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물극필반(物極必反)

몸을 낮춰 숨겨야 할 때

by 이루리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주인공의 귀향은 실패가 자아낸 자화상이 아니었다. 이상하리만큼 허기진 도시의 삶에 느꼈던 피로감이 주인공을 고향으로 이끌었다. 어딘가 갇힌 마음이 자아낸 답답함. 주인공은 극복보다 탈출에 몸을 맡긴다.


담담하고 심심하기 짝이 없는 <리틀 포레스트>의 장면은 알 수 없이 편하다.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과 정겨운 모습이 입꼬리를 옆으로 밀어 올린다. 그럴 때마다 흠칫했다. 멈추면 죽는다는 현대 사회의 이성적 논리와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관습적 감성이 뇌리에서 충돌했다.


돌이키면 멈추는 시간은 비좁은 삶의 단면 사이에 몸을 욱여넣곤 했다. 소위 실패와 퇴보라 정의하는 장면이다.


『주역(周易)』에서는 이런 상태를 비괘(否卦)로 설명한다. 비(否)란 막힘이다. 기운이 막혀 위아래가 통하지 않는 상태. 하지만 비괘는 정체와 실패에 등호를 붙이지 않고, 후퇴를 퇴보라 단정하지 않는다. 시기의 문제일 뿐이라 일축한다.


비괘(否卦) 안에는 혼돈 속 생존을 위한 군자의 피와 땀이 묻는다. 상황은 불가항력적이나 선택은 인간의 일이다.


비괘의 군자(君子)가 숨을 죽이고 드러나지 않는 이유다. 세상이 꽉 막히고 소인(小人)이 득세하는 시기. 비괘의 군자는 숨 고르기를 선택한다. 내면을 살피고 몸을 낮춘 채 위험을 피한다. 영광과 보상을 목표로 삼을 시기가 아님을 알고 있다. 생존으로 미래를 도모하는 일이 우선이다.


사실 거창한 철학적 논구를 벗어나더라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절체절명의 위기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마련이다. 미물일지라도 말이다.


지난여름, 참외 농사를 짓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축 처진 목소리가 농사의 향방을 알렸다. 참외가 너무 많이 달렸고, 제대로 여물지 못했다는 전갈이다. 도심 농장을 운영하니 애로사항이 많단다. 무엇보다 벌이 보이지 않는다며 푸념했다.


친구의 푸념에 이유가 있다. 벌이 수분한 참외라야 하나의 줄기에 하나의 참외가 맺힌다. 커다랗고 다디단 참외의 요건이다. 인위적인 수분으론 열매야 맺겠지만 하나의 줄기에 참외가 주렁주렁 달린다. 당분이 떨어지고 크기가 작아지는 신호다. 그래서 참외 파는 사람들은 ‘꿀벌 참외’를 강조한다.


애써 친구를 위로했지만 차마 내 참외의 근황을 알리진 못했다. 우리 농장 참외는 유난히 크게 자랐다. 꿀벌이 많았던 덕이다. 양봉 농장을 함께 운영하기도 하지만, 애당초 이 지역에 꿀벌이 많다. 문득 꿀벌이 도시를 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벌은 냉정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환경이 악화 일로로 향하면 단칼에 성장과 번영을 포기한다. 여왕벌이 알을 낳지 않고 일벌이 애벌레를 방치하는 모양새다.


잠시나마 생명체를 다뤄보니 알게 됐다. 환경이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때, 생명은 무작정 버티지 않는다. 멈춘다. 줄인다. 그리고 포기하고 새로운 일을 모색한다. 패배가 아닌 생존의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국면에 잠시 멈추는 태도는 인간 사회에서도 반복됐다. 생명은 종을 막론하고 유사한 방식으로 위기를 통과한다.


일례로 중국 제나라 손빈(孫臏)의 삶이 그랬다. 손빈은 학문적 동료였던 방연의 질투로 간첩 혐의를 받아 무릎뼈가 잘렸다. 이후 사회적으로 매장됐을 뿐 아니라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는 맞서 싸우는 대신 자신을 지웠다. 돼지우리에 뒹굴며 똥까지 받아먹는 미치광이를 연기하며 돌변했던 것.


모두가 그를 미치광이라 여겼을 때, 손빈은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방연이 방심한 사이 제나라로 피신한 그는 마릉 전투에서 방연을 제거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손빈의 선택은 회피가 아닌 잠행이었고, 침묵은 패배가 아닌 준비였다.


그래서 『주역(周易)』을 해석한 이들은 흔히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원리를 논했다. 모든 것은 극에 달하면 반전으로 향한다는 것. 실제로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거나, 기업의 과도한 탐욕이 윤리 경영으로 전환되는 사례가 나타나곤 한다.

하지만 『주역(周易)』은 오히려 ‘물극필반(物極必反)’이 저절로 작용하는 법칙은 아니라 주장한다.


비괘(否卦)와 둔괘(屯卦)는 모두 혼란의 시기를 묘사하지만, 다르게 귀결한다. 비괘는 막힌 흐름을 인지하고 몸을 낮춰 상황 반전에 성공한다. 둔괘는 다르다. 끝내 길을 찾지 못한 채 고통 속에 머물며 피눈물을 흘린다. 차이는 상황이 아닌 상황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비괘의 군자는 숨을 죽이며 때를 기다리고, 둔괘의 인간은 흐름을 읽지 못한 채 난관에 매달린다.


우리가 삶의 흐름을 항상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자각하지 못한 어둠이 삶을 덮쳐올 때, 흐름을 인지하지 못한 인간은 당황하여 허둥댈 수밖에 없다. 현실이라는 벽에 묻힌 흐름을 놓치지 않아야 혼란 속에서 등불을 밝혀낼 수 있다. 불가피한 상황은 도래하기 마련이고, 돌파구는 의지가 있어야 탐색할 수 있으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최근 ‘양봉인으로서, 그리고 인문학자로서 꿀벌의 향방을 어찌 보느냐’는 질문을 몇 차례 받았다. 꿀벌을 가장해 인류의 미래를 점치는 내용이다. 나는 웃으며 비괘와 둔괘 이야기를 꺼냈다. 인간 의지의 향방을 모르니 쉽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는 말을 붙인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도심 속에서 인간은 종종 유아독존인 것처럼 행동한다. 자연과 스스로 분리한 채,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믿을 뿐이다. 벌이 사라지는 환경에서 인간만 예외일 수 없다.


꿀벌 실종 이후, 다음 자리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지 모른다. 물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흐름을 외면한 생명에게 다음 선택지는 늘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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