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생각보다 교활하고, 생각만큼 똑똑한 사람들

옳은 걸 알면서도 나서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by 최서연



생각보다 교활하고, 생각만큼 똑똑한 사람들









“그건 완전히 계약 위반이지.”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게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내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창수 과장한테 따로 얘기할게.”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팀장들도 내가 주시할 테니까.”


“네.”


“뭐 다른 거 힘든 건 없고?”


“제가 중간 직급이다 보니까, 신입 직원들 다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도와줄 수 있는 건 많이 없고... 또 성과가 잘 안 나니까 다 같이 지치는 거 같아요.”


“내가 대놓고 칭찬은 잘 안 하지만 구매팀은 기복이 없는 편이야. 많이 바쁘거나 인원이 없을 때도 평균 이상은 항상 유지하니까 잘하고 있는 거야. 중간에서 많이 들어주는 입장이니까 가장 힘들 때지. 나도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


“네.”


“후임들이 힘들어하는 거 잘 들어주는 것 만해도 큰 도움될 거야. 잘하고 있잖아, 서연 씨.”


“네. 감사합니다.”






면담실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갔다. 마음이 쿵덕쿵덕 뛰어서 진정이 되지 않았다. 3 층에 있는 우리 팀 사무실은 조용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용기를 냈고, 무거운 면담실의 철문을 밀고 들어가 팀장들이 무엇을 어떻게 잘못하고 있는지 얘기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내 마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변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에는 나 자신이 조금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상사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회사 분위기가 바뀌고, 평판이 결정되는 회사에서 상부의 잘못을 그 윗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말을 하면 말을 하는 대로 나는 힘들어질 것을 알고 는 있었다. 내가 매일 얼굴을 맞부딪히고 일하는 건 그 윗사람들이 아니라 팀장들이니까.



‘어떻게든 못살게 굴겠지.’



하지만 말을 해도 괴롭고 말을 안 해도 괴로울 거라면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쪽을 택하자고 마음먹었다. 어쩌면 알량한 정의감으로 내가 다른 직원들을 대신해 총대를 맨다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직원들이 그렇게 해달라고 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틀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모든 것이 변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안 변했다. 팀장들은 잘못된 게 있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고, 부당하게 삭감된 근무시간과 급여도 그대로였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딴에는 정말 큰 용기를 냈는데, 뭔가 변할 것 같다고 기대했던 건 순진한 내 생각일 뿐이었다. 남이사는 나한테 평소에 하지도 않던 친한 척을 하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굴었다. 내가 얘기한 게 나 혼자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얘기해봤자 안 바뀌는구나.’



중간에서 내가 한 얘기를 꿀꺽, 삼켜버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다른 직원들 앞에서 일부러 나한테 친한 척을 하는 남이사. 다른 직원들은 내가 남이사 라인인지 몰랐다는 눈빛으로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다. 앞으로 잘 봐줄 수도 있으니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라는 눈치를 충분히도 보내고 있는 그 사람을, 나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대놓고 성질머리가 고약한 상사였다면 누구라도 붙잡고 욕이라도 하겠는데, 아래 위로 신임을 받고 있는 그 사람을 이겨 먹을 만큼 내가 영악하지는 못했다. 이겨 먹고는 싶은데 그럴 능력이 안되니까 울분만 차 올랐다. 억울함과 분노가 사회생활이라는 타협의 울타리 밖으로 비집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번 더 쏠 때는 제대로 쏴야 했다. 경 이사님을 화장실에서 만났을 때 나는 반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사람도 모르는 척하면 어쩌지.’



불안감과 함께 나는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대표님이 나를 호출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제대로 쏜 것 같았다. 대표님께 며칠 전 남이사에게 말했던 내용을 똑같이 이야기하는 동안 남이사는 옆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치가 떨렸다.



‘내 앞에서는 그렇게 당장이라도 해결해 줄 것처럼 굴더니, 진짜 교활한 사람.’



대표님은 부당하게 삭감된 근무시간을 인사팀에 요청해서 바로 잡아주겠다고 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해결되었어야 하는 일인데, 중간에서 모르는 척하고 있는 그 사람이 너무 치가 떨렸다.



‘이번에는 뭐라도 바뀌었을까?’



내가 3층으로 내려왔을 때 3층은 조용했다. 마음은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용기 있는 일을 했다는 기분에 들뜨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평소처럼 내가 오늘 해야 할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팀장이 내 자리로 찾아와서 네가 대표님한테 올라가서 얘기했냐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눈에 빤히 보이는 얄팍한 수로 나올 줄은 몰랐다. 좀 더 교활하게 나를 따돌리거나 괴롭힐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수가 낮다니 우스워 보일 지경이었다.



‘이렇게 추궁하는 것 자체가 규정 위반이라는 걸 나도 아는데, 팀장인 저 사람은 왜 모르는 거지?’



수가 낮아서 우스워보여도 괴롭기는 똑같다.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또 쪼르르 달려가서 추궁당했다고 하면 내가 용기 내서 한 말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그럴 만한 그릇도 안되면서 담대한 척하고 싶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차라리 좀 교활하기라도 할 것이지 싶은 팀장은 수준이 낮아서 상대하기도 싫었지만, 근무 시간 내내 수시로 내 기분을 들쑤셔 놓았다. 남이사는 너무 교활해서 내가 이길 깜냥이 안됐다. 내가 맡은 업무마다 남이사가 체크를 하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본인 업무가 아닌 데도 우리 팀에만 와서 갖은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매뉴얼대로 처리한 일은 매뉴얼대로 처리했다고 수동적이라고 트집을 잡았고, 업무가 할당된 직후부터 끝내기를 독촉해왔다. 아무도 동의할 수 없는 규정을 자기 혼자 만들어 나한테 들이대며 내가 한 모든 일을 수정하고, 다시 처리하길 종용했다. 평소에는 얼굴 마주할 일도 없던 사람이,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작정을 한 듯이 털어 대니 미칠 지경이었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고, 도와 달라고 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부당한 근무 삭감은 다 수정되었지만 다른 동료들이 나한테 나서 달라고 한 것 도 아니고, 그들이 보기에는 나 혼자 미쳐 날 뛴 것처럼 보일 텐데. 본인들은 가만히 앉아서 이득만 챙기면 그만인데, 굳이 내 편을 들어 불리한 입장을 자처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동료들이 나서 준다고 대단히 달라 지거나, 엄청난 도움이 될 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의 위안은 되었겠지만.



옳은 걸 알면서도 나서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고 있는 나도, 하면서도 매 순간 망설이고 멈칫하고 무서우니까.







우울증은 겪고 나아지려고 노력한 2년간의 기록.

소설 형식의 에세이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단단하지만 뾰족하지 않은 마음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