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진 보리의 고단한 하루

가족이 되는 과정

by 이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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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감에 사로잡힌 보리는 텅 빈 발걸음으로 2층을 향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온몸이 씨근덕대는 모양이었다. 토도독 토도독 소리와 함께 계단을 오른 보리는 내 서재로 들어왔다. 그리고, 사진처럼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사건의 시각은 평화로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족 모두 거실에 앉아 있던 순간이었다. 보리도 우리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다.


사실 보리를 포함한 우리 가족의 일상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매일 저녁 5시가 되면 저녁을 먹고 6시에 정원에 나간다. 한동안 정원을 뛰놀던 보리가 현관문 앞에 앉으면 집에 들어갈 시간이다.


집에 들어오면 보리가 선호하는 자리가 있다. 어머니가 앉은 소파 바로 옆이다. 널찍한 거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건만. 그 녀석의 선택은 항상 그 자리다.


어머니께서 소파에서 일어날 때마다 긴장하는 이유다. 발을 잘못 내디뎠다간 보리를 밟을 터였다. 어머니의 발이 허공을 휘저을 때 아버지와 나는 한껏 웃었다. 설마 보리를 밟겠냐는 비웃음이었다. 설마. 그렇다. 세상의 모든 ‘설마’는 사람을 잡는 법이다.


잠시 가족과의 시간을 보낸 후 방으로 돌아온 나는 책상에 앉았다. 낮에 다 끝내지 못한 연구가 저녁 시간을 침투했다. 회사였다면 워라밸을 핑계로 짜증 냈겠지만 연구는 내 삶의 즐거움이 아닌가. 한껏 몰입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꽥” 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사실 집중한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부모님의 말에 의하면 보리가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잠시 후 전에 없이 상심한 표정을 담은 보리가 서재로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쓰다듬으라며 곁으로 왔을 일이다. 하지만 보리는 벽으로 앉더니 같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흡사 2000년대에 유행하던 OTL 자세와 같은 모양.


상황이 궁금했던 내가 살그머니 1층에 내려가서 당혹감에 찬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사건은 이랬다. 평소 조심하던 어머니의 발이 갑작스레 울린 핸드폰 소리에 바빴단다. 덕분에 함부로 뻗은 어머니의 발이 보리의 등허리를 살짝 밟아버렸다. 휴식을 취하던 보리는 놀랐고, 부모님은 더욱 놀랐다.


보리를 달래려던 부모님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보리는 내 서재에서 사진과 같은 자세로 2시간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부모님이 번갈아 올라오셔서 석고대죄를 치렀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내가 잠에 들 때까지 보리는 OTL 자세로 앉아 있었고, 새벽에 일어나니 보리는 없었다. 문득 걱정이 올라와 1층에 내려갔다. 보리가 방석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꼬리를 흔든다. 혼자 성찰의(?) 시간을 갖더니 화가 풀린 듯했다.


잠에서 일어나신 부모님은 꼬리 치며 다가오는 보리를 보며 박장대소하셨다. 강아지 주제에 건방지게 별 짓을 다 한다는 말씀과 함께. 말은 그렇게 하셔도 감정 표현이 풍부해져서 대견하다며 연신 머리를 쓰다듬으신다.


정원에 살 때 눈치만 보던 보리가 달라지고 있다. 스치듯 보지 못하는 가족을 그리워하던 보리는 없다. 모든 상황에 인내란 글자만 새기던 보리도 사라졌다. 이제 힘든 건 못 참겠다는 듯 눈을 흘기고 입을 비죽거린다. 웃겨 죽겠다.


보리의 감정이 다양해질수록 우리 가족은 미안하단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이처럼 가족을 그리워하고 좋아하며 작은 일에도 서운해하는 아이가, 바깥에서 얼마나 오랜 인고의 시간을 보냈던가.


보리가 집으로 들어온 올 초가 돼서야 우리 가족은 보리를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인 느낌이다. 기나긴 시간이 흘러서야 보리는 하나의 짐승이 아닌 존재로, 스쳐가는 인연이 아닌 가족이 되었다. 존재의 수용이란 이렇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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