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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에 끌려 시작해 단점을 참는 것이 연애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제목이 끌려서 찾아보게 됐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글을 쓸 때 참 어렵다. 사랑이라는 게 참 단순하면서도 쉽게 묘사하기가 어려운 것이라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에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까’의 관점에서 유심히 지켜보는 편이다. 여전히 사랑에 대한 주제는 글로 적기 참 어렵다.


이 영화는 한국 정서에 크게 유사하지 않을 수 있어도, 상황이라는 보편성이 작용하기 때문에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애인을 만날 때 어떤 기준에서 보게 될지 비교하면서 이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영화를 다 보고 다시 제목을 생각했다. 사랑할 때는 누구나 최악이 된다고? 사랑을 시작할 때는 장점이 크게 보여서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사랑하는 관계를 지속할 때는 계속해서 마음을 들쑤시는 것은 단점이 아닐까 하고. 이 단점을 내가 참을 수 있을지 없을 지에 따라서 사랑하는 관계의 길이가 결정된다고. 전 애인이 가진 단점이 현 애인에게는 없고, 현 애인이 가진 다른 단점은 또 불만족으로 작용하는 것. 인간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어제 책에서 본 한 문장이 불쑥 떠올랐다. 1+1=1도 아니고 2도 아니다. 0.8+0.8=0.999999 정도로 사랑은 불완전한 인간 둘이 만나서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둘이 또 불완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사랑이나 연애나 결혼이 대단해 보이다가도 이렇게 데이터로 바라보니까 딱히 대단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주인공 율리에보다 나이 많고 지적인 남자는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는 상대였다. 성적인 욕구를 충족하기보다는 지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지성인 커플로 보였다. 화목한 가족과 안정감이 드는 가족 관계를 이루기에 충분한 관계 같았다. 정서적으로 편안한 연애. 그런데 요즘 같은 때 스물아홉이라면 안정감과 결혼이라는 게 꽤 거리가 있는 이슈다. 한마디로 이 남자는 결혼하고 살기에 나쁘지 않은 남자다. 안타까운 것은 이 좋은 남자를 율리에가 인생에서 조금 이른 타이밍에 만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상대방이 너무 좋은데 한창 더 놀고 싶은 나이에는 그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지.


영화는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시청자가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배려심이 느껴지는 섬세한 감독이 만든 영화 같다. 


인생의 격랑기에 있는 율리에의 스물아홉. 특히나 그녀는 가진 재능이 너무 많고 변화무쌍한 직업 트랙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녀에게 나이가 많은 그 남자는 편안함을 줄 수 있지만 그녀를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호기심은 갖고 있지 않다. 여자는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동년배의 남자와 마주치게 된다.


동년배의 남자를 만난 율리에는 나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편안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와 너무 비슷한 탓에 둘 다 미래를 꿈꿀 수 없이 현실에서 버겁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성적인 매력도 느끼고 재미있는 연애는 할 수 있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이. 그와의 연애는 현재만 만족스러울 뿐, 불안함으로 임신할 수 없고 각자 앞날을 그려볼 수 없다. 


내가 만약 동거하는 애인과 덜컥 임신하게 된다면 얼마나 막막할까? 임신을 알게 되기까지 율리에가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그 심정만은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래가 없는 관계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이가 된다는 건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느낌으로 알 수 있다. 한편, 헤어졌던 나이 많은 전남자친구는 알고 보니 큰 병을 얻고 있었다. 그와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 율리에가 지적인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는 상대이다. 

영화는 이것이 불륜일까? 아닐까?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고민은 된다. 율리에가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과연 외도일까 아닐까? 하고 속으로 정답을 찾으려는 생각이 계속됐다.


영화는 결국, 영화답게 끝났다. 이 현실 줄거리에 충실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율리에는 스스로 가진 재능이 너무 많아서 그 호기심을 푸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 편안함을 기반으로 한 결혼과 동거는 섣부른 판단이라 생각된 그리 끌리지 않았던 것 같다.


원작 제목은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영화 내용을 가장 직관적으로 담은 제목 같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최악의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매 순간 자신이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선택했고, 그 결정을 옳게 하는 것은 본인. 그러니까 스스로 방황하는 영혼에게 어떤 답이든 정답처럼 끼워 맞출 수 없다. 방황하는 사람은 죄가 없다. 상황이 나빴을 뿐이지. 


현실적이고 담백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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