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謙卦】 힘써 겸손한 상태
오늘날 우리가 겪는 갈등의 상당수는 외부의 적대에서 비롯되기보다, 자기 자신을 다루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실제로 버지니아 대학교의 티모시 윌슨은 ‘방치된 고독’이란 실험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다루는 데 미숙함을 증명했다. 결국 외부의 적과 싸우는 수많은 갈등은 사실 자기 통제력을 잃은 자아의 비명일지 모른다.
특히 불안과 분노, 열등감과 우월감이 정리되지 않은 채 표류할 때, 감정은 타인을 향한 공격이나 혐오의 언어로 변질된다. 이 지점에서 심리적 건강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건강한 심리는 단순한 긍정의 유지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와 부정적 감정까지 온전히 수용하고 인정한 내적 근력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한계와 감정의 온전한 수용은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의 내면은 높은 곳에서 조망할 때보다, 스스로를 낮출 때 또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상승을 선호하고 하강을 꺼린다. 이 지점에서 오랜 고전의 덕목인 ‘겸손’은 도덕 교과서의 미덕으로 머물지 않는다. 자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위한, 현대인의 정신을 지탱하는 가장 현실적 실천 원리가 된다.
사실 자아의 온전한 수용은 가장 낮은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서 시작된다.
영화 <킹스 스피치>의 조지 6세가 하나의 예다. 그는 세상 모든 권력의 정점이자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다만 하나의 큰 결함을 가졌다. 대중 앞에 설 때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말더듬이라는 치명적 결핍 앞에서, 왕관은 힘을 쓰지 못했다.
제국을 호령하는 왕이 자신의 혀조차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강렬한 실존적 아이러니를 낳는다. 인간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내밀한 ‘그림자’를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조지 6세는 자신을 수용함으로써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난다. 바로 말더듬이라는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평범한 언어 치료사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순간이었다. 성장은 결핍을 부정하기보다, 결함을 직면하고 다루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 이 장면에 담겨 있다.
주역의 겸괘(謙卦)는 이처럼 역동하는 인간의 내면 구조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다. 겸괘의 상징은 산과 땅인데, 구조가 묘하다. 본래 대지 위로 솟아올라야 할 산이, 땅 속으로 잠겨 몸을 낮추는 형상이다.
상상할 수 없는 모양새지만, 이는 내적 역량이 있음에도 과시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 낮추어 균형을 이루는 [有而不居] 자세. 겸괘(謙卦)가 풍요와 소유의 상징인 대유괘(大有卦)의 다음에 오는 이유다. 산이 땅 밑에 숨어 자신을 낮추듯, 자신의 우월함을 절제하고 세상과 수평적으로 조우할 때 비로소 갈등을 관리할 힘을 갖게 된다.
이는 심리학의 ‘더닝-크루거 효과 (Dunning-Kruger Effect)’로 명확해진다. 특정 분야에서 능력이 낮은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능력이 높은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는 것.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이 쌓인 자는 오히려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말을 아낀다는 의미다.
겸괘(謙卦)의 구삼효(九三爻)가 말하는 ‘힘써 겸손한 상태 [勞謙]’는 이 지점을 정확히 짚는다. 겸손은 단순한 겸양의 몸짓이 아닌 인식의 정확성에 가깝다. 나의 성취가 오롯이 나만의 능력 탓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류의 삶은 필연보다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에 놓여 있다. 수많은 우연과 타인의 조력이 없다면 누군가의 산은 애당초 세워질 수 없다. 우연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면 인간은 타인을 내려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스스로 낮추어 올려보는 [卑以自牧] 자세로 나아간다.
생각하면 인류를 제외한 자연계 존재는 이미 ‘힘써 겸손한 상태 [勞謙]’의 진리를 알고 있다.
양봉 작업을 하다 보면, 꿀벌이 겸괘의 정신을 이미 생존의 조건으로 허용했음을 알게 된다. 꽃이 가득 피어나 꿀이 잔뜩 들어오는 계절. 때로 자신의 벌통이 다른 벌통보다 꿀이 가득 차고 개체 수가 번성해도, 꿀벌은 자만하지 않는다. 풍요란 언제든 기후 변화나 외부의 위협 앞에서 무너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풍요의 정점에서 더욱 분주히 날갯짓하는 이유다. 풍요롭더라도 어디선가 결핍과 결함이 발생해 위기가 다가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풍요의 그림자에 가려진 위험마저 온전히 받아들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삶을 조망하는 자세다.
역사 속 인물 역시 겸괘의 정신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 왔다. 일례로 중국의 소동파와 조선의 임윤지당은 출발선이 극단적으로 달랐지만 결국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당대 최고의 천재였던 소동파는 정적의 시기와 유배라는 시련을 통해 자신의 ‘높은 산’을 스스로 허물었다. 황주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음식을 만들며 대중과 함께 숨 쉬는 자리로 내려와 삶의 흐름을 파악했다. 그 과정에서 문장이 단단해지고, 깊어졌다. 화려한 수사는 빠졌지만 담담한 감동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반면 임윤지당은 애초에 낮은 자리에서 출발한다. 여성이라는 사회적 제약이 태생적으로 자신의 몸을 덮쳤다. 다만 그녀가 선택한 길은 원망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다잡고 수양하는 내면의 관조로 손을 내밀었다. 집안일을 돌보는 와중에 성인의 도리를 탐구하고 내면의 산을 묵묵히 쌓아 올릴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소동파는 내려오고, 임윤지당은 고요히 쌓아 올렸다. 형식은 달랐지만 원리는 같았다. 그들은 겸손이란 진리 속에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길을 밟아 나갔다.
판단컨대 현대 인류가 겪는 갈등의 원인 중 하나는 겸손의 부재다. 성취가 곧 개인의 공로라는 믿음이 만연하고, 타인의 실패를 노력의 부재라는 도덕적 결함으로 오해한다. 혐오와 분열의 도화선이다.
마이클 샌델이 지적했듯 능력주의의 오만은 공동체를 붕괴시킨다. 그렇다고 단순히 분배의 논리로 해결할 문제도 아니다.
겸괘(謙卦)의 상징을 풀이한 말 중에는 ‘많은 것을 모아 부족함을 보충하여 사물을 균평하게 베푼다 [裒多益寡 稱物平施]’라는 말이 있다. 자칫 분배 우선주의를 조정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소유를 우연의 산물로 인식하는 태도에 대한 요청이다. 삶의 우연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사회는 끝없는 비교와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까닭이다.
물질적 소유는 변동적이나 내면의 태도는 영속적이다. 삶이 거대한 우연의 흐름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수용한다면, 우리가 취할 전략은 자신을 낮추는 일이다. 가졌다고 스스로 드높이지 않고, 없다고 스스로 비하하지 않으며, 타인과의 관계에 존중을 유지하는 태도. 질투와 경멸을 불식하고, 갈등을 관리하는 여백을 만드는 작업이다.
솔직히 쉽지 않다. 삶을 온전히 수용하는 일이 어찌 쉬우랴. 삶의 우연은 출발선조차 달리 설정하기에 가슴의 원망은 쌓이기 마련이다.
다만 자각해야 한다. 환경과 배경을 제거하고 본다면, 인간은 누구나 맨손으로 결핍을 가진 채 태어나 맨손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성취가 있으면 좋으나 오만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겸괘(謙卦)가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당신의 산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높이를 자랑하며 타인을 내려다보고 있는가, 아니면 땅속에서 스스로 낮추어 자신과 세상을 품어내고 있는가. 선택은 개인의 몫이나 생존의 방향을 정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의 산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