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RYU 호류 May 14. 2021

나의 로망 오보에와의 특별한 인연

오보에 소리에 홀려 오케스트라 무대에 오르기까지

나의 가치관 형성에 큰 역할을 했던 애니메이션으로 <대운동회 OVA>를 소개한 적이 있다. (나를 만든 재료, 애니메이션 '대운동회') 이 작품의 OST를 통해 음악적 세계관도 많은 영향을 얻었다. 1화의 프롤로그 장면에서 어떤 배경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이 곡의 처음 8마디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색소폰처럼 또렷하고 까랑까랑하면서, 프렌치 호른처럼 소리가 풍성하고 몽글몽글했다. '오보에'라는 목관악기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bfeLgxkx4Tk&t=93s

♪ 01:34 「기대와 희망의 대학 위성」
04:05 「아카리의 테마 ver.1」
 06:33 두 트랙을 합쳐 재구성한 「Prologue #3」


<대운동회>를 처음 접한 게 2000년도쯤이었으니, 나는 오보에 연주곡 중 가장 널리 알려졌다고 하는 <Gabriel’s Oboe>보다, 오히려 애니메이션 OST 곡을 먼저 듣고 오보에의 매력에 빠진 셈이다. 예배 때 오보에 실제 연주도 몇 번 듣게 되었고, 그동안 교회에서 많은 악기를 익혀왔듯 저 오보에라는 악기도 언젠가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보에 소리가 들리면 한 번씩 멈춰서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선명하고 맑고 투명하고 똘망똘망한 음색’이 정말 마음에 든다. 보컬리스트로 치면, 소녀시대의 태연, 포레스텔라의 레제로 테너 조민규, 멜로망스의 김민석의 목소리 같다. 또 한편으로는, 연두색 초원을 연상시키는 온유한 소리에, 들을 때마다 마음이 평안해진다. 목가적인 분위기를 통해, 여유롭고 치유가 되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 나에게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악기라고 하면 곧바로 오보에를 꼽는다.




처음 사용했던 오보에


음색이 맑고 또렷하다는 특성 때문에, 오케스트라 편성의 작·편곡을 할 때부터 주선율 악기는 거의 늘 오보에로 해왔다. 실제로 이렇게, 다른 악기에 묻히지 않고 소리가 도드라지는 특성으로 인해, 오케스트라에서 오보에가 A음을 불어주면 다른 악기들이 이 소리를 기준으로 하여 조율한다. 신라시대 사극을 보며 떠올라 만들었던 <Kingdom~천년왕국신라~>를 언젠가 오케스트라로 연주하고 주선율인 오보에는 내가 직접 연주하겠다는 상상도 자주 했다. 그 외에도, 그리스 산토리니의 하얗고 파란 집들과 언덕과 바다를 표현한 <Santorini>, 신비하고 경건한 교회 성가를 생각하며 쓴 <Amen>, 삼국 통일을 이뤄낸 드라마의 웅장한 결말을 묘사한 <삼한일통(Unification)> 등의 곡들은 멜로디 악기로 모두 오보에를 사용해서 만들었다.


이런 곡들을 만들면서, 오보에를 직접 연주하고 싶다는 소망이 커졌다. 물론 편곡법이나 스코어링, 오케스트레이션 수업을 들으면서 오보에의 음역대 등 기본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배웠다. 하지만, 내가 쓰는 멜로디가 실제로 연주 가능한 것이 맞는가, 오보에 악보라 하기엔 말도 안 되는 부분은 없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다. (배우고 나서 알았는데, <Amen>과 <삼한일통>은 오늘날의 오보에의 음역대를 벗어난 부분이 있다. 멜로디를 바꾸든지, 악기를 다른 종류로 교체해야겠다. 역시, 아는 것이 힘이라니까!) 다른 악기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오보에 파트의 경우는, 이 악기를 연주하는 특성에 대해 좀 더 잘 알고서 만들고 싶었다. 다만, 악기도 비싸고 가르치는 음악원도 거의 없고 사사할 선생님도 잘 찾기 어려운 것 같아 그저 언젠가 배워야지 하던 꿈의 악기였다.


