원하느냐이다.
사람마다 정의하는 여행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정의에 따라 여행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얻고자 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두가 가진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여행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익숙함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여행을 하다 보면 힘들었던 순간도 즐거웠던 순간도 조금 더 여행자답게 여행할 수 있게 된다.
여행자의 마인드를 가지면
점점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9년간 직장인으로 살면서 휴가를 받아 여행을 했던 때를 기억해 보면 나는 늘 무언가에 쫒기듯 여행을 했었다. 최대 3박 4일을 휴가를 내서 여행을 하게 되면 4일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정을 빡빡하게 채워 넣었다. 시간에도 마음에도 여유로움은 하나도 없었다. 쉬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이런 내가 여행을 하면 할수록 여유로움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게으름과는 조금 다르다. 여유 있게 모든 상황과 사람을 대하다 보면 여행의 모든 장면과 순간들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과 작업들도 시작한 시기와 진행 속도들이 각자 다르다. 다른 콘셉트의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욕심껏 일정을 소화하고 싶다가도 시간과 체력과 비용이 따라주지 않을 땐 실패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마음에 점점 여유가 없어져간다. 나만 실패하고 뒤쳐진것 같다. 내가 봤던 내 미래는 포토샵 효과가 들어가 있었을 뿐 현실은 그냥 좁은 호텔방 같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들 때가 여행자의 마인드를 기억해야 할 때다. 인생은 시작과 끝이 있고 더 좁게는 내가 하는 일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 그리고 상황을 여유 있게 바라보다 보면 즐기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