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고 고아처럼 버티는 버릇

by 최서연


갑자기 슬프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그냥 계속 고아처럼 버틸껄 그랬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가장 깊은 상처를 준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더 슬프다. 항상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나도 들은 말을 얼른 까먹고 지워버리고 싶다. 술 먹고 한 소리겠지, 실수로 한 소리겠지, 괜히 이 얘기 저 얘기하다가 실수 한 거겠지. 무슨 말을 가져다 붙여도 내 마음속에서 그 말이 잘 지워지지가 않는다. 나도 잘 까먹고, 잘 흘려듣고 싶다.


만약에 누가 평생 동안 했던 말 중에 가장 못된 말을 골라서 ‘네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잖아.’라고 한다면 욕먹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도 잊히지가 않는다.



누군가에게 상처 줄까 봐,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기운이 뻗치거나 내 우울함이 번질까 봐 항상 꾹꾹 참아놓고 눌러놓고 말하지 않는 게 버릇이 되었다. 나중에는 말이 하고 싶어도 말이 도저히 나오지가 않았다. 밤새도록 아파서 죽겠다 싶었는데도 진통제 하나 사다 달라는 말을 못 해서 그냥 이러다 혼자 죽는 게 더 속이 편하겠다 싶었다. 말을 못 했던 건지 하기 싫었던 건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화상을 입었는데 피부가 재생이 안되고 계속 그 상태로 살아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바람만 불어도 아파. 사는 게 좇같다니까. 진짜 짜증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짤


상담가서도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니다, 나는 얼른 다 솔직하게 얘기하고 빨리 괜찮아지고 싶으니까 자존심이고 낯가림이고 방어기제고 나발이고 상관없으니 그냥 다 얼른얼른 솔직히 얘기하고 해결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 꺼내서 얘기했다고 생각했다.


다 얘기하고 보니 그 밑에는 또 깊게 굳어진 층이 있었고, 그것도 힘겹게 깨서 얘기하고 보니 또 더 깊은 곳에 굳어진 층이 있었다. 이걸 언제까지 해야 되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얘기하는 연습을 했다. 이제 와서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는 연습이라니, 사는 게 끝도 없다. 계속 배우고 연습하고. 그게 재미있을 때도 있었다. 나아지고 있구나, 한 걸음 나아갔구나, 성장했구나. 얘기하고 나면 공감하고 위로받는 순간도 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도,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만난다. 나와는 다르지만 기꺼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면 나 자신에게도 그런 마음이 든다. 나쁜 경험이 있어도 괜찮구나, 상처가 있어도 괜찮구나, 그럼에도 이렇게 좋은 사람인 걸. 생각보다 비슷한 사람도, 생각보다 좋은 사람도 많다.


그러다 그런 사람한테 또 대단한 배신도 아닌, 상처받을 만한 아주 작은 말 한마디만 들어도 크게 맞은 기분이 든다. 나 같으면 안 할 얘기 같은데 이 사람들은 왜 자꾸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을 할까. 왜 저런 단어를 쓸까. 내가 예민한 걸까. 사람이 다 살다 보면 실수할 때가 있는데 내가 잘 넘어가고 수용하질 못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다 그냥 지나가는 건데 나만 혼자 맨날 과하게 힘들고 상처받고 아파하고 이러는 거 지긋지긋하다. 그냥 실수로, 상처가 되는 말 한마디를 했구나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나를 통째로 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역시 사람이랑 엮이면 안 돼.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하고 책을 읽자. 남는 건 공부밖에 없고 세상은 내 고통을 알아주지 않아. 타인은 나를 이해하지도 알아주지도 못해. 혼자 있어도 괜찮은 건 혼자 있어야만 괜찮은 것까지 밖에 안돼. 균형 잡기 진짜 토나와서 못해먹겠다고. 어느 순간에는 괜찮은 것 같았다가 이제는 괜찮아지고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가 여전히 그렇지 않다는 걸,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을 얼마나 반복해서 겪어야 할까. 진짜 독하게 마음먹고 칼을 갈면서 살아야만 내 삶을 지켜낼 수 있는 걸까. 나를 구원하는 건 내가 열심히 살아온 매일매일이랑 내가 쌓아온 노력, 그리고 내 통장뿐이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모범생 콤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