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곁의 페미니즘]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센 연대
(※이 편지는 오마이뉴스 연재기사입니다. 홈페이지에서 직접 보시면(http://omn.kr/1wqfx) 작가의 편지낭독 음성을 바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재회의 고리가 되어준 편집자 고 이환희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페미니즘을 뭐라고 번역하시나요? 우린 '성평등주의'로 읽습니다. 성별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얘기죠(오바마도 페미니스트라네요!). 페미니즘이 오해받는 한국, 그 안에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두 여성의 이야기. 2주마다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대와 성장을 꾀해봅니다.[기자말]
편안한 새해 맞으셨나요. 국민의힘 내홍이 혼란에 혼란을 거듭해 지켜보는 것도 피곤한 가운데, 고양이 사진을 주고받던 며칠 전 새해를 떠올리며 힘을 내 봅니다.
올해는 검은 호랑이 해라지요? 저는 호랑이띠하면 제 동생이 떠올라요. 저보다 네 살 어린 동생은 지금 드라마를 만드는 일을 하는데요. 자타공인 '동생 덕후'인 저는 동생과 사이가 꽤 돈독한 편인데(이 말을 하면 주변인들은 늘 동생 말도 들어봐야 한다더라고요^^), 드라마 제작이 시작된 뒤 무려 4개월 동안 얼굴 한 번을 못 봤네요. 곧 만날 수 있다고 해 기쁩니다.
제 동생은 '빠른 98년생', 원래대로면 호랑이띠인데 소띠로 띠를 세요. (이유가 좀 웃긴데) 호랑이띠 여성은 너무 기가 드셀 수 있어 소띠가 낫다는 생각에서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셨대요. 기독교라 집에서 제사가 아닌 추모예배를 드리는데도, 제 동생은 '기 센' 호랑이띠를 피해 소띠를 획득했습니다. 동생은 소처럼 우직하기도, 호랑이 같은 기세가 있기도 한 멋진 사람인데 말이에요.
그런 얘기 들어보신 적 없으세요? 흔히들 '팔자'라고 하는, '닭띠 여성은 집 안을 해친다' '말띠와 범띠 여성은 드세다' 같은 말이요. 이런 이상한 편견들이 미신처럼 떠다니는 사회적 현실, 부모님은 동생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고 싶어 하신 선택이셨겠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 식이라면 같은 년생 여자들은 다 같은 '팔자'를 타고 났다는 말인가요.
이런 상황이 엽기적이라고 생각한 건 저뿐이 아니더라고요. <호랑이 푸로젝트(2004년, 이지행 감독)>라는 단편영화가 있어요(영화소개 보기). 호랑이띠 여성들이 진짜로 호랑이가 돼 버리는 판타지물이고, 실제 호랑이띠 배우인 문소리씨도 출연한답니다. 어처구니없는 성차별적 편견을 영화로 만들어내기까지, 영화 감독이나 문소리 배우가 살면서 경험한 허탈한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싶더라고요.
나아가, 여자가 기가 센 게 대체 뭐가 문제인가도 싶었고요(남자들 기죽이지 말라는 뜻일까요?).
성애님이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을 즐겨보는 것처럼, 저는 요즘 <스트릿 우먼 파이터(일명 '스우파')>를 찾아본답니다. 거긴 정말 드세고 '기 센', 멋진 여성들 천지거든요.
여성 댄서들의 댄스경연 예능프로인데, 어떻게들 저렇게 관절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며 춤을 추는지 나와 같은 '인간'의 몸이 맞나 싶어요. 춤도 춤이지만 명대사들을 뽑아내는 덕에 귀도 즐겁습니다. 앞서 상대팀 리더 모니카와 춤으로 맞붙은 허니제이는 당시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라는 말을 해 큰 화제가 됐어요(찾아보니 이 배틀은 3.2%의 최고시청률을 기록했다네요).
허니제이는 그 발언이 각광받을 줄 몰랐다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결과에 따라 팀에 마이너스가 가는 상황이라 (당시) 분위기가 굉장히 안 좋았다. 그래서 '심각할 필요 없어, 언니들이 즐기면서 해볼게, 잘 봐'란 의미로 했던 말"이라고요. 필요할 땐 싸우지만 평소엔 동료와 친구로 협력하는 여성들을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막 기운이 나요. "언니들 싸움"을 계속해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칩니다.
