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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핀 유성애 Aug 09. 2020

아픈 몸을 산다

집 앞 감나무를 보며 생각한다. '나랑 꼭 같네'.

출퇴근 길마다 집 앞에 있는 큰 감나무와 마주친다. 이 집에 이사 온 7년 전부터 심어져 있던 나무다. 아직 가을이 다 오기도 전인데, 감나무는 벌써 어른 주먹만 한 풋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겨울엔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해 죽은 것만 같았던 감나무가, 봄여름을 지나며 푸릇푸릇 싹을 틔워내고 대추만한 열매를 맺더니, 그 열매가 세 살 내 조카 주먹만한 크기로 자라서는 벌써 이만큼이나 커졌다. 곧 가을이 오면 감들은 주황빛으로 물들면서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8월 초인 지금도 몇몇 감들이 다 자라지 못한 채 나무 아래 떨어져 있다. 매끈한 감 표면에는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 있다. 감을 주워 들고 생각한다. ‘꼭 나 같네’. 내 몸 곳곳에도 그와 같은 상처와 흉터들이 많기 때문이다. 피부를 자르고 꿰매고 고친 흔적들이다. 양다리에 8개, 오른쪽 골반 위에 하나, 입술 아래에 한일자로 하나 더.


올해가 꼭 10년째다. 스물다섯 살이던 2010년 겨울, 예상치 못한 큰 사고가 났었다. 어렸을 때부터 조심성이 많던 아이라 뼈에 금 한 번 가본 적 없던 나였다. 피부 알레르기 같은 잔병치레는 있어도 크게 다치거나 아픈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사고가 아주 제대로 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사 취업을 준비하던 중, 당시 살던 고시+원룸텔 4층에서 떨어진 것이다. 아직도 나는 사고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뒤늦게 확인한 CCTV에서 나는, 고시텔 복도에서 비틀비틀거리다가 하필이면 문이 열려있던 완강기 설치장소로 나가 거기서 떨어졌다. 정신을 잃은 채 4층 아래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살았다. 어떻게 살았냐고? 고시텔 아래 있던 재래시장 위, 얕은 슬레이트 지붕을 뚫고 떨어지면서였다. 정신을 잃었으니 머리부터 떨어졌을 내 자세가 그때 바뀐 것으로 추정한다. 다치고 나서야 알았다, 그게 뇌출혈 전조증상이었다는 것을.

8월 초인 지금도 몇몇 감들이 다 자라지 못한 채 나무 아래 떨어져 있다.


다친 곳들을 기반으로 되짚어 볼 때, 나는 슈퍼맨처럼 떨어진 것 같다. 그러니까 콘크리트 바닥에, 꼿꼿하게 선 채 일자로 떨어졌다. 왜냐면 대학병원으로 옮겨진 나를 의사들이 달려들어 검사한 결과- 양다리 무릎 아래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지고, 특히 오른다리 정강이뼈는 약 5cm가 소실됐으며, 왼팔 팔꿈치 뼈도 부러졌기 때문이다. 다리와 팔, 다음은 얼굴. 턱이 땅에 닿은 충격 탓인지 턱뼈가 어그러졌고 광대뼈가 어긋났다. 그 과정에서 입을 악물었는지 혀끝도 1cm 정도 잘려 나갔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윗니 3개가 빠지거나 부러져있었다. 사고 직후 치아 30여 개가 모두 흔들려, 한동안은 치아가 고정되도록 교정기를 하고 미음이나 죽을 먹어야 했다. 당시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한동안은 생리조차 하지 않았다.


