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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리바 Dec 10. 2019

난 더치페이하는 연상녀야.

구구 절절 다 이야기할 거야. 내가 쪼잔한 게 아니란 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나는 나이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다소 '영'한 정신연령을 지닌 나는 어린 친구들과 자주 섞일 때가 많았다. 노는 거 좋아하고 일 저지르는 거 좋아하고 그렇게 웃고 떠들다 보면 우리가 나이를 어디로 먹고 있나. 이럴 거면 다 맘먹어!! 하며 진상처럼 놀 아재 낄 때가 많았다.

다 놀고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점. 나보다 더 연장자가 나서서 비용을 정리하며 '직장인들이 내자'하면 잇몸 뒤끝까지 할 말이 튀어나오지만 애써 쿨 한 척 '오케이'를 외친다.

그리곤 집에 와서 '왜 지가 정하고 난리야?' '자기 혼자 쿨할 것이지 남까지 같이 묶어서 하는 건 뭐야' '이 집단엔 민주주의가 없네' '돈이 제일 많은 건 대학생 아닌가?' '이번 달 탕진인데.' 하며 속으로 속으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불만들을 켜켜이 쌓는다.

분명 놀 때는 꼰대 없이 수평적으로 잘 놀았다고 여겼는데...



난 어느 모임이든 나이 많은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한 적이 없다. 전가하고 싶지도 않고.

오히려 그런 책임은 자연스럽게 N분의 일로 하자 라며 목소리를 내며 같이 분담했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매년 당연하게 먹는 나이만큼 나의 수입과 비례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저 '나이'가 많으니깐 비용을 낸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그러나 그 분위기를 못 이기며 스스로 책임을 부담하는 어른들이 있다. 누가 내라고 눈치도, 의무도 준 적이 없는데 그들은'내가 낼께'하며 쿨 하게 이야길 하고 결제한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 같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정말로 쿨할까? 정말 쿨하다면 박수를 쳐주고 싶다.



나의 내가 낼께는,

밥 값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커피값을 계산하거나, 간식류를 사 온다거나 나름대로 나만의 방법으로 생색을 내지 않는 선에서 산 것들이 많다. 무언가를 바라고 계산하고 구매한 것들은 아니다. 그냥 내 마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카드가 튀어나갔고 그걸로 그 시간들이 모두에게 만족되고 맛있게 먹었다면 그거야 말로 행복이 된다! 지금까지 책임을 진 사람들 또한 그런 마음이겠나?

내가 그렇기에, 난 불필요한 얻어먹음을 불편해한다.

굳이 내겠다는데도 '감사'하며 받아먹기보다 그 사람의 상황을 고려하며 '넣어둬!! 넣어둬!!' 하며 N분의 일을 자초한 적이 더 많다. '왜 스스로가 비용을 다 떠안으려고 해? 1차 2차 다 나눠 냈는데 이제 와서 홀로 다 내려고 하는 의도는 뭐야? 그럴 거면 1차 2차도 다 낸다고 하지? 쪼잔하게-'하며 꾸짖은 적도 있다.

다들 직업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다. 좋은 마음에서 '내가 낼께'라기보다 '연장자는 그래도 한 번은 내야지.'라는 어른 입장의 마음이 엿본 적이 참 많다.

난 그런 연장자의 위치가 너무 부담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 위치는 나의 위치가 되기도 하고, 지금의 나는 저러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될 까 봐 짜증 나기도 한다.



이런 계산적인 나를 보고 정답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난 옹졸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솔직하게 내가 연장자라도 난 그러고 싶지 않다. 앞서 말했듯, 내가 충분하게 누구에게 바라지 않는 선에서 함께 즐기고 싶지 눈치를 보며 '낼까 말까'고민하는 자리에서의 결제는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눈치로 강요로 내는 것도 난 싫다. 그렇게 책임이 서로에게 가중되면 그 모임은 부담만 더 커질 뿐이다. 난 그런 것들에 대한 경계를 잊지 않는다. 사실적으로 놀고 나선 영수증이 남는다. 돈 없는 모임은 유지 자체가 어렵다. 순수하게 어떤 목적에 따른 모임의 목적은 목적대로 이루어지겠지만, 결국 유흥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모임의 막내의 생일이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자며 어디로 갈지 이야기를 하다가 최근에 내가 먹은 음식 중에 진짜 맛집 있다며 대구 뽈찜 다들 좋아하냐며 그거 먹으러 가자고 했다. 가격은 비쌌지만 나눠 낸다면 나쁘지 않을 비용이라고 여겼다. 다들 오케이 했다.

생일날이 되었다. 작은 가게에 우리 인원이 모여서 밥을 먹는데 그 날 과하게 배부르게 먹었다. 찜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고 약간의 오버해서 메뉴의 양을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다 먹고 비용 계산을 하려고 할 때쯤 막내가 '언니 오빠들 지금껏 얻어먹은 것도 있으니깐 내가 낼께'라며 일어섰다. 우리는 처음에 진짜 그러지 말라며 막내를 말렸는데 '엄마 아빠한테 돈 받았어! 걱정 마!' 하며 계산대로 향한 막내를 결국 '입'으로만 말렸다.

근데 그 날 음식값이 과하게 비싸게 나와서 동생은 표현은 안 했지만, 헉! 했으리라 생각이 되었다. 결국 음식점을 추천한 내가 욕을 엄청 얻어먹었다. 