이들을 보며 처음으로 여성 댄서·안무가들 삶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요. 역시나 '버티는 여성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춤으로 틀을 깨는 이들, '스우파'가 만든 여러 공연은 그 자체로 저에게 굉장히 큰 영감이 돼줬어요. 카리스마 가득한 무대 한 번을 만들기 위해 출연진들은 매번 수많은 논쟁과 선택들을 해야 했대요. 그런데도 늘 함께 최선의 결과물들을 만들어낸다는 게, 정말 멋지지 않나요.
애초 방송에서 그걸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기 센 언니들이 서로 관계 맺는 모습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봤어요. '춤추는 여자들'이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크루(팀)를 만들어 함께 움직이는 방식이 한편으론 부럽기까지 하더라고요. 요즘은 어디에서든, 특히나 제가 속한 정치판에서 '연대'라는 단어는 경험은커녕 듣기도 보기도 어려운데, 저긴 그 반대인 듯 보여서 말이에요.
대통령선거를 두 달 정도 앞둔 요즘, 여야 대선 후보와 양당 체제만 부각되면서 소수의 목소리는 자꾸 뒷전이 되곤 해요. 이런 고질적인 한국 정치에서 연정이라는 제도는 가능한 건가 싶고, 성애님 말처럼 고통에 둔감하고 기득권을 대표하는 정치인들만 살아남는 것 같고요.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 내 삶을 바꿀 거라는 희망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날짜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정치 뉴스 제목들을 보며, 답답함이 속을 메웁니다.
화제를 조금 바꿔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정치인 홍보물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가 했던 캠페인이에요. 힐러리는 동성애자 커플, 돌봄 노동자, 아동들과 사회적 소수자인 사람들의 일상적 모습을 30초~2분가량 담아낸 뒤 끝에 "Stand with(함께 서자)" 또는 "Join the fight(함께 투쟁하자)"는 등의 문장을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읽어줍니다.
힐러리라는 정치인이 어떤 존재들을 보고 있는지를 잘 알리는 캠페인이었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어떤 사람들 곁에 있는지 알려주는 거죠.
한국의 유력 대선후보들은 어떤가요. 이재명 후보는 사실관계가 불명확한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 글을 공유했었고, 윤석열 후보는 신지예씨 사퇴 뒤 "없어도 될 논란을 만들었다"며 사과를 했었습니다. 참담했습니다. 갈등을 봉합하라고 있는 게 정치인데, 이런 행동은 오히려 젠더갈등을 부추기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이런 게 모여 혐오와 적대로 이어진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저들은 두렵지 않은 모양이에요.
스우파가 보여준 연대, 거센 연대는 정치권에 더 시급해 보입니다. 그런 강한 연대와 지지를 담아 당신께 올해 첫 편지를 띄웁니다. 호랑이 기운도 함께요.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기 센 여성들, 에너지가 필요한 당신에게 바칩니다. 단편영화 <호랑이 푸로젝트>.
2022년 1월 5일
'어흥'을 크게 외치며, 혜미 드림
첫번째 편지☞ 같이 걷게 될 당신, 멀고도 가까운 당신
두번째 편지☞ 이런 시대... 여자로 태어난 건 축복일까요
세번째 편지☞ 청년 부르짖는 정치인은 모르는 청년의 심각한 현실
네번째 편지☞ 길바닥 나앉은 목사, 청년 예수가 봤다면
다섯번째 편지☞ 노동자 과로사하는데... 윤석열 말에 한숨부터 나왔다
여섯번째 편지☞ '숏컷 괴롭힘' 사회... 아이를 낳고 싶다, 낳고 싶지 않다
일곱번째 편지☞ 늘어나는 비혼·비출산, 윤석열만 못 보는 현실
여덟번째 편지☞ 아프간 '난민'을 왜 내가 신경 써야 하냐고요?
아홉번째 편지☞ 여성 안 보이는 선거, 2022년에도 봐야 한다니
열번째 편지☞ 가족, 짐일까 힘일까... '정상' 너머 대안이 필요하다
열한번째 편지☞ 아파보니 알겠어요, 한국에 '돌봄'이 있나요?
열두번째 편지☞ 성범죄 무고 처벌 강화? 윤석열의 참 '후진' 약속
열세번째 편지☞ 뺏기고 내몰리는... '코시국' 여성 홈리스들의 삶
열네번째 편지☞ 다 괜찮으니까, 죽이지만 말라고요
열다섯번째 편지☞ 출마했어도 "아가씨"... 정치권의 역겨운 성차별
* 혜미와 성애가 2주에 한 번씩 주고받으며, 격주 금요일 게재될 예정입니다. 이 편지는 문학동네 이슬아x남궁인의 연재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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