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말 처음 발 디딘 국회 모습은 충격이었다. 어디서나 보이는 양복 차림의 50대 남성들, 그들이 문제의식 없이 내뱉는 성차별적 언행이 그랬다. 모 남성 국회의원이 “그 언론사는 기자 몸매 보고 뽑느냐”라는 말을 여성 기자에 했다는 말에 놀란 것도 잠시, 나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취재로 만난 한 검찰 출신 의원으로부터 황당한 봉변을 당했다. 저녁 자리 기자들과 만나기 전 이미 한껏 술에 취해 있던 그 의원이, 내게도 자신이 탄 폭탄주를 마시라며 나를 몰아붙이다가 결국 자신이 마신 500ml 맥주 컵을 내 머리 위에 거꾸로 얹은 것(나는 그대로 '얼음', 그 뒤 체감상 2~3분가량 정적이 흘렀고... 멀리서 지켜보던 의원실 보좌진들이 달려와 의원을 말리고서야 상황은 정리됐다). 나중에 어렵게 사과를 받아 내긴 했지만, 며칠 동안을 자기 검열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때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은 내가 문제였나. 단추를 많이 풀었던가. 너무 쉽게 보였던 건 아닐까’. 문제는 내가 아닌 그 의원에 있었음에도. 50대 남성이 주류인 ‘아재 국회’에서 30대여성이 버티기란 쉽지 않았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사회 속, 정치는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고 배웠건만 기자로서 마주하는 현실은 정반대였다. “5·18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광주 시민들 폭동"이라는 역사 왜곡부터 “여성가족부를 없애자”는 구시대적 발언까지, 이들은 단기적 세 결집을 이유로 오히려 특정 집단을 향한 갈등과 혐오를 조장하곤 했다. 지켜보는 게 힘겨웠는지 지난 3월 어느 날 취재 수첩에는 이런 메모도 남아있다. “갈등과 선동, 혐오가 넘치는 정치판을 보는 게 괴롭다. 내 기사도 그 증오를 부추기는 도구로 쓰일까 싶어 두렵다.”
남녀 갈등 부추겨 표 얻겠다는 남성 정치인...갈등 조율할 ‘정치’는 어디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성별 갈등을 일부러 부채질하는 남성 정치인들을 보는 일이었다. 20대 남성 표를 얻겠다며 바른미래당 최고위원들이 일부 여성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안티 페미’ 전략을 취했던 것.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신념이 페미니즘”이라는 글로리아 스타이넘 말처럼 1),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성별·장애·학력 등 모든 차별이 사라지는 사회를 꿈꾼다. 하지만 일부 정치인들은 ‘남성-여성’이란 이분법적 틀 안에 갇힌 채, 한정된 사회적 자원을 놓고 두 성별이 싸우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상임위마다 붙어있는 위원장들 사진은 90% 이상이 모두 남성인 데다 현 20대 국회도 남 의원 5명마다 여 의원 1명 꼴이건만, 이들은 여전히 목말랐나 보다.
이들은 여성이 잘 되는 건 곧 남성의 몫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히려 여성 국회의원, 여성 정부 고위직 등 사회 안 여성 롤모델이 많은 나라일수록 국민의 정치 참여와 정치 효능감이 늘어난다는 연구가 있다. 여성 의원 증가로 ‘정치=남성 영역’이라는 편견이 깨질 때, 10대 청소년의 정치 참여가 높아지고 스스로를 민주사회 시민으로 보게 된다는 게 논문 결과다 2). 서지현 검사를 시작으로 법조·연예·문화계 등 사회 곳곳에서 터진 미투 운동(#metoo: ‘나도 고발한다’는 성폭력 고발운동), 그 뒤 처음 치러지는 2020년 선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래서다.