그러다가, 이 악기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주변에 있는 오케스트라 동아리에서 오보에 전공 선생님을 영입했다는 얘기를 듣고, 주저 없이 연락했다. 며칠 후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오보에는 입문자용 모델도 좀 비싼 편이라 일단은 단기 대여를 했다. 그리고 악기 맨 위에 꽂아 바람을 불어넣어 소리 내는 리드(Reed)를 맞추었다. 이로써 드디어 이 꿈의 악기를 배우게 된 것이다. 입모양을 익혀 처음으로 리드를 불어보고, 오보에 배울 때 가장 처음 익히는 음인 B4와 C5를 집고 소리 내어 보았다. 대운동회 OST에서 들었던 것처럼 황홀한 질감의 소리는 아니지만, 그동안 로망으로 삼고 있던 악기를 손에 쥐어 직접 소리 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몇 주 후, 괜찮은 중고 악기 매물이 나왔다고 연락을 받아, 처음으로 직접 거금의 악기 중고 거래를 했다. 드디어 내 오보에가 생겼다.

나의 첫 리드!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 중 프렌치 호른 다음으로 연주하기 어려운 악기가 오보에라고 들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소리 내는 것 자체로 말하면, 결코 어렵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과는 달리, 소리 내는 게 다른 악기보다 어렵지는 않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취미 악기 워크숍을 운영하며 참가자들을 지켜본 결과, 학교 음악시간에 단소를 불어본 사람이면(나는 단소를 못 불어봤지만...) 리드를 불었을 때 소리가 바로 났다. 오보에 음 중 운지가 가장 쉬운 B4와 C5도 금방 소리 낸다.

하지만 저음으로 내려갈수록, 정신줄을 잠깐 놓으면 소리가 쉽게 뒤집어진다. 고음이라고 쉬워지는 것도 아니다. 내 경험 상, 딱 F4~C5 정도까지만 편하게 소리가 나고 그 아래위로는 호흡의 위치가 많은 영향을 끼친다. 평소에 목소리나 휘파람으로 어떤 음을 낼 때, 잘 살펴보면 음 높이마다 숨의 위치도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보에로 소리 내는 음도 이렇게 노래하듯이, 숨이 나오는 높낮이를 찾아서 호흡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한다. 악기의 자판도 정확히 짚어야 하는데, 호흡은 그보다 더 잘 내야 하는 것이다.


기초 단계를 벗어나면 어느 정도 셈여림 조절을 해야 하는데, 이게 금방 되지 않는다. 나에겐 지금까지도 셈여림 조절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음을 유지하다가 페이드 아웃(Fade-out)으로 잘 빼주면 소리가 더 세련되게 들릴 텐데, 소리를 점점 약하게 내려고 힘을 풀면 음높이가 떨어진다. (오보에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른 목관악기도 불어보니 같은 현상이 있었다) 작게 내려면 숨은 더 빠르게 불어넣으면서 서서히 소리를 빼야 한다는데, 오히려 온몸에 엄청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처음 배울 때 생각보다 금방 리드를 불고 웬만한 음도 다 낼 수 있게 된 게 신기해서, 연주하기 엄청 어려운 악기라는 것에 대한 걱정은 바로 사라졌다.


오보에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마침 공연에서 선생님이 <Gabriel’s Oboe> 연주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이 곡을 라이브로 직접 듣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굉장히 감명받았고, 악기 수련에 대한 동기부여가 많이 되었다. 어서 이 곡을 나도 연주하고 싶어서, 틈 나는 대로 오보에를 꺼내어 열심히 연습했다. 곡에 나오는 음의 운지를 다 익히자마자, 선생님께 요청해서 이 곡의 연주도 드디어 배우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이 곡을 감상만 해 봤는데, 이제는 내가 직접 오보에로 연주도 할 수 있게 되다니 감개무량했다.

사실 이 곡의 음역은 최저음부터 최고음이 단 1옥타브 정도에 불과하다. 고음의 호흡 위치만 잘 도약하면, 오보에 시작한 지 한두 달 만에라도 소리는 낼 수 있다. 하지만 표현의 난이도가 높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보에는 셈여림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다. 길게 끌고 가는 음이 많아 다이내믹한 표현이 요구되는 이 곡은 ‘아름답게’ 연주하는 게 어렵다.




https://www.youtube.com/watch?v=sWnkVpEo3CQ

신라 배경의 사극을 보다가 떠오른 악상으로 관현악곡을 작곡했다. 이 곡의 주선율 악기도 역시 오보에를 썼다.


