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식민징에서 벗어나라
1977년, 케냐 카미티 중범죄자 교도소. 나이로비의 태양이 담장 밖에선 찬란했으나 교도소 내부를 비추지 못했다. 습기와 절망의 냄새로 무겁게 가라앉은 철문 앞에 새겨진 방 번호는 16번. 방을 살펴보면 수감번호 K6, 77이라 불리는 마흔 살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영장도, 재판도 없이 갑자기 끌려왔다. 당시 감옥은 이유 모르게 끌려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암묵적 죄가 있다면 국가가 규정한 괘씸죄. 국가에 의해 위험 분자로 규정된 이상, 그들은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즉, 존재의 증명은 스스로 해야 하는 일. 남자가 감옥 안에서 자신의 증명 수단을 찾아 헤맸던 이유다.
사실 그는 늘 언어로 존재했다. 종이와 펜만 있다면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교도소 내 허락된 종이라곤 배설물 처리를 위한 화장지가 전부. 진술서 작성용으로 제공된 펜은 있었지만, 종이는 철저히 금지됐다. 남자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도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펜을 쥐고 고민하던 그는 손에 들린 화장지를 응시했다. 화장지도 종이였다. 쓸 수만 있다면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그는 감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휴지 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장 비천한 종이에 숭고한 정신이 기록되던 순간이다.
수감 번호로 가려졌지만, 당시 그는 세계적으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세상이 지칭하던 그의 이름은 ‘제임스 응구기.’ 소위 대영제국 식민지 교육 시스템이 배출한 케냐 최고의 엘리트이자, 소설가였다.
식민지 케냐에서 영어는 단순한 외국어라 치부하기 어려웠다. 권력의 상징이자 신분 상승의 사다리였으며,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통행증에 가까웠다. 식민 지배자 대영제국은 케냐의 언어인 키쿠유어를 입에 담은 학생 목에 굴욕적 팻말까지 걸며 수치심을 강요했다. 시간이 흐르며 키쿠유어는 부끄러움의 상징으로 변해갔다.
제임스 응구기는 식민지 교육 시스템을 이견없이 수용했다. 케냐 마케레레 대학을 졸업한 후 영국 리즈 대학에서 유학했고, 서구 지성계의 문법을 완벽히 체화했다. 그가 익힌 서구적 사고는 문학적 재능을 타고 빛을 발했다. <울지마라, 아이야>, <한 톨의 밀알> 같은 초기작을 본 서구의 평론가들은 그를 ‘아프리카의 목소리’라며 치켜세웠다.
문제는 제임스 응구기의 마음 한구석이 영 찜찜했다는 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질수록 그는 자기 분열과 좌절에 시달렸다. 영국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고향의 어머니는 아들의 책을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었다. 케냐인의 고통을 식민 지배자들의 유희로 팔아넘긴다는 생각에 죄책감도 엄습했다.
세간에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제임스 응구기의 영혼이 삐걱댔던 이유다. 거울을 보면 검은 피부 위에 하얀 가면을 덧씌운 자신의 초상이 망령처럼 따라붙었다. 어느 순간 본질적인 질문이 가슴에 차올랐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로 아프리카의 비극을 노래하는 행위가 정당한가에 대한 의문.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근원적 긴장감이 쓰디쓴 쑥물처럼 목울대를 쳐댔다.
마흔 살이 되던 해. 그는 결국 새로운 도전을 모색한다. 케냐로 돌아가 모국어로 된 연극을 만들기로 결심했던 것. 교수직이 보장됐던 영국의 삶도 주저 없이 정리했다.
이윽고 고향 카미리투로 돌아온 제임스 응구기는 동료와 함께 대본을 집필했다. 배역은 문맹인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맡겨버렸다. 연극 <나의 님과 결혼하리(Ngaahika Ndeenda)>는 이처럼 거칠고 투박한 환경 속에 탄생한다.
예상을 선회하는 폭발적 반응이 이어졌다. 케냐의 민중은 모국어로 이루어진 작품을 보고 열광했다. 웃고, 울고, 분노했다. 식민 지배로 숨어버린 키쿠유어가 얼굴을 내밀며 국민의 집단 무의식을 건드렸다. 케냐 민중은 점차 사회적 부조리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케냐 권력가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당시 독립 케냐의 지도자들은 식민 시대 통치 방식을 답습했다. 영어는 여전히 특권이었고, 무지몽매한 국민은 권력 유지의 핵심이었다. 깨어난 민중은 위협 그 자체였다.