50대·남성만 대변하는 ‘아재 국회’, 2020년엔 바뀔까
여성이 잘 돼야 남성도 행복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옥죄는 의무가 사라지면, 남성을 옥죄는 의무도 사라질 것이다. 최근 만난 30대 남성 지인들은 “남자는 당연히 힘이 세야지”, “남자라면 돈을 잘 벌어야지”, “남자는 과묵해야지”, “남자면 결혼할 때 집을 사 와야지” 같은 말들에 압박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며칠 전 만난 한 초등학교 교사 친구는, 분홍색 옷 입기를 즐겨하는 저학년 남자아이를 또래 집단 남자아이들이 ‘계집애’라고 놀린다며 속상해했다. 의무와 서열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여자답게’와 ‘남자답게’를 벗어나 모두가 나답게,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자유롭지 않을까.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강조하는 “Not Ranking, But Linking(위-아래 수직적 서열화가 아니라 평등하게 연결되는 세상)”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현재 국회는 대한민국 국민 중 50대·남성만 대변하는 ‘아재 국회’다. 300여 명 의원의 다수는 50~60대 나이에(86%), 남성이며(83%), 그 마저도 법조인 출신(17%)으로 편향돼 있다 3). 이들 중 장애인 당사자로서 장애계를 대변하겠다는 의원은 없고, 이주민 의원도 없으며, 청년 의원도 적다(나이 30대 의원은 1%뿐).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 모두 총선기획단을 통해 여성을 적극 영입하겠다고 했지만 현실은 어떤가. '지역구 후보 중 30%는 여성 포함'이 당헌에 들어있는 민주당조차 지난 10월30일 “선거제 개혁이 눈 앞이지만 ‘지역구 30% 여성의무공천’은 요원하다”며 법제화를 요구했다. 한국당은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 여성의 날 이를 거론했음에도, 관련한 당내 토론은 전무하다.
2018년 9월 촬영된 '20대 국회의원 단체 기념사진'. 20대 국회 개원 때 전체 국회의원 중 여성 의원은 17%, 51명에 불과했다. (사진 출처: 주승용 의원실 블로그)
할머니도 좋고 애엄마도 좋다. 국회 출입기자로서 나는 내년에 더 다양한 연령·직업군의 여성 의원을, 아기를 안은 엄마·아빠 국회의원을 만나고 싶다. ‘지역구 중 30% 여성 의무공천 법제화’가 그 시작이 될 수 있겠다. 각 정당 유권자들이 지도부에 이를 요구할 때, 언젠가 ‘남녀 동수 국회’가 현실이 될 때 국회는 달라질 것이다. 남성들이 육아 휴직을 눈치 보지 않고 쓰는 날, ‘OECD 가입국 중 남녀 임금 차별 1위’라는 오명도 옛말이 될 것이다. 그런 희망을 붙잡으며 여성 기자·보좌진들은 오늘도 아재 국회 안에서 버티고 참아낸다. 모 남성 의원의 ‘스트립바’ 출입 논란과 성인용품 ‘리얼돌’을 국회에 앉히는 행태를 미간 찌푸린 채로 지켜본다. 국회가 더 성평등한 곳으로 변할 것을 믿으며, 언젠가 그 변화를 눈으로 직접 보리라 다짐하며.
*각주)
1) 이하나, 「글로리아 스타이넘 “‘미러링’은 남성 교육의 기회… ‘탈코르셋’ 누구나 선택할 수 있어야”」, 여성신문, 2019년 9월 22일자 기사
2) 정진리, 「여성 롤모델이 청소년의 시민적 효능감에 미치는 영향 연구」, 서울대 대학원, 2019
3) 임병식,「6명 중1명이 판검사-변호사 출신... '법조 국회'를 깨자」, 오마이뉴스, 2019년 11월 13일자 기사
-(사)한국여성의정에서 연3회 발행하는 <여성의정> 2020년 신년호에 실린 원고입니다(2019년 12월 말 발행됨). 시점과 일부 표기 등을 현재에 맞춰 바꿨습니다. 한국여성의정은 전현직 여성국회의원 모임이자 여성정치발전을 위해 활동하는 국회의장 산하 법인이라고 합니다.
-제목은 일부러 성별을 강조해 적어봤습니다. 궁극적으론 성별이 상관없는, 女라는 글자가 사라지는 성평등 사회를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