나중에 진단서에 기재된 병명은 ‘좌/우측 개방성 경골/비골 골절’. 그게 2010년 11월 초 일이다. 이후엔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수술, 재활, 수술, 재활. 세상 모든 게 ‘재활’에 초점이 맞춰져, 재활용 쓰레기도 재활,용쓰레기로 읽히던 때였다. 세 번 넘는 전신마취 수술을 거쳤다. 정강이뼈 일부가 없는 상태에서 발을 땅에 디디면 어떻게 될까. 적어도 뼈가 붙을 동안은 내내 병원 침대에서 살아야 했다. 그 말인즉슨, 다 큰 성인 여자가 병원 침대에서 대소변을 처리했다는 얘기다. 중간엔 오른쪽 골반 뼈를 떼어내 정강이뼈 빈 곳에 이식하는 수술도 했다. 평소엔 ‘일리자로프’라고, 어마무시한 철심들을 정강이에 박은 뒤 뼈와 뼈 사이를 하루에 1m씩 끌어당기는 시술을 했다. 수술 때엔 큰 고통이 따르고 시간이 필요한 방법이다. 보기 흉한 쇠들로 다리를 두르고 주렁주렁 달고 살았다. 그 쇠를 마침내 빼낸 곳에도 흉터가 남았다. 몸 곳곳에 있는 흉터, 부끄럽지 않지만 자랑스럽지도 않은 이 흉터들은 그 시간을 지난 증거였다.


물리치료와 재활을 통해 다시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하게 되기까지 약 1년 6개월, 근 2년 정도 세월이 걸린 것 같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당시 쓴 일기와 블로그 글들에는 곳곳에 눈물이 배어있다. 엄마아빠와 친오빠, 남자친구와 친구·지인들 등에 말 그대로 ‘업혀서’야 지났던 시간이었다. 혈압과 맥박이 불안정해 수술조차 하지 못한 채, 응급처치만 하고 다리가 골절된 사고 때 상태 그대로 중환자실에서 지냈던 약 10일.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일임을 직감했다. 사고가 왜 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끔찍한 악몽을 자주 꾸곤 했다. 나를 실험상대로 삼은 누군가가 나를 눕혀놓고 계속해 피를 뽑았다가, 죽기 직전에서야 피를 다시 주입한다거나 하는 류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나도 모르게 휩쓸린 느낌이었다.

오른쪽에 일리자로프 기구를 하고 붕대를 감은 모습.

취업은 고사하고 다시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투명했다. 어제까지 확실하게 밝았던 미래는 믿기 어려울 만큼 새까맣게 어두워져 있었다. 대학병원과 동네병원을 오가며 보냈던 약 10개월, 매일 밤 6인실 병실 천장에 있는 갈매기(모양의 문양)들을 세다가 겨우 잠에 들던 나는, 병원을 나가 내가 마주하게 될 앞날이 너무 막막하고 캄캄했다. 밤마다 잠들면서 실은 내일 아침이 오지 않기를, 이게 꿈이 아니라면 차라리 잠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하곤 했다.

11월 초에 다쳤지만 혈압과 맥박이 불안정해 바로 수술을 할 수 없었다. 그해 12월 1일에 아빠가 쓴 일기.
사고 이후에도 다시 걷게 되기까진 수년 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2-3년이 지난 뒤 철심을 빼기 위한 수술당시 찍은 사진.


사고를 다시 찬찬히 돌아보게 된 건 올해 초 요가를 시작하면서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가부좌를 튼 채 내 몸을 돌아봤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할 때마다 의식은 자꾸 나를 그때 그 병실 침대 위로 데려다 놓았다. 침대에 누운 채 커튼을 치고 목구멍으로 혼자 울음을 삼키던 일, 차가운 침대 위에서 수술을 기다리던 시간, '쉽게 말하면 머리에 시한폭탄이 있던 거예요'라고 말하던 신경외과 의사의 무표정한 얼굴,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붕대로 칭칭 감은 커다란 오른다리. 병실 밖 걷고 있는 사람들 발에는 마치 날개가 달려있는 것 같았다(박희진의 시 '회복기' 중 재인용). 마음대로 걷고 뛰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읽던 책에서 발견한 ‘모과는 상강이 지나야 향이 난다’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야 깊어질 거라는 말을 나에게 주문처럼 되뇌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은 사고 전후로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살다 보면 그런 일을 겪는다. 교통사고, 시한폭탄. 예정에 없던 크나큰 변수 같은, 되돌리고 싶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는 어떤 것.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삶은 더 이상 이전의 삶과 같지 않다. 삶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달라져 있다. 이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흉일까 훈장일까.


