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스케치
매년 연말이면 우리 사회의 궤적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는 상징적인 기록이 발표된다.
《교수신문》이 2001년부터 전국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해 선정해 온 ‘올해의 사자성어’다.
한 해의 굴곡을 되짚어보는 이 지표는 지식인들의 시선으로 포착한 우리 시대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올해 대학교수 766명 중 33.9%의 선택을 받아 1위에 오른 단어는 ‘변동불거(變動不居)’였다.
세상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다.
이 단어를 추천한 양일모 교수는 12·3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 소추 등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의 혼란 속에서도, 케이컬처의 위력을 재확인했던 한 해의 양면성을 짚었다.
2위는 ‘하늘의 뜻은 일정하지 않다’는 ‘천명미상(天命靡常)’이,
3위는 사실 검증보다 감정적 쏠림에 치중하는 세태를 꼬집은 ‘추지약무(趨之若鶩)’가 차지했다.
뒤이어 겉과 속이 다른 ‘구밀복검(口蜜腹劍)’과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강약약강(强弱弱强)’이 이름을 올리며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지난 25년간의 기록을 갈무리해 보니 우리 사회를 정의한 언어들은 대개 서늘하고 비관적이었다.
월드컵 4강의 환희가 가득했고, 개인적으로는 입사의 기쁨과 소중한 인연을 만났던 축복 같던 2002년조차 공식적인 기록은 ‘이합집산(離合集散)’이라는 건조한 단어에 머물렀다.
국민들이 한 해를 돌아볼 때 기쁨보다 답답함과 우울함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가운 기록이 삶의 모든 온기를 대변할 수는 없다.
2002년의 내가 그러했듯, 사회의 언어와 개인의 일상은 때로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며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제각기 다른 삶의 풍경 속에서도, 우리 모두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공평함이 있다.
바로 누구에게나 똑같이 허락되는 ‘시간의 주어짐’이다.
불공정과 불평등이 만연한 세상이라지만, 2026년이라는 시간만큼은 매달 입금되는 이자나 배당금처럼 우리에게 따박따박 찾아올 것이다.
운이 좋다면 우리 모두 온전한 일 년의 나날을 공평하게 부여받을 것이다.
이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선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형벌로 다가갈 것이다.
어쩌면 우리 대다수에게는 그저 또 한 번 견뎌내야 할 고단하고 부정적인 일 년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현실은 늘 예상대로 씁쓸하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어본다.
내년 이맘때만큼은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사자성어가 처음으로 환하고 따뜻한 빛을 띠기를. 우리의 고단한 예감이 기분 좋게 빗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참고로, 올해의 사자성어 발표를 시작한 2001년부터 2025년까지의 년도별 사자성어를 적어보았다.
2001 오리무중(五里霧中) 짙은 안개 속처럼 앞길을 알 수 없음
2002 이합집산(離合集散) 헤어졌다 모이고 다시 흩어짐
2003 우왕좌왕(右往左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함
2004 당동벌이(黨同伐異) 무리끼리 편들어 다른 쪽을 무조건 배척함
2005 상화하택(上火下澤) 위아래가 서로 등지고 분열함
2006 밀운불우(密雲不雨) 여건은 조성되었으나 성사되지 않아 답답함
2007 자기기인(自欺欺人) 자신을 속이고 남까지 속임
2008 호질기의(護疾忌醫) 병을 숨기고 의사의 충고를 듣지 않음
2009 방기곡경(旁岐曲逕) 바른 길을 두고 그릇된 수단(샛길)을 씀
2010 장두노미(藏頭露尾) 진실을 숨기려 해도 꼬리가 이미 드러남
2011 엄이도종(掩耳盜鐘) 잘못을 하고도 남의 비난이 싫어 귀를 막음
2012 거세개탁(擧世皆濁) 온 세상이 흐려 홀로 깨어 있기 힘듦
2013 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잘못된 길을 고집함
2014 지록위마(指鹿爲馬) 윗사람을 농락하여 모순된 것을 우김
2015 혼용무도(昏庸無道) 어리석은 군주로 인해 나라가 암흑 같음
2016 군주민수(君舟民水) 백성이 화가 나면 임금(배)을 뒤집을 수 있음
2017 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함을 깨고 바른 도리를 드러냄
2018 임중도원(任重道遠) 책임은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음
2019 공명지조(共命之鳥) 상대가 죽으면 결국 함께 죽는 운명공동체
2020 아시타비(我是他非)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내로남불의 세태
2021 묘서동처(猫鼠同處) 고양이와 쥐(관리와 도둑)가 한패가 됨
2022 과이불개(過而不改)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음
2023 견리망의(見利忘義) 이로움 앞에서 의로움을 잊고 이익만 쫓음
2024 도량발호(跳梁跋扈) 권력자들이 제멋대로 날뛰며 위세를 부림
2025 변동불거(變動不居) 멈추지 않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 불확실한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