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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서아빠 Jan 10. 2024

연문위키 - 5편. 대항해시대 ①

1. 후추를 얻기 위한 여행

※ 연문위키는 관지식과 해력 주의 읽기 경험 우기 프로젝트의 준말입니다.


<후추를 얻기 위한 경쟁, 대항해 시대를 열다>


다양한 향신료

농경 시대 이후 가축을 기르며 먹고살만해졌지만, 항상 고기의 가공과 보관이 문제였습니다. 고기는 쉽게 부패하여 좋지 않은 냄새를 내기 때문에 이 냄새를 없애는 방법이 중요했죠. 그래서 음식에 풍미를 주거나, 맵고 향기로운 맛을 더해 주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용도의 조미료가 매우 중요했는데 이를 향신료(香辛料, spice)라고 부릅니다. 향신료는 한반도에 고려시대부터 도입되었고, 조선시대에도 매우 귀중한 향신료로 취급 었어요.

가공(加工(더할(가), 장인(공), processing): 무언가에 행동을 가하여 만들어내는 행위
부패(腐敗(썩을(부), 패할(패), putrefaction)는 미생물에 의하여 물질이 변하여 인간에게 해롭거나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현상
풍미(風味(맛(미), zest) : 음식의 고상한 맛 또는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 됨됨이 / 風靡(바람(풍), 쓰러질(미)) : 어떤 사회적 현상이나 사조 같은 것이 널리 사회에 퍼진다, 주름잡다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함


spice는 라틴어로 약품, 양념의 의미이며 주로 유목민족에서 사용되었는데, 보통 약효가 있고, 소독 기능이 있어 부패방지에도 좋고, 냄새를 좋게 합니다. 대표적인 향신료로는  후추, 고추, 겨자, 생강, 파, 마늘이 있죠. 아직까지도 요리에 꼭 필요한 재료로 엄청나게 오래된 역사를 자랑합니다.


향신료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후추(胡椒, Pepper)는 인도 남부의 말라바르 해안(Malabar Coast)이 원산지인데, 주로 열대지방에서 생산됩니다.  후추는 기원전 4세기 무렵 로마로 전파되어, 이집트, 그리스에서도  의약품의 용도로 널리 쓰였어요. 심지어 이집트 람세스 2세(Ramesses II, 1313 B.C. ~ 1223년 B.C.)의 미라(mirra) 콧구멍 속에서 후추 알갱이가 발견되기도 했다고 하니 이 시기의 사람들이 얼마나 후추를 가치 있게 생각했는지 아시겠죠?


참고로 후추는 한자로 호초(胡椒, 오랑캐(호), 산초나무(초)) 즉, 오랑캐(청, 원나라)에서 온 산초나무를 의미하며 호초의 발음이 변해 현재는 후추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후추가 기원전 4세기 무렵 유럽에 전파될 때, 유럽사람들은 후추를 불로장수정력제라 믿었어요. 정력제의 수요가 항상 높은 건 아주 오래된 전통인가 봐요. 하지만 후추의 산지인 인도와 유럽 사이에 아라비아가 가로막고 있어서 아라비아 상인을 통하여 금이나 은보다도 비싼 값으로 구입하였기 때문에 예전부터 향신료의 가치는 매우 높았어요.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후추 450g의 가격이 토목공사 인부의 2~3주 치 일당과 같았다고 합니다.


불로장수(不老長壽, (아니(불), 늙을(로), 길(장), 수명(수)) : 늙지 아니하고 오래 삶
토목공사(土木工事, civil engineering) : 땅, 산 등에 시행하는 공사. 주로 댐, 다리, 터널을 짓는 일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매운맛 향신료는 모두 pepper였기 때문에 이후 발견된 대부분의 향신료에는 다 pepper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예를 들어 피망 - Bell pepper, 고추 - Red pepper 도 pepper죠. 따라서 pepper라고 해도 후추를 의미하지만 후추를 구분하여 특정해서 말할 때는 Black pepper라고 합니다.