엄마는 재작년, 갑상선에 암세포가 발견됐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고 서둘러 수술했다. 자궁근종으로 인해 결국 자궁을 떼어 낸 적도 있다. 몇 개월 전엔 친구가 종양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멀리 알고 지낸 또 다른 지인 또한 암 판정을 받았단다. 통증은 나만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외롭다. 그해 겨울 병원에서 통증으로 깊이 외로웠던 나는, 엄마와 친구들 소식에 쉽게 동요됐다. 어떻게든 그들이 외롭지 않았으면 했다.


세상 지혜로운 척 글을 쓰고 있지만 실은 나도 ‘쫄보’다. 여전히 두려움이 많다. 얼마 전엔 사랑니 잇몸이 자꾸 씹혀 치과에 갔었는데, 곳곳에 임플란트를 하고 철심이 박힌 내 엑스레이 사진을 본 치과의사가 내게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한다. 별것 아닌 말이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당시 사고로 발목관절이 많이 다친 터라, 정형외과 의사는 내게 다른 사람보다 관절염이 빨리 올 것이라 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턱관절, 뼈를 떼어 냈던 골반 등등. 치과에서처럼 이렇게 내가 다쳤다는 사실에 갑자기 직면하게 될 때마다 겁이 더럭 난다. 요가를 하다 오른발목이 남들처럼 굽혀지지 않는,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만나면 그게 또 속상하다. 그래 맞다, 나 다쳤었지. 아픈 몸을 안고 사는 게, 아무리 애를 써도 풀기 어려운 숙제처럼 여겨지곤 한다.


아픈 몸을 사는 우리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생채기 나고 일찍 떨어진 풋감도 어디엔가 쓸모가 있겠지. 어쩌면 그 풋감이 거름이 돼 다시 감나무가 새 잎사귀를 틔울지도 모른다. 시골마을에선 그런 감들을 모아 물에 넣고 떫은맛을 뺀 뒤 주린 배를 채웠다고 했다. 떨어진 감들이 나무에 사는 여러 곤충과 새들의 먹이가 돼줄 수도 있을 것이다. 생채기가 난 감들의 쓸모를 생각하며, 감 하나를 손에 쥐고 오래 지켜보다가 집으로 왔다.


내 몸 곳곳의 흉터는 내가 나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어떤 것이다. 살을 모두 바르고 남은 생선의 몸통 뼈 같이 생긴, 얼핏 보면 무섭게 생긴 이 흉터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가 그 쉽지 않은 시간을 무사히 건너왔다는 생각에 안도한다. 내가 여전히 나라는 사실에 기뻐한다. 어쨌든 살아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그 시간을 무사히 건너도록 도와준 책들 중 <아픈 몸을 살다>는 책이 있었다. 대학교수였던 저자가 30대 후반 심장마비를 겪고 이듬해 암 판정을 받은 뒤, 치료와 재활과 투병 기간 자신을 스스로 관찰하며 써 내려간 투병 일지다. 수술 뒤 회복 중인 친구에게 선물하며 다시 읽은 책의 문구 중 서문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몇 번이고 곱씹어 읽었다. 글쓴이는 아프기 전 자신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며, ‘두려울 수밖에 없겠지만 두려움에 갇혀 인생을 보내는 건 바보 같은 일일 거라고, 미래의 너는 고통 받고 많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고통과 상실은 삶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썼다.


‘질병으로 계속 아프다 해도, 심지어는 죽어간다 해도, 질병 안에는 새롭게 될 기회가 담겨있다’고도 그는 말했다. 아픈 몸을 안고 쉽지 않은 시간을 지나는 내 친구와 나 자신에게, 아팠거나 아프거나 아플 우리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글이다.


<당신은 많은 것을 잃겠지만 그만큼 기회가 올 겁니다. 관계들은 더 가까워지고, 삶은 더 가슴 저미도록 깊어지고, 가치는 더 명료해질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제 (더는) 당신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들을 애도할 자격이 있지만, 그걸 그저 슬퍼하기만 하다가 당신이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이 흐려져선 안 돼요.
당신은 위험한 기회에 올라탄 겁니다. 운명을 저주하지 말길, 다만 당신 앞에서 열리는 가능성을 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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