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fter lunch Dec 07. 2019

진짜 내 모습이 가짜 내 모습과 닮아가는 노력

건설인의 인문학적 성찰 에세이

 



...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를 인내하는 것보다,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이 차원이 높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며, 그것만이 세상을 이겨나가는 비결...


에픽테토스(Epiktetos, 50?~138?)라는 철학자는 "인간의 삶이란 연극에 불과하며, 신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가 연기해야 할 배역들을 모두 정해 놓았다"라고 했다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 중에서) 


그 오랜 옛날에도 자신의 감정대로 살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말할 것도 없다. 아이가 초등학생만 되어도 타자의 생각을 자신의 감정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거짓말의 형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철든 효자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한 번은 우리 애가 중이염으로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의사로부터 눈치 없고 잔혹한 부모라는 눈치를 받았다.  귀를 보더니 이 정도 염증이면 애가 가만히 있지 않고, 엄청 아프다고 했을 텐데, 그 걸 참고 지금껏 병원에 안 오고 뭐했냐는 무언의 눈빛을 읽었다. 병원 가기 전 애엄마가 나의 발령 소식(해외현장)에 정신이 없었고, 교회 일과 아이 가르치는 일들이 정리도 안돼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었다. 10살만 되어도 그 정도는 감지했는지, 아픈 엄마에게 귀 아프다는 얘기를 웬만하면 하기 싫어했다고 한다. 나중에 엄마 몰래 아빠한테만 한 얘기지만… 

 애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남과 동시에 왜 벌써 저 나이에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타인(또는 권력자)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했을까? 한참 생각하다 “너의 감정에 솔직하는 것이 더 큰 고통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이다”라고 얘기해줬고, 그걸 또 이해하는 아이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했던 기억이 난다.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철든 효녀의 사례는 사실 몇 안되고, 거짓말의 사례가 더 많지만 딸아이의 원망을 받을까 두려워 참기로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의 삶은 (좀 심하게 말하자면) 모든 일상이 연극이다. 

죽도록 싫어하는 출근을 하면서 ‘좋은 아침!~~’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도 천직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처럼 가열하게 일하고, 

원수보다 싫은 사람과의 술자리에서도 미래를 위해 둘도 없는 술친구가 되기도 한다. 

집안에 우환이 있어도 드러내 보일 수 없고, 

너무 즐거워도 티 낼 수 없는 게 사회생활 아닌가? 그래야 승진 빨리하고 안 잘린다. 하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이 자신이 아니고, 자기감정과 반대되는 표정, 말, 행동을 하는 것은... 그 반대보다 백배쯤은 더 답답한 짓이다. 

화재의 연구, "상사에게 아부하는 직원, 근무태만 심하다"(오리건주립대, 19.04.03 아시아경제 발췌)

 한때, 상대방의 부당함을 바꿀 수는 없어도, 지적하는 정도, 그것도 안되면 언급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었다. 누군가가 모든 사람을 힘들게 하거나, 나를 미칠 정도로 괴롭히는 사람이란 결론에 도달하면(쉽게 결론나진 않는다), 난 도리를 지켰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소장님 한 분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힘들어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누군가가 말하지 않던가요? 혹시, 소장님이 무서워서 아무도 그 말을 못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씀드립니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욕하는 일이라도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또는 나이가 같은 2년 선임이 계속해서 내 주장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욕설로 나를 뭉개는 날이면 “ 그만해라… 내가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에이 xx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술 먹었으면 그냥 가서 자라!” 뭐 이런 식이었다. 정말 그랬었다. 글을 적으면서도 그때의 황당함에 손가락이 오그라든다. 


 아무튼 사회 초년생일 때의 나는 인문학적 사고의 극치였다. 더불어 우리 현장의 수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후회하진 않는다. 그때의 내가 부럽고, 놀라울 뿐이다. 당시의 내 사고는 인문학적이긴 했으나, 좀 저차원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마추어 같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런 직설적인 삶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8년 정도는 그런 이미지가 따라다녔던 것 같다. 1~2년 간에 저지른 인문학적이지만 저차원적이었던 언행이 대부분의 사람들(심지어 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까지)로 하여금 '나'라는 놈이 '그런(막 돼먹은) 놈'이구나라고 믿게 만들었다. 소문은 그런 것이다. 


 물론, 바꾸려고 해 봤다. 다시 말해, 내 감정과 정의감에는 맞지 않더라도 꾹 참고 살아봤다. 결론적으로, 잘 안되었다. 내 마음을 가면으로 아무리 감추어도 드러나더란 말이다. 특히, 극한 상황이면 더하다. 위기(즉, 나의 정의감과 맞지 않더라도 참아야 하는 의지와 참지 않는 것이 정의로움이다라는 이성이 만나 싸우게 되는 위기)가 오면, 그동안 참아왔던 것이 모두 정의롭지 못한 것이었다는 쪽으로 생각이 증폭되어 막장 중에 막장이 되어버린다.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극 중 천송이(전지현 분)가 한 대사가 있다. “내가 바닥을 쳐보니까 딱 한 가지 좋은 게 있더라… 내 편과 내 편인 척하는 것들을 걸러내더란 말이다…”


 그렇게 막장을 쳐보니 나에게도 한 가지 좋은 것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잘하는 것이 그냥 잘 참는 것을 넘어, 나의 근본(원래 모습)이 바뀌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나 됨이 내가 가지고 싶어 했던 그 가면이 될 수 있다면, 적어도 그 가면을 닮아간다면, 참는 것이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참는 것이 아니라, 참는 내가 나다운 상황을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내가 아직 철학적인 정의에 서툴러 말이 어렵게 표현된 것 같다.


 사람의 완전한 모습을 10이라고 하자. 2밖에 안 되는 내가 억지로 10인 것처럼 사는 게 아니라 내가 10으로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억지로… 처럼”라는 구절만 제거한 것이다. 

그게 그거다 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억지로라도 누구처럼 사는 거랑 내가 누구가 되는 거랑은 하늘과 땅 차이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억지로 누구처럼 살면 절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억지로 누구처럼 살아왔던 반대급부로 더 안 좋은 사람이 된다. 


 주위를 보면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직책을 맡겨줬더니 억지로 사는 사람들 말이다. 가식적인 웃음과 억지 선행이 그를 바꿀 수 있겠는가? 절대 안 된다... 고 본다. 내가 천송이처럼 바닥을 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일이다. 자신이 바뀌어서 억지가 되지 않을 때 사람은 서서히 변한다. 처음 바닥을 친 이후, 몇 번 더 바닥을 쳐봤다. 그러면서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정도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인터스텔라를 보았는가? 3차원에 사는 사람은 5차원의 세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이후로 나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좋아졌다. 10은 안되어도 내 생각에 5 이상이 되기까지 4년 정도 걸린 것 같다.

환골탈태(스마트키워드 이미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관계 속에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를 인내하는 것보다,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이 차원이 높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며, 그것만이 세상을 이겨나가는 비결이라는 것을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꿈 찾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