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관아생 [觀我生]

【觀卦】라쇼몽 효과

by 이루리


소설 <라쇼몽>은 욕망에 따른 관점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폭우가 쏟아지는 교토 라쇼몽 아래에서 벌어진 한 남자의 죽음. 그 사건을 둘러싸고 네 사람이 서로 다른 진술을 내놓는다. 철저히 개인의 욕망을 따르는 관점은 인간 인식의 근원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묘사한 인식의 파편화는 인간의 협소한 시야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우리가 삶의 진정한 의미를 포착하지 못한 채 갈등의 늪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상을 온전히 조망하지 못한 채 각자의 라쇼몽 아래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주역(周易)』 풍지관괘(風地觀卦)는 바로 이러한 협소한 시야에 경고를 보낸다. 관(觀)이라는 글자 자체가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 어원이 흥미롭다. 글자의 유래를 살펴보면 황새가 높이 날아올라 사방을 예리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는 단순히 눈으로 사물을 보는 행위를 넘어선다. 높고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세상의 본질과 흐름을 꿰뚫어 보는 인식의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풍지관괘(風地觀卦)의 여섯 효(爻)는 인간 시야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은 어린아이의 시야 [童觀]에서 시작한다. 이어 문틈으로 세상을 엿보는 단계 [窺觀]를 지나,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觀我生] 경지로 나아간다. 좁은 문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소년이 점차 시야를 넓혀 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갈등과 분쟁은 서로 다른 문틈이 충돌한 결과다. 각자가 자신의 문틈으로 본 것만을 절대적 진실이라 믿고, 서로의 시야를 인정하지 않을 때 화합은 멀어진다.


이는 <라쇼몽> 속 인물들이 서로의 거짓을 폭로하며 자신의 추악함을 감추려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추악한 욕망의 끝이 결국 파국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만이 옳고 타인은 틀렸다는 흑백논리나 타인의 관점을 적대시하는 태도가 생존에 도움이 될 리 없다.


자연계에서도 생존은 거시적 관점을 확보하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얽힌 생태계의 각축장에서 좁은 시야에 대한 집착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가 매나 독수리의 경이로운 시각 체계다. 이들은 망막에 이중 초점 시각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넓은 각도로 세상을 조망하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목표물을 정밀하게 포착하는 시각이다. 만약 맹금류가 이 가운데 하나의 시각에만 의존한다면 어떻게 될까? 눈앞의 먹잇감에만 집착하다 주변의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숲 전체만 바라보느라 사냥감을 놓친다면 생존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중 초점 시각을 가지지 못한 동물 역시 다른 방식으로 넓은 시야를 확보한다. 꿀벌은 ‘8자 춤’을 통해 사회적 시야를 만든다. 먹이를 발견하고 돌아온 정찰벌은 벌집 안에서 특정 각도와 속도로 춤을 춘다.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확인한 먹이의 좌표를 전달하는 신호다. 먹이를 발견한 순간은 한 꿀벌의 경험에 불과하지만, 춤을 통해 전달되는 순간 그것은 집단의 시야로 확장된다. 꿀벌 군집이 거대한 유기체처럼 기능하는 이유도 개별적 시각을 통합된 시야로 확장하기 때문이다. 어떤 꿀벌도 다른 벌의 춤을 비난하지 않는다. 서로의 관점을 연결하지 못할 때 어떤 피해가 발생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넓은 시야란 단순히 멀리 보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거시적 맥락과 미시적 사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관점과 시야를 존중하는 고도의 인식 방식이다. 욕망이라는 좁은 문틈을 활짝 열고 나왔을 때 비로소 가능한 태도이기도 하다.


결국 자신의 욕망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주역(周易)』 관괘(觀卦)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살펴라 [觀我生]’라고 경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시야가 사사로운 욕심에 의해 왜곡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 묻는 과정이다.


사실 <라쇼몽>의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비겁함과 욕망을 정직하게 직시했다면, 그들의 증언은 변명이 아니라 참회와 화해의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현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음의 역동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창 역시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넓은 관점과 시야의 필요성은 공존의 문법과 연결된다. 좁은 시야는 우리를 불안과 갈등 속에 가두고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게 만든다. 반대로 넓은 시야를 갖게 되면 우리는 포용과 자유의 토대 위에서 타인을 이해의 동반자로 바라볼 수 있다.


분열의 시대에 살고 있기에 풍지관괘(風地觀卦)의 가르침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존중보다 혐오가, 공감보다 분노가 앞서는 시대가 아닌가. 어쩌면 소설 <라쇼몽>은 다가올 시대를 미리 비추는 거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슬픈 일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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