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명벌칙법 (明罰勅法)

【噬嗑卦】 편견으로부터의 탈출

by 이루리


석사과정 시기 교수님과 참석한 강연장에서 나는 옆자리 사내를 보고 얼어붙었다. 까맣다 못해 시커먼 얼굴 위로 툭 불거진 광대, 짙은 눈썹과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서늘한 눈매가 퍽 위압감을 풍겼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와의 접촉을 피했다. 어쩌면 육식 동물을 앞에 둔 초식 동물의 모양새와 같았다. 내 무의식이 저도 모르게 그가 거칠고 무례한 성정의 소유자일 것이라 단정 짓고 있었다.


강연 내내 견고했던 생각이 무너진 건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또다시 내 옆에 앉은 그 사내는 누구보다 부드럽게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온갖 궂은일에 먼저 몸을 일으키는 모습도 보였다. 선하고, 맑았다. 결국 나의 감각이 포착한 그의 정보는 커튼에 가려진 진실에 가까웠다. 부끄러웠다.


나만의 문제였을까. 어쩌면 인간 사회는 늘 외면이란 필터에 걸러진 진실 속에서 갈등한다. 오죽하면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사회적 병폐를 넘어 콘텐츠의 화두가 되었던가.


실제로 대중문화 속에서 고정관념은 반복적으로 변주한다. 영화 <슈렉>은 우리가 가진 전형적 편견을 유쾌하게 뒤집는다. 바로 동화 속 왕자는 언제나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늪지대 괴물은 사악할 것이라는 관념. 영화에서 누구보다 진실한 심성을 가진 괴물 슈렉은 오만하고 비겁한 파콰드 영주와 대비적으로 보인다.

<미녀와 야수>에서도 편견의 붕괴가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야수의 외모 건너편에 담긴 상처 입은 내면을 보듬던 여주인공 벨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과 대조적이다. 고정관념 하나로 야수를 사냥하려던 마을 사람들의 광기는 결국 공동체의 파괴를 야기했다.


이처럼 왜곡된 인간 사유는 『주역(周易)』 화뢰서합괘(火雷噬嗑卦)의 상징으로도 나타난다.


서합괘의 괘상(䷔)은 위아래로 놓인 양효(陽爻)가 인간의 입술과 턱을 표상한다. 그런데 입안 한가운데 구사효(九四爻) 하나가 자리한다. 바로 입에 물건이 걸린 [頤中有物] 모습. 위아래 턱을 다물지 못하는 상태다.


글자를 풀어보면 서합(噬嗑)의 서(噬)는 씹는다는 글자요, 합(嗑)은 합한다는 의미다. 즉 씹어 합해야 하는데 장애물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으니 얼마나 괴롭겠는가?


전통적으로 주역을 해석하던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한 장애물을 국가적 죄인이나 소인으로 보았다. 서합괘에 엄격한 처벌이란 의미를 담았던 이유다. 현대적 맥락에서 괘를 다시 읽으면, 다른 해석의 여지가 보인다. 우리 마음과 타자의 소통을 막는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합이 맞아야 할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고정관념과 편견은 하나의 장애물이 아닌가.


흥미롭게도 고정관념과 편견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미물이지만 꿀벌도 지독한 편견으로 가득하다.


그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편견은 여왕벌이 내뿜는 특유의 페로몬이다. 벌들은 페로몬을 기준으로 아군과 적군을 판별하고, 다른 페로몬의 존재를 즉각 공격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는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일상적 생존 전략이다. 다만 때로 치명적 장애가 되기도 한다.


바로 죽어가는 벌통을 살리기 위해 합봉(合蜂) 하는 시기다. 합봉이란 세력 약한 벌을 세력 강한 벌통에 넣어주는 방편인데,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자칫 실수했다간 양자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세력 좋은 벌들이 약한 벌들을 모조리 죽이고 만다.


그래서 양봉가들은 신문지로 냄새를 섞거나 합봉액이란 화학 물질을 뿌려 그들의 감각을 교란시킨다. 냄새라는 편견이 무너져야 벌들이 서로 섞일 수 있는 까닭이다. 동일한 종족임에도 냄새란 편견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벌들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기도 한다. 화합하지 못한 인간의 군상을.


분명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아울러 화합에 동참하지 못한 사회적 동물이 자멸에 이르는 건 자연의 이치다. 이상한 건 사회적 동물임에도 우리는 끝없이 편견의 장벽을 쌓고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다는 점이다.


사회심리학자 엘리엣 아론슨 (Elliot Aronson)은 인간의 갈등을 보고 ‘직소(Jigsaw) 협동 학습’이란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설계는 간단했다. 전체 퍼즐 조각을 나눠 학생들에게 서로 다른 조각을 지급하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과제를 완성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처음엔 서로 정보를 감추던 아이들이 점차 자신의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정보가 조각일 뿐이며, 타인의 존재가 나의 완성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상호의존성을 자각한 결과였다. 개인이 타인을 동반자로 인식하는 순간 고정관념과 편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결국, 우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상호의존성에 대한 자각은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일이다. 내가 바라보는 모든 일이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받아들이고자 스스로 편견의 막대기를 부러뜨린다.


물론 쉽지 않다. 세상에 수많은 존재가 공존하고, 경계해야 할 나쁜 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다만 소수의 악인을 변별하려고 모든 사람에게 편견의 화살을 들이대는 일이 합당한가?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 아닌가? 그래서 서합괘는 편견 없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온전한 세계를 조망할 수 있다는 지혜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편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서합괘(噬嗑卦)의 대상전(大象傳)은 ‘밝게 살피고 엄정하게 규칙을 집행한다 [明罰勅法]’는 조언을 내놓는다. 국가적으로 보면 엄정한 법 집행이겠지만, 개인의 내면으로 끌어들이면 반성에 가깝다. 조용히 마음에 걸린 편견의 가시를 살피는 일이다.


누군가를 인상만으로 판단하지 않았는지, 내가 가진 단편적 지식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지 않았는지. 조금의 편견이라도 발견하면 의지의 힘으로 가시를 뽑아 씹어 없애야 한다. 세상을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다. 홀로 살 수 없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려 애쓰지 않는가에 대한 점검이기도 하다.


석사 시절 만났던 험악한 인상의 사내는 나의 친우(親友)가 되었다. 얼마 전 나는 그에게 첫 만남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티 내지 않았지만 무서워서 말도 걸기 힘들었다고. 그는 웃으며 회답했다. 티 내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 고마워서 더 친해지고 싶었다고. 티 내지 않으려 했건만, 결국 티가 나버렸던 듯하다.


생각하니 나는 꽤 편견을 드러내며 사는 듯하다.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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