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중심을 세운 자의 초상
대지가 겨울의 잔상을 품고 침묵하는 1월 말. 양봉인의 감각은 온통 벌통 내부의 미세한 열기로 향한다. 벌을 키우는 데 있어 봄은 단순히 따스함을 상징하지 않는 까닭이다. 오히려 기미[幾]를 읽는 시험대와 다름없다.
훈풍이 불면 벌들은 살짝 높아진 태양의 고도와 미세한 기온의 편차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겨우내 유지한 봉구(蜂球)를 풀기 위해 꿈틀거린다. 새로운 시작의 징조이자, 발걸음을 떼겠다는 의지다.
숙련된 양봉인이라면 벌들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 사이에서 역동하는 미세한 징조를 포착해야 한다. 기미 하나를 놓쳐 시의적절한 대처에 미흡하면 안 된다. 자칫 한 해의 벌 농사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늘 넉넉히 보이지만 작은 균열이 커다란 교란으로 연결되곤 한다.
이처럼 농업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도 변화의 행간을 읽어내야 하는 작업에 가깝다. 순간적인 판단과 작은 혁신 없이 한 해를 똑바로 지낼 수 없다. 기미를 알아차리면 즐거움이 도래하나, 잘못 움직이면 땅 치고 후회하기 일쑤다. 농사가 ‘기다림’이면서도 ‘감지’인 이유다.
사실 즐거움이란 늘 자연스레 다가오는 존재가 아니다. 때로 한차례 폭풍을 효과적으로 대응하며 갈무리했을 때 다가오는 감정이기도 하다. 수많은 삶의 장면이 폭풍으로 물든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즐거움이란 폭풍의 뒷면에 있는 무언가인가 싶다. 기쁨은, 결론보다 통과의 흔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지혜는 『주역(周易)』 예괘(豫卦)에 또렷하게 드러난다. 예괘(豫卦)의 예(豫)라는 글자는 문자 그대로 ‘즐거움[樂]’을 의미하는데, 동시에 ‘예비하다 [備]’라는 뜻도 품는다. 즐거움이 곧 준비라는 역설. 그래서 공자는 이 괘의 육이효(六二爻)를 논하며 “기미를 아는 자는 신묘하는구나 [知幾其神乎]”라며 탄식했다.
여기에서 기미(幾)란 사물이 움직이는 가운데 선악과 길흉이 갈라지는 찰나의 미세한 지점을 말한다. 깨어 있는 자는 대다수가 즐거움에 취해 있을 때조차 사물의 이면에 숨은 미동을 감지하고 위기를 대비한다. 쉽진 않지만, 필요하다. 삶의 곳곳은 표면 아래에 숨은 의미로 가득하니 말이다. 내가 놓치는 것은 대개 커다란 구멍이 아닌 작은 균열이다.
역사 속에서도 기미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차고 넘친다. 그중 하나가 조선시대 임진왜란이다. 돌연 폭발한 전란으로 보이나, 이면에 작은 징후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1592년 일본 침략이 시작되기 전, 임금 선조는 일본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한다. 당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 탓이다. 문제는 통신사의 보고에 있었다. 통신사로 다녀온 사람의 보고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렸다. 기미는 분명했지만, 인간적 판단이 적확한 인식을 방해했다.
서인 황윤길은 전쟁의 기미를 포착하고 국난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동인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관상을 운운하며 침략 가능성을 부정한다. 기미를 읽고 국난을 극복해야 할 주체들이었건만, 정치라는 도구에 정신적 독립성을 상실하고 당파적 광기와 확증 편향에 내몰리고 말았다. 보지 못한 일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았던 것.
결국 대비도 하지 못한 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조선은 처참히 무너졌다. 국왕이 궁궐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랐던 비극은 예괘의 마지막 효가 지적한 ‘어둠에 빠진 즐거움[冥豫]’의 전형적 말로다.
그 와중에 같은 어둠 속에서도 기미를 살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순신이었다. 그는 조정의 당파 싸움이나 국가적 안일함에도 흔들리지 않는 주체성을 유지한다. 남해 파도 소리 너머에 들리는 전란의 기미를 읽는 한편, 전쟁 직전까지 군비를 정비하며 군사를 훈련시킨다. 그는 ‘지금’의 공기 이면에 진동하는 파국의 기운을 현재의 행위로 번역하고 있었다.
예괘(豫卦)의 효사에서 ‘돌처럼 절개를 지키는 일[介于石]’을 조언하는 이유다. 기미를 아는 일이란 단순한 물리적 대비나 점술적 예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적 다짐에 가깝다. 끊임없이 표상 속 내부를 살핌과 동시에 주변의 바람으로부터 주체성을 지켜내는 일. 한마디로 말하면, 판단의 윤리를 지키는 일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밸리는 위기를 두고 “초기에 치료가 쉬우나 알아내기 어렵고, 시간을 보내면 알아차리기 쉬우나 치료가 어렵다”라고 역설했다. 관찰하고 살피는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면 치료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마주하기 십상이다. 위기는 언제나 ‘사건’이 아닌 ‘전조’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괘(豫卦)가 전하는 통찰은 즐거움의 본질에 대한 재정의다. 진정한 즐거움이란 단순한 쾌락의 탐닉이나 찰나의 웃음이 아니라는 것. 즐거움의 완성은 현재를 경건하게 내다보며 흐름을 살피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예(豫)’라는 글자로 흥겨움보다 세밀한 관찰을 조언한다.
세밀한 관찰은 누구에게나 허용된 감각이 아니다. 내면의 중심을 돌처럼 굳건히 세워 세상의 소음에서 자유로운 자여야 비로소 예민한 감각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 감각은 ‘예민함’이기 전에 ‘정직함’이다.
결국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온다. 내 마음이 무엇을 따라 움직이는지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주변의 바람에 흔들리는 풀의 형상인지, 아니면 ‘나’라는 건물을 굳건히 받치고 서 있는 기둥의 모양새인지.
세상은 늘 흔들리기에 기둥이 있어야 세상의 흔들림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기둥 없이 흔들리면 온갖 정보에 휩쓸려 왜곡된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흔들린 채 요란하다 구덩이에 빠진 후 “이제 알았다”라고 말해봐야 늦을 뿐이다. 역사 속에서 꾸준히 일어났던 일이다. 우리 삶에도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알아차리지 못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