뱅쇼 - 와인에 과일과 계피 등 향신료를 넣고 끓여 만든 음료수

십자군 전쟁(Crusades) 이후 후추를 이용한 중동의 요리법이 서유럽에 전파되면서 후추의 가격은 크게 올랐어요. 이때 동로마 지역에서는 술이나 음료에 후추를 타서 먹는 요리법이 유행이었는데, 프랑스에서도 유행하면서 뱅쇼(VIn chaud)의 원형이 되기도 했죠.


가격이 폭등한 후추는 사치품으로써 부와 지위를 자랑할 수 있는 과시용 음식에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지금도 유럽 레스토랑에서 Salt and Pepper를 테이블 위에 놓아두는 이유도 예전 매우 고가였던 후추와 소금을 비치할 수 있을 정도의 고급 레스토랑이라는 의미에서 시작하였다고 해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를 열 수 있었던 이유>


15세기 중반부터 후추의 가격이 그야말로 폭등하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1453년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인도와 유럽 사이의 중동 지역을 통일한 이후, 유럽 상인의 무역 루트를 막은 데다 독점적으로 수입할 수 있었던 베네치아가 가격을 엄청나게 올렸기 때문이죠. 그래서 직접 후추를 재배할 수 없는 유럽인들은 후추를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지나 직접 인도 해상 무역로를 개척하고자 하였죠. 이후 후추를 얻기 위한 여러 노력들은 대규모 해양탐험을 통해 식민지를 개척하고 이를 국가적으로 활용하는 대항해시대(15세기 ~ 17세기)를 본격화하고 전 세계의 역사를 바꾸게 됩니다. 범선이 탐험의 주요 수단이기 때문에 범선의 시대라고도 하죠.

대항해 시대 이전의 후추 무역로. 오스만제국과 베네치아가 핵심이다.


카나리아 제도

포르투갈(Portuguese Republic)과 스페인(Spain)은 유럽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후추 공급 감소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어요. 베네치아 상인들이 인도산 향신료를 독점하여 후추를 구하기 어렵게 되고, 육상 진출이 어려운 지역적 특성 때문에 해양 산업에 목말랐던 이 들 나라는 국가단위로 해양 산업에 투자하게 됩니다. 이미 포르투갈은 지리적 한계 때문에 일치감치 해양 탐험을 시도했고, 1336년부터  북아프리카의 서쪽 대서양에 있는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 탐험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북아프리카 해안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가면 돌아올 수 있는지 몰랐어요. 세상의 낭떠러지가 있거나 바다괴수가 있다는 미신이 있었을 정도예요. 1420년대부터 포르투갈의 모험 선단이 아프리카 해안을 지속적으로 탐험했으며,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이후 1456년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5세(Nicolaus PP. V)가 포르투갈이 발견한 최남단 지역인 아프리카 북서쪽의 카보 보자도르 곶(Cape Bojador) 너머에서 발견되는 땅과 바다는 모두 포르투갈 것으로 인정하고, 이를 통해 이슬람 세력을 정복하기를 요청했습니다. 지들 맘대로네요.


이후 1488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가 인도 신항로와 전설상의 프레스터 존의 국가를 찾아 동맹을 맺기 위해 떠난 항해에서 태풍으로 포류하다가 우연히 남아프라카 공화국 서남부의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에 희망봉이 중요했던 이유는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 해안의 남동풍이 희망봉에서부터 잦아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희망봉을 돌기만 하면 이후 인도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웠기 때문에 희망봉까지 항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어요.


잦아들다 : 수그러들거나 잠잠해지다


이후 포르투갈의 후원으로 이탈리아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탐험대'를 통해 1498년 희망봉을 지나 인도 항해에 성공하면서 대항해시대의 화려한 서막을 열었죠. 이제 후추를 직접 교역할 수 있게 된 거죠.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 개척 후 가져온 후추는 당시 베네치아 상인에게 지급하는 가격의 20% 수준으로 팔았으며, 이렇게 팔아도 마진(margin, 이윤)이 60배였다고 하니 얼마나 독점 가격이 높았는지 상상이 되시나요? 당시 해상 교역로를 spice route라고 부를 정도로 인도 항로를 찾는 것을 경쟁했고, 이는 유럽 항해술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후 후추 거래의 중심지가 베네치아에서 북해 연안으로 이동하면서 지중해 무역은 쇠락하게 됩니다.





