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로즈버드 (Rosebud)

【大有卦】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by 이루리


겨우내 추위가 공기를 두드리지만, 차가운 공기를 이겨야 훈풍을 마주하는 게 삶의 법칙이다. 누구나 그렇다. 따스한 바람이 봄의 어깨를 타고 넘어와야, 벌들도 겨우내 얼어붙었던 몸을 펴고 활동을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세상의 온도가 높아지면 여왕벌은 하루 최대 2,000개의 알을 낳는다. 벌의 인구가 늘어나는 신호다.

이 시기 양봉가의 손이 바빠진다. 불어나는 꿀벌 개체수를 잘 살펴야 한다. 자칫 시기를 놓치면 벌이 분봉(分蜂)하기 십상이다. 분봉이란 좁아진 벌통을 나간 벌들이 새로운 집을 찾아 나서는 일. 늦봄에 집 나간 벌 찾으러 다니는 양봉가가 심심찮게 눈에 띄는 이유다.


그렇다고 벌들이 공간을 탐하는 건 아니다. 모든 개체수가 충분히 살아갈 정도의 공간만 확보되면 그뿐이다. 굳이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 애쓰지 않는다. 고로 꿀벌 생태계에서 영역 전쟁은 없다.

동물행동학에서는 이를 ‘경제적 방어성’이라 부른다. 동물은 욕망이 아닌 생존의 효율로 영역을 판단한다. 에너지의 낭비를 막고 유연한 경제활동을 구가하기 위한 장치다. 늘 ‘소유’라는 단어에 집착하고 긴장하는 인간과 사뭇 다르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 바흠은 해 질 녘까지 밟은 모든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는다. 땅을 사기 위해 아들마저 머슴으로 보냈던 그였기에, 마음에 욕망이 일었다. 바흠은 계산을 멈추고 달리기 시작했다. 더 넓은 땅에 대한 욕망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태양이 서서히 기울 무렵, 숨이 가빠졌다. 멈추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 같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해가 지기 직전 출발선에 돌아왔지만, 그는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곧이어 피를 토하더니 숨을 거둔다. 결국 그가 손에 쥔 건 광활한 영토가 아니었다. 6피트 남짓한 작은 땅이, 세상을 등진 그에게 허용된 전부였다.

톨스토이가 짧은 이야기로 인간 욕망을 풍자했지만, 우화로만 치부할 수 없다. 바흠의 질주가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소유’는 곧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었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넓은 집이 사람의 가치를 대변한다. 수없는 기록이 소유와 존재의 다른 층차를 보여주지만, 인간은 끝없는 내면의 공허를 소유로 덮으려 노력해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유는 허기를 견인하고, 허기를 느낀 자는 더 큰 소유를 희망한다. 풍요를 꿈꾸나 풍요로울 수 없는 악순환 고리다.

그렇다면 대체 진정한 풍요란 무엇일까. 과연 극대화된 소유가 풍요를 가져오는가. 인류가 탄생한 시점부터 이어진 오랜 질문에 『주역(周易)』은 뜻밖의 답을 내놓는다. 64개의 주역 괘 중 풍요로움으로 손꼽히는 대유괘(大有卦)인데, 풍요를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유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 오해를 꼬집느라 바쁘다.

대유괘(大有卦)의 상징은 하늘 위에 태양이 뜬 형상이다. 태양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 세상 만물을 가진 듯하다. 크게 소유한 모양새에 가깝다. 다만 대유괘를 표면적으로 보고 ‘소유’를 연상하면 큰코다친다. 이 괘의 진정한 통찰은 외형이 아닌 내부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괘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효를 보면, 리더의 자리에 음효(陰爻)가 있고 다섯 개의 양효(陽爻)가 음효를 따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리더는 강해야 하는데, 대유괘는 정반대의 배치를 보인다. ‘강하다’는 선입견을 뒤집기 위한 장치다.

사실 리더의 강함은 힘으로만 증명되지 않는다. 힘이 욕망으로 가득할 때, 주변인은 리더에게 원망을 사기 마련이다. 충돌의 전조다. 리더가 욕망을 비우고 주변을 포용해야 비로소 리더의 그릇에 인재와 자원이 모인다. 결국 큰 소유란 움켜쥐는 행위로 쥐어짜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

이는 영화 <시민 케인>의 주인공을 봐도 알 수 있다. 주인공 찰리 포스터 케인은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린 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저택 ‘제나두’를 지었다. 전 세계의 예술품과 조각상, 희귀한 물건이 가득하다. 외형만 놓고 보면 그는 이미 대유(大有)의 상태에 도달한 듯 보인다.

그러나 케인의 비극은 저택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는 관계를 통제하며 사람을 소유하려 애쓴다. 케인의 친구와 연인이 곁을 떠나고 삶은 고립된다. 큰 소유를 이뤘으나 결국 무엇도 가지지 못한 케인. 결국 그는 저택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간다. 죽음의 순간, 그는 ‘로즈버드 (Rosebud)’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어린 시절 그가 타던 썰매의 이름이다. 결핍을 소유로 채워나가기 전, 조건 없이 행복했던 시절의 상징이다.


풍요 속 완벽한 빈곤은 탐욕과 통제욕으로 가득한 소유가 낳은 결과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소유 자체를 거부하거나 무소유를 자랑할 일은 아니라는 것. 다만 소유에 집착하거나 소유하기 위해 끝없이 욕망하는 태도가 문제다. 소유의 대상과 태도를 명확히 직시해야 하는 이유다.


맹자는 “귀해지고자 하는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다 [欲貴者, 人之同心也]”라고 인정하면서도, “사람마다 이미 자기 몸에 귀한 것을 가지는데, 생각하지 않을 뿐 [人人, 有貴於己者, 弗思耳]”이라고 일축했다. 우리는 이미 본유(本有)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외적 대상에 대한 욕망에 묻혀 보이지 않을 뿐. 그런 우리에게 맹자는 자신의 귀함을 찾아 보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물론 맹자가 우리에게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요구한 건 아니다. 그는 오히려 경제적 자유를 구가할 때 인간 고유의 무언가를 유지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다만 늘 본질과 수단을 구분하라는 경고를 덧붙인다. 경제적 자유는 본질적 마음을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


생각하면 우리는 이미 ‘존엄, 양심, 사랑, 부끄러움’처럼 내면의 태양을 품고 있다. 외적 세계를 대표하는 소유의 대상들은 내면의 태양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영화 <시민 케인>에서 케인이 마지막에 중얼거린 로즈버드는 멀리 있던 보물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가 가지고 있었으나, 욕심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주인공 바흠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만일 그가 달리기를 멈추고 잠시 하늘을 응시했다면 어땠을까. 해는 지더라도 자신의 삶은 꺼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욕망의 나침반을 주목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죽은 자가 점유하는 땅은 6피트에 불과하지만, 산 자에게 열린 하늘은 무한하다. 결국 진정한 소유란 무엇을 손에 쥐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비워내고 담는 행위가 갈마들며 자신을 스스로 품어내는 일에 가깝다.


정신없이 달리는 날이면 잠시 멈춰 손을 바라보자. 굳게 닫은 채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더 많은 땅을 얻으려 달리고 있는가? 자, 이제 닫혀버린 손을 펴고 하늘을 응시할 시간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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