그렇게 한번 얻어먹고 나니 그 이후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들이 수월해지고 가벼워졌다. 한참이나 어린 동생이 기특한 생각으로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다고 생각되었다.

그 상황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 졌다. 





알고 지낸 지 꾀 오래된 (남) 동생이 있다. 인간적으로 바르고 착한 친구라고 여겼다. 모임의 회장인 나에게 도움을 많이 준 친구였다. 모임의 임원 겸 같은 또래로써 우리는 우리 나이 때의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고 놀러 다녔다. 나는 사정으로 그 동아리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연락이 닿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이 남자 동생은 간간히 연락하며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운동도 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마냥 동생이기에 밥도 한 끼 하고, 운동도 하고, 심심할 때 영화도 보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 나만 유흥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처음엔 더치페이였다.)

웃기게도 그것을 안 순간은 비용을 지불할 때가 아니라, 스리슬쩍 그 비용에 대해서 언급하지도 않고 당연하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는 '에이 취업준비 생활 테 너무 과한 비용이야.' 하며 그를 옹호했는데 일명 괘씸죄라고 하던가. '취업준비생이면! 돈이 없으면! 만나지 말아야지. 왜 지가 먼저 만나자고 하고 결제는 내 카드야?'라며 속으로 반박했다. 스스로가 쪼잔해진다.라고 생각까지 들 정도로 화가 났다. 

나의 쪼잔함은 단순하게 계산을 안 해서가 아니었다. 말이라도 '누나 고마워.' '누나 다음에 취업해서 한턱 쏠게!'라는 그 한마디들의 결여되는 것에 의해 '내가 진정한 호구다'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불편해졌다. 만나는 상황을 불편해 하기 시작하는 나였다.

간간히 연락은 했지만, 일부러 만남은 피했다. 그 애랑 만나면 속에서 영수증을 스스로 만들며 비용 계산을 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누나 얼마 나왔어? 나눠내자.' '다음엔 내가 낼께'하며 이야길 해준 적이라도 있으면 그렇게 화가 나진 않을 텐데 그런 말이 전혀 없이 늘 정확한 답변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돈을 내는 상황이면 멀뚱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거나, 나도 자존심 상하지 않게 '각자 결제하고 만나'라고 했어도 어느 순간 핑계를 대며 내가 결제하고 있었다. 그 애를 보며 상대방을 만날 때 인색한 지갑보다 인색한 표현은 더 치명적이라는 걸 알게 되기도 했다.


소방공무원이 꿈이었던 그 애는 소방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기 전 연락이 왔다. 만나자며. 밥 한 끼 사달라며. 그간 영수증처럼 계산을 해대고 있던 내 마음이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의미로 밥 한 끼 정도는 사줄 수 있지 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젠 정말 안녕이다. 하며 그간의 정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나는 나갔다.

어차피 내가 낼 돈인데 메뉴는 '팥빙수'였다.

중간에 못 만날 상황들이 있었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리하게 만나서 팥빙수를 먹었다.

대학교 근처에서 자리를 잡고 먹었는데 방학이어서 카페는 한산했다.


그쯤 나는 사주나 관상에서 말하는 나의 모습에 재미가 들렸었는데 그 애가 유료로 다운로드한 사주 어플에 나의 생년월일을 입력하고 봐주었다. 나도 그 애의 사주를 봤다. 그리고 서로 바꿔서 어느 부분이 맞는지 확인해 보자고 했다. 사주를 100프로 믿는 건 아닌데 그 애의 사주의 의지력이 굉장히 낮았다. 반면 나의 의지력은 80프로를 넘을 만큼 넘쳤다. 

 나는 정말 사주를 믿고 싶지 않은데 그 안에 들어져 있는 단어들과 그 사람을 보면 어느 정도 맞나 보다 싶을 때가 있었다. 그 애의 사주에 보니 '인색하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부분을 읽는데 언젠가 그 애한테 그렇게 살지 마.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는데 사주를 통해서 '맞아 너 인색해'라고 나는 단호박처럼 말했다.


오예!


'뭐? 내가?'라며 전혀 몰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노골적으로 해줄 수 없는 말을 그날 그 어플로 이야길 전달받아하니 여간 속이 시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 애는 약간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날 알게 되었다. 그 애는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았고 그렇기에 스스로를 모른 채 그렇게 살고 있었단 것을.


그래, 나쁜 애는 아니었어. 모르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이러면서 맞춰가고 이러면서 알아가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면서 일정한 수입이 나에게 주는 안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월급이 없었을 때는 나 또한 '사주세요!'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건 '감사합니다'라는 말이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남의 노력을 취할 때가 있다. 구구절절 더치페이를 외치는 나도 어렸을 적 많은 혜택을 받으며 자라왔다. 나이가 어리고 돈을 버는 입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지만 꼭 감사합니다는 했다. 학식에서 밥을 먹을 때도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꼬박하고. 사실 나는 감사합니다도 쉽게 내뱉지만, 미안합니다 도 쉽게 내뱉는데. (요건 쉽게 내뱉으면 안 되는 말이란 건 시간이 흘러서 알게 되었다)

어쨌든 우리는 내가 몰랐던 감정과 생각들을 시간이 흐르면서 느끼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이거까지 말하면 스스로가 치졸할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쿨한 마음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도 마주한다.

하지만 나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함께 사는 삶이기 때문에 배려하고 존중해줘야 함을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눈치는 챙기자는 말이다.(뜨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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