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러운 철학도의 하루

인간의 존재 가치를 찾아서

by 이루리

박사 논문 주제를 꺼낸 순간, 몸집이 푸짐한 선배는 관성처럼 고개를 저었다. 반쯤 올라간 광대가 새의 궤적처럼 스쳐 지나가며 내 상기된 기분을 가로질렀다.


“내가 그 논문 쓰려면 2년은 걸리겠다.”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에는 절망의 냄새가 실려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절망에 감응하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굳은살로 덮은 지금의 나는 웃었다. ‘아무렴 그렇겠지’ 하는 말이 속에서 올라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무엇을 말해도 부정으로 받아칠 사람이다.


“야, 선행연구라도 AI한테 맡기면 모르겠다. 걔네 분석 잘하잖아.”


선배의 말 옆에는 효율의 광기가 살짝 묻어 있었다. 광기의 조명 아래, 내 가슴은 존재 가치에 대한 질문을 향해 가라앉는다.


날로 솟구치는 기술의 날개를 바라보면 인간은 개미처럼 작아진다. 편의와 존재는 다른 구조다. AI가 건네는 황금빛 편의는 인간의 존재 근거와 충돌한다.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물어온 질문, ‘인간은 왜 인간인가’라는 물음이 다시 응결된다.


나는 인간의 근거를 ‘진정성’에서 찾고 싶다. 문제를 붙들고, 세계와 자신을 숙고하며 지혜를 축적하는 반복의 행위. 그래서 선대의 철학자들은 효율 너머의 목적을 탐색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존재 자체로 배치한 채 세계를 마주했던 것. 칸트가 말한 ‘목적 그 자체’는 아직도 우리의 동맥에 선명히 남아 있다.


문득 MIT Media Lab의 실험이 떠올랐다. 보스턴 청년 54명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SAT 에세이를 쓰게 한 연구. 세 그룹은 챗GPT를 쓴 그룹, 검색 엔진을 쓴 그룹, 아무 도구도 쓰지 않은 그룹이다. 결과는 단순했다. 챗GPT를 사용한 그룹의 두뇌 활동이 현저히 낮았다. 편의가 인간의 고유 기능을 잠식하는 장면이다.


이 대목에서 질문이 생긴다. AI의 도움으로 만들어낸 창작 속 인간의 몫은 무엇인가. 손가락만 움직이는 중개자에 불과한가.


효율이 극에 닿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잊곤 한다. 창작의 즐거움과 인간성의 미학은 해체되고, 유려한 결과물만 남는다. 삶의 고백을 담던 글은 알고리즘의 잔여물로 전락했다.


이 문제가 결국 나의 고민과 맞닿는다. 철학자가 되려는 이조차 효율과 기계에 삶을 맡긴다면, 존재의 가벼움을 누가 살필 것인가. 그래서 나는 학문의 영역에서만큼은 AI의 편의를 보류하기로 했다. 거부도, 반대도 아니다. 다만 철학도 특유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가깝다.


동양철학은 기계적 논리보다 삶의 반추와 수양을 우선한다. 고전을 읽고 삶을 되돌아보며, 그 반추 속에서 인간의 존재 가치를 새로 붙여내는 일. 미련스럽지만, 업의 본질은 업을 행하는 사람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선대가 남긴 고전과 선행 연구의 잔해 속에서 방향을 잃었다. 언어의 파편들이 시간을 잡아먹으며 내 가슴으로 스며든다. 고통스럽고 힘드니 효율의 유혹과 존재의 이유가 마음 줄기를 타고 갈마든다.


흔들림 속에서 내가 붙드는 건 질문의 잔광이다. 스스로 만든 질문은 돌밭을 걸어 답을 찾아야 내 삶의 궤적이 되리라는 믿음. 아마도 나는 앞선 사유의 흔적을 김춘수의 ‘꽃’처럼 다시 부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의 한 페이지를 조용히 펼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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