< 최초 발견이라는 이름>


포르투갈의 이웃 나라 스페인은 1492년 이탈리아인 '콜럼버스(Columbus)'를 통해 아프리카 서쪽에서 희망봉을 지나 인도로 향하는 루트가 아닌 (당시에는 몰랐지만 ) 아프리카 서쪽에서 대서양 쪽으로 빠져나가는 반대편 루트를 통해 인도 항해 루트를 찾고자 했어요.  당시에는 유럽대륙 서쪽에 또 다른 대륙이 있는지 몰랐어요.


참고로 콜룸버스는 라틴어 이름이며, 이탈리아 본명은 콜롬보 Colombo, 스페인어로 Colon입니다. 남미의 콜롬비아(Columbia)와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 Colombo 모두 콜럼버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어요.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District of Columbia)과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도 콜럼버스의 이름에서 따왔죠.


유럽에서 보면 현재의 북미가 더 가깝지만 편서풍과 멕시코만류 때문에 북동 방향으로 거센 조류가 형성되어 있어 당시 범선의 기술력으로 이 조류를 뚫고 나아가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아프리카 남쪽으로 내려오다 바람과 해류가 바뀌는 아프리카 모로코 아래의 적도 근처의 무역풍 지대에서 서쪽으로 대서양을 건넜고 이때 남아메리카를 발견하게 됩니다.

조류(潮流(조수(조), 흐를(류), tidal current): 밀물과 썰물에 의해 바닷물의 수위가 변하는 현상을 '조석'이라고 하며, 조류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해수의 흐름을 말합니다. 조수는 밀물과 썰물을 말하죠.  밀물은 만조(滿潮, (가득 찰 (만)), 썰물은 간조(干潮(물 빠질 (간))라고도 부르는데 그리고 이 만조와 간조의 차이를 '조수 간만의 차'라 하고 그냥 짧게 줄여서 조차(潮差(어긋날(차))라고 해요.
대항해 시대의 항로



콜럼버스가 발견한 대륙은 (그 당시 이름이 없었던) 남아메리카 지역이었지만, 이를 인도로 잘 못 알고 있었던 콜럼버스는 이 대륙의 사람들을 인도인 즉 인디언(indian)이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스페인이 기대한 후추는 없었죠. 이후 콜럼버스는 이 미지의 땅이 인도가 아님을 알았지만 새로운 대륙인지는 모르고, 인도 동쪽의 전설의 나라인 '지팡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팡구는 일본국의 중국 발음인 지펀구를 마르코 폴로가 Cipangu라고 적은 것입니다. 이것이 변하여 Japan이 되었어요. 그래서 일본은 중국발음에서 유래된 japan을 좋아하지 않고, NHK(Nippon Hōsō Kyōkai, 일본방송)에서 볼 수 있듯이 닛폰(Nippon) 또는 니혼(Nihon)을 더 좋아해요.


스페인은 1497년 아메리고(Amerigo Vespucci)를 보내 콜럼버스가 발견한 대륙을 다시 탐험하게 했고, 인도가 아님을 알게 되어 이를 발견한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America)'라는 이름을 붙이게 됨.  아메리고의 라틴어 이름인 Americus의 여성형 단어 America에서 명명했어요. 라틴어에서 대체적으로 지명은 여성형을 썼기 때문이죠.



왜 브라질은 포르투칼어를 쓰는지 보여준다.

앞서 말한 것처럼 1456년 교황칙령과 1479년의 알카소바스 조약(Treaty of Alcáçovas)에 의해 카보 보자도르 곶 남단의 발견 안된 땅은 모두 포르투갈의 땅이었습니다.

칙령(勅令(조서(칙), 시킬(령), Royal Decree) : 황제나 교황이 직접 말로 하는 명령


그런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교황이 스페인 태생의 교황으로 바뀌고,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as)을 통해 미발견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결국 대서양의 Cape Verde 섬 서쪽으로 480km 떨어진 지점을 분기점으로 왼쪽은 스페인령이 되게 됩니다. 이 결정 때문에 오늘날의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고 그 외의 남미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고, 지금도 브라질은 포르투칼어를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분기점(分岐點(나눌(분), 갈릴(기)), bifurcation) : 길 따위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곳. 고속도로의 분기점이나 경제 용어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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