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지족불욕 [知足不辱]

【동인괘 (同人卦)】욕망과 존재의 경계선

by 이루리


영화 <쥬라기 공원>은 공룡을 전면에 내세운 블록버스터를 표방하지만, 실상 욕망의 소용돌이를 해부하는 기록이다. 공룡과 인간의 반복된 충돌도 자연의 분노라기보다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응답이 엇갈려 빗어낸 균열일 뿐이다.


애당초 ‘자연 복원’이라는 명분이 수상하다. 사라진 생태계를 되살리고 과거의 세계를 복원하겠다는 구호는 고상해 보이나 목적의 화살표는 자본과 이익의 영역을 향한다. 공룡은 자연의 일부가 아닌 관광 상품으로 전환되고, 생명은 진열을 위한 자원으로 재편된다. 결국 <쥬라기 공원>의 생태계 전체는 인간의 욕망을 증폭하려는 실험 설계도에 불과했다.


문제는 공룡 생태계가 설계도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들은 설득도, 계몽도, 협상도 수용하지 않는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도모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관리 가능한 자연’을 설정하지만, 자연은 곧바로 독자적 법칙을 작동시킨다.


생각하면 영화 속 공룡들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처벌한 적이 없다. 그들이 한 일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움직인 것이며, 생존을 위해 공격하고 피한 것이다. 생존의 문제로 목숨을 건 개체 앞에서 인위적인 전기 울타리와 통제 장치는 순차적으로 붕괴한다. 욕망을 위해 구축한 안전장치가 생존의 논리와 맞붙는 순간. 인간 공동체는 순식간에 스스로에게 칼을 겨눈 피고인의 위치로 밀려났다.


고전이 오래도록 인간의 탐욕을 경계한 이유가 여기 있다. 『주역(周易)』 동인괘(同人卦)는 사적 욕망을 넘어선 공동체적 대의의 필요를 환기한다. 문의(文意)는 “교외에서 함께한다 [同人于野]”라는 구절로 집약된다. 교외라는 공간은 열린 들판의 공적 연대를 보여준다. 사적 욕망과 편애의 벽을 넘어야 비로소 공동체라는 건축물이 구축된다는 진단이다.


아쉽게도 동인괘를 구성하는 여섯 효는 괘가 주장한 대의에 번번이 실패한다. 가까운 유대에 집착해 공동체를 사유화하는가 하면, 욕망에 막혀 결단하지 못하고, 군주의 자리에 있을 때조차 감정에 휘둘린다. 공공선을 입에 올리지만 효의 내부에서 사적 욕망이 새어 나온다. 공동체의 언어를 빌려 사적 이익을 포장하는 인간 사회와 다를 게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인괘가 그리는 이상향은 인간이 아닌 자연 생태계에서 더 선명하게 구현된다.


숲을 이루는 나무들은 서로 경쟁하듯 위로 솟구치지만, 성장은 공동체의 유지를 전제로 이루어진다. 가장 높이 치솟은 나무가 빛을 독점하는 것처럼 보여도 땅 아래는 뿌리와 균류가 얽힌 ‘균근 네트워크’가 자리한다. 균근 네트워크가 공유하는 건 영양분과 질병 정보. 개별 나무가 욕망을 과시하며 정보를 독점하는 일은 없다. 마치 숲의 존속이 개체의 생존 요건임을 체화한 존재처럼 작동한다.


꿀벌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어떤 꿀벌도 자신의 영달을 위해 꿀을 축적하지 않는다. 여왕벌 역시 사적 권력의 주체가 아니라 종의 지속을 위해 기능하는 기관에 가깝다. ‘사회 유지’라는 대의를 기준으로 역할은 세분되고, 일벌은 때로 자신을 소모하면서까지 세력을 지탱한다. 벌 사회의 시간은 소유의 정도가 아니라 집단의 존속을 기준으로 흐른다.


이처럼 자연 생태계는 욕망의 언어가 아닌 존재의 방식을 통해 말없이 공동체 윤리를 실현한다.


반면 인간 사회는 어떠한가. 공동체와 욕망이 동일한 무대 위로 올라오고, 빈번하게 공동체라는 대의가 사욕을 관철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기업은 사회적 가치를 호명하면서도 최종 결산의 모든 평가를 이윤으로 환원한다. 국가는 공공선을 거론하면서 이해관계를 정교하게 저울질하고, 개인 역시 거창한 명분의 틈새에 자신의 욕망을 밀어 넣는다. 공동체라는 단어가 화려한 포장지로 둔갑하는 사이, 실제적 책임과 배분은 끝없이 미뤄진다.


노자는 이 구조를 오래전에 간파했다. 그는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갈 수 있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라는 말을 남겼다. 자칫 오랜 늙은이의 도덕적 훈계라 치부하기 쉽지만, 삶의 구조에 대한 통찰에 가깝다. 끝없는 욕망은 파멸의 가능성을 품는다는 사실. 오래가고자 한다면 멈춤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경계다.


다만 많은 경우에, 인간은 불 속에 뛰어드는 부나방이 된다. 분명 머리로는 인류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자신의 소유와 안위를 먼저 떠올린다. 역사서를 뒤적여도 인간의 역사는 늘 이중 구조 속에서 유영했다. 윤리의 이름을 내세우던 시대에도 욕망의 굴곡이 음영을 남겼는데, 전 지구적 소비가 일상화된 오늘에 이르러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럼에도 철학도로서의 나는 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의 미세한 변화를 마지막 가능성으로 붙들고 싶다. 구조를 바꾸는 일은 국면을 전환하는 혁명에 가깝지만, 혁명을 이루는 건 개인이라는 일상의 체온에서 시작된다. 인간 개개인이 자각하고 움직인다면 판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역사 속 혁명과 전환이 이루어진 상황처럼.


유가(儒家) 경전인 『대학(大學)』이 개인의 자각과 인식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다. 격물과 치지, 성의와 정심, 그리고 수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자기 삶에 기준선을 긋는 작업이다. 개인의 마음속 기준선이 확고해질 때, 미세한 흐름이 굵직한 파도에 균열을 만들고 새로운 씨앗의 발아를 돕는다.

<쥬라기 공원>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 지점으로 환원한다. 위기를 예고하는 이득이 눈앞에 놓일 때, 인간은 어떤 마음으로 손을 뻗어야 하는가. 이득이 위험을 동반한 채 세상을 활보하는 시기, 우리 각자의 마음에 질문이 필요해진다. 질문을 품은 자만이 욕망의 문턱에서 잠시 상황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각자의 하루에 손을 뻗은 욕망의 그림자를 짚어보자. 욕망이 아닌 존재를 묻는 순간, 이득을 향했던 손의 방향은 조금 느려진다. 인간으로 태어나 위대한 족적을 남겨도 좋겠지만, 세상의 거대한 파도에 균열을 내는 일 또한 의미 있지 아니한가.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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