제임스 응구기는 하루아침에 정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영문 소설가 제임스 응구기는 권력자들의 영웅이었으나, 키쿠유어 소설가 제임스 응구기는 제거 대상에 불과했다. 투옥된 후 제임스 응구기는 냉혹한 현실을 자각했다. 부조리한 케냐에서 언어는 계급이자 권력으로 작동할 뿐이었다.
언어가 계급이자 권력으로 작동하는 한, 몽매한 국민은 정신적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다. 제임스 응구기는 결심했다. 다시는 영어로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영국의 비평가 따위가 칭송하는 세련된 언어를 버리고, 투박하고 거친 키쿠유어로 글을 쓰겠다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카미티 교도소 16번 방.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제임스 응구기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화장지에 빼곡하게 새겨진 키쿠유어로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뼈를 깎는 고통이 동반됐다. 영어 문법에 젖은 뇌를 모국어의 리듬으로 전환하는 일. 굳어버린 근육을 찢어 다시 맞추는 듯한 아픔이 찾아왔다. 하지만 고통의 전율 속에서 그는 자유를 느꼈다. 영어가 주던 알량한 우월감을 모국어의 묵직한 소속감이 대체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임스 응구기’라는 관성 어린 이름도 죽였다. 살던 대로 살지 않고, 자율적 케냐인의 모습으로 살기 위한 준비였다. 그는 ‘응구기 와 티옹오’로 다시 태어났다.
간수의 눈을 피해 숨겨둔 매트리스 아래, 키쿠유어가 새겨진 화장지가 쌓였다. 한 장씩 모인 화장지는 점차 거대한 서사로 둔갑했다. 종이가 부족해 글자를 아낀 탓에 문장은 더 응축됐다. 소설 <십자가 위의 악마(Caitaani kũtharabainĩ)>가 탄생한 비화다.
소설을 통해, 그는 증명했다. 감옥이라는 물리적 폐쇄 공간이 언어라는 정신적 날개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권력자들의 탐욕도 민족적 자긍심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흘러 출소했지만, 응구기 와 티옹오는 케냐에 머물 수 없었다. 권력욕에 잠식된 조국이 그를 품어줄 리 만무했다. 그는 주저 없이 망명객을 택했다. 전 세계를 떠돌며 "마음의 탈식민화(Decolonising the Mind)"를 외치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그의 주장은 급진적이고 불편했다. 아프리카 작가들이 제국주의 언어로 글 쓰는 행위를 식민 통치의 연장이라 비판하고, 언어는 문화의 기억 은행이라 주장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어록에 불편감을 호소했다. 응구기 와 티옹오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 나갔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매년 거론되면서도 끝내 수상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비타협적 태도였다. 그는 죽는 날까지 서구 문학계가 정해놓은 보편성이란 기준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케냐의 언어로 특수성 속에서 진정한 보편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이미 오래전 타율적 관성을 벗어버린 이에게 세간의 보편성은 흩날리는 먼지에 불과했으리라.
타율적 관성은 안정적이다. 인류가 관성에 몸을 쉽사리 맡기는 이유다. 그런 사람들에게 응구기 와 티옹오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삶을 통해 내려는 목소리는 무엇이냐고. 질문 끝자락에 한마디 덧붙이기도 한다. 언제든 가슴에 자신의 목소리가 울릴 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라고.
카미티 감옥의 거친 화장지 위에 써 내려간 그의 문장들이 안온하게 살아가려는 인류의 정신을 날카롭게 찌른다. 자칫 남의 혀를 빌려 노래하기 쉬운 세상에서, 서툴고 거칠더라도 자신의 혀를 쓰는 법을 익히라는 일침이다.
나 자신이 세상에 부르고 싶은 노래는 무엇인가. 아니, 나는 과연 나의 혀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응구기 와 티옹오의 삶을 보면, 인생의 본질적 문제의식이 피어오른다. 그럼에도 스스로 혀를 자르고 자유를 추구한 그의 모습을 선뜻 따라갈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생각하면 용기란 발자국 하나 내는 순간인 것을. 발자국 하나는 마음의 중대한 결심에서 출발한다. 고금의 현인들이 마음을 제일의 문제라 지적한 이유를 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