1년 후, 오케스트라 공연 준비 시기가 다가왔다. 무대에 올릴 곡을 선정할 때, 내가 오래전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작곡한 <Kingdom~천년왕국신라~>를 조심스럽게 제시해 보았다. 디렉터 선생님이 음원을 들어보시고는 한 번 올려보자고 하셨다. 최초에 2분이 채 되지 않았던 이 곡을 가지고 2절까지 만든 어쿠스틱 버전을 다시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가져오면서, 최초 버전에 없었던 클라리넷 파트까지 추가했다. 풀 버전의 음원을 완성하여 선생님과 단원들에게 드디어 공개하고 뜻밖의 좋은 반응을 많이 얻었다. 디렉터 선생님에게 파트보를 요청받아, 사보 프로그램인 '시벨리우스(Sibelius)'를 처음 써보며 악보도 완성했다. 미디 파일에서 반영된 악보가 있긴 했는데, 아무래도 가독성이라든가 내가 원하는 음표와 쉼표 길이, 다이내믹 표시는 좀 부족해서 정식으로 파트보를 다시 만들었다.

악보를 처음 전달하고 모든 파트가 그 자리에서 초견으로 연주해보는 날이 왔다. 디렉터 선생님이 단원들에게 오케스트라 연주로는 '세계 초연'인 곡이라며 관심을 끌어모으셨다. 나의 오보에를 포함한 모든 파트의 소리가 합쳐져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내가 의도했던 소리들이 실제로 나는 것이 신기했다. 그동안 컴퓨터에서 MIDI로만 구현하며 들었던 소리를, 리얼 악기의 라이브 소리로 듣는 날이 오다니 뭉클하기까지 했다. '세계 초연'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날 정도로 얼떨떨했다.


오보에를 좋아해서 오보에를 메인 선율로 만든 곡이라서 그런가, 리허설 날 몇몇 단원들과 선생님의 깜짝 제안으로 협주자의 협연자처럼 맨 앞에 나와 연주하게 되었다. 많은 연주자들의 소리 속에서 아직 멋지지 않고 거칠게만 들리는 내 소리가 혹시 너무 튀어서 곡의 몰입과 전달에 방해가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공연 당일까지도 한가득이었다. 게다가 공연 2주 전에는 지판 한 곳의 핀이 풀리고, 전날에는 나사 한 곳이 풀리고, 연주 직전에는 리드를 조절하다가 바스락 갈라지는 소리가 나서, '큰일 났다...'싶기도 했다. 정말 예상 못한 별의별 돌발 상황이 가득했다. 다행스럽게도, 실전에서는 많은 군중들과 웅장한 연주 소리 속에 내 연주는 무난하게 묻어갔다. 어디서나 늘 내가 돋보이기를 바라는데, 이런 상황에선 이런 방법으로 내 걱정이 해소되는 게 흥미롭기도 하다. 이런 에피소드도 나름 추억이 되었다.

오케스트라 편성의 곡을 짓고, 악보를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클래식 전공자들에게, 악기의 음역이나 주법을 고려하지 않고 작곡했다거나, 악보를 제대로 못 만들었다는 평을 듣는 게 싫어서 엄청 신경 많이 썼다. 정말 감사하게도, 선생님들이 '클래식 전공자가 만든 것처럼 완벽한 악보이고, 화성도 잘 어울리는 훌륭한 곡이고, 입으로 흥얼거리게 될 정도로 애착이 생겼다'라고 내내 말씀들을 해 주셔서 굉장히 뿌듯했다.


로망이었던 꿈의 악기를 배우고, 언젠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게 되기를 고대했던 나의 곡을, 나의 오보에 스승님과 나란히 앞에 서서 사람들과 함께 세계 초연하는 영광을 얻었다. 꿈만 같은 일이다. 나의 곡을 무대에 올린 대범함과, 로망을 실현하기까지의 모든 흐름과 인도에 감사함을 가득 느낀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르바이트 첫 월급의 짜릿함은, 쓰는데서 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