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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RYU 호류 Feb 23. 2021

푸른 겨울, 짜릿한 '나 홀로 여행'의 서막

10년 전엔, 종이 지도와 책자만 들고 아날로그 여행을 했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처음 혼자 여행한 곳은 핀란드 수도 헬싱키이다. 오리엔테이션 이전에 핀란드에 들어가는 비행 편 중 가장 저렴하면서 적당한 날짜로 표를 구하게 되었다. 덕분에 며칠의 여유가 생겨서 그동안 헬싱키를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11시간 비행 후 헬싱키 반타 공항에 도착했고, 버스를 타러 드디어 바깥세상으로 나갔다. 처음으로 와본 서양 국가라 그런지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위도가 높은 나라라서 밖은 역시 이미 저녁이 다 되었다. 생각보다 춥진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정보를 찾아보고 조사하던 핀란드에 드디어 도착했다는 설렘이 더 컸다. 이 당시만 해도 북유럽은 한국인들에게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들이 잘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먼저 발을 들였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전혀 모르는 외국어(핀란드어와 스웨덴어가 공용어)가 들려오는 것이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이 새로운 언어를 곧 배우게 된다는 것이 기대되었다.


(BGM) Idina Menzel, AURORA <Into the Unknown>

https://www.youtube.com/watch?v=gIOyB9ZXn8s

(미지의 세계에 가보고 나서 10여 년 뒤에 딱 이런 제목의 노래가 나오다니. 처음 듣자마자 무척 반가웠다!)



숙소에 도착해서, 무겁고 큰 캐리어와 짐을 가득 들고 계단을 이제 올라가려는데 마침 어떤 서양 청년이 나를 발견하고 먼저 와서 도움을 줬다. 시작부터 이렇게 호의를 받다니 정말 감사했다.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라고 하는 형태의 숙소에도 처음 와보는 것 같다. 전 세계에서 온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방을 쓰면서, 이것도 인연이라고 인사하고 소개하고 한마디라도 섞는 즐거움이 궁금하긴 하다. (다음날, 같은 방에 있던 러시아인과 인사했다. 얘기 나누다 보니 시간이 흘러 수오멘린나고 뭐고 그냥 쿨하게 접고 나중에 가는 걸로! - 이후로도, 헬싱키는 한 해 동안 공교롭게도 두 번을 더 오게 되었다.)


밤샘과 처음 장거리 비행으로 엄청 피곤할 만도 하지만, 저녁의 거리 구경이라도 하려고 곧 밖으로 나가봤다. (다음날은 최종 기상 시각이 오전 11시 반이나 되었지만.) TV에서만 보던 유럽 특유 스타일의 낮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걸 직접 보니까 무척 반갑다. 겨울의 나라답게, 영상이나 사진이나 글로 보고 듣던 대로, 모든 거리가 온통 눈밭이었다. 한국과는 다른 기후의 세상에 와서 생소한데 재밌다. 내가 기대한 대로, 조용하고 깨끗하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곳이다.



길 가다 발견한 레스토랑 중 하나. 'Ravintola Zetor'


책장이 닳아지도록 보던 핀란드 관광청의 여행 책자를 들고 다니며, 책에서 본 유명 장소들을 찾아가 봤다. 연말연시 연휴라 시내가 평소보다도 더 고요한 편인 것 같다. 마켓 광장 같은 곳도 사진에서 보던 것과 달리 한산하다.


말로만 듣던 트램이란 것을 처음 타봤고, 교통 패스는 어떻게 사용하는 건가 헤매고, 식당에 가면 이렇게 시키고 여기 앉아 기다리는 게 맞나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리 책이 영상으로 보고 듣고 해도, 직접 와서 경험해보며 촉각·미각·후각으로까지 체험하는 게 제일이다.


Esplanadi 거리(아마도) 한복판에서 이걸 보고 자동으로 멈춰서 카메라를 들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밖에서 보고 궁금했던 STOCKMANN 백화점도 가보고, 에스플라나디 광장 근처에서는 북쪽의 옷 가게 HALONEN에 들어갔다. 둘러보면서 마음에 쏙 드는 펑키한 장식의 기모 후드 집업을 발견했다. 여기 오기 직전에, 좋아하는 악기가 있는 상점을 봐서 그런가, 이 스타일이 유독 끌렸다. 39.95유로 하는데, 이 나라는 겨울이 길고 춥다 하니, 유용한 아이템이 될 것 같아서 바로 집어 들었다. 서양이라 그런가 제일 작은 사이즈도 꽤 넉넉하다. 이 옷은 지금까지도, 추울 때가 되면 편하게 잘 입고 다닌다.


헬싱키 대성당, 우스펜스키 사원, 에스플라나디 광장, 수오멘린나행 선착장 앞, 시청, 헬싱키대학교 앞 등등, 짧은 일정이지만 이곳저곳 많이도 갔다. 스마트폰이라는 것도 거의 없던 시절인데, 종이 지도와 길 위의 안내판, 이정표만 보고 어떻게 다 찾아다녔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신기하다. 평소에도, 안 가본 길로 다니는 것을 즐겨해서 그런가, 낯선 땅에 와서 혼자 다니는 것을 어렵게만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헬싱키를 떠나는 날, 기차 시각 때문에 일찍 새벽같이 체크아웃을 했다. 호스텔을 나오면서도, 처음 도착한 날처럼, 누군가가 천사처럼 나타나서 내 짐을 같이 들고 계단을 내려가 주었다.


중앙 기차역에 도착하여 플랫폼을 무사히 확인했다. 처음에 표 사러 왔던 날엔, 기차를 어떻게 타야 되나 몰라서 걱정했는데, 당일 다행히 잘 찾았다. 여기서부터 이제 내가 살게 될 곳으로 향한다.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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