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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서아빠 Jan 11. 2024

연문위키 - 6편. 칭기즈 칸

전 세계를 벌벌 떨게 만든, 절대 부를 수 없던 그 이름.

※ 연문위키는 관지식과 해력 주의 읽기 경험 우기 프로젝트의 준말입니다.


무려 800년간 부를 수 없었던 그 이름 - 칭기즈 칸


이번에는 인물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인물이자, 오늘날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세계를 만든 위대한 칸 - 칭기즈칸(Chigiz Khan, 1162 - 1227)에 대한 이야기예요.

칭기즈칸


대부분 칭기즈칸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자, 강력한 유목 기병과 함께한 칸(Kahn)으로 기억하실 텐데요. 맞습니다. 몽골제국은 당시 서쪽 끝으로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서부터 동쪽 끝으로 극동 북극 문화권인 사할린(Sakhalin)까지, 나아가 남쪽 끝으로는 인도네시아의 자바(Java) 섬까지 이를 정도였습니다. 몽골 제국군의 침략을 받지 않은 곳은 구대륙에서 인도의 중남부와 동남아시아 일부, 서유럽, 북유럽 등의 몇몇 국가 정도뿐이죠. 칭기즈칸이 1206년 건립한 몽골제국은 200년 밖에 지속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가 전장에서 이루어 낸 수많은 (그리고 끔찍한) 일들은 전 세계의 근간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 몽골 유목기병 : 몽골의 주력 부대이자 13세기의 세계 최강 부대
몽골은 지리적으로 내륙 초원 지대로 농경보다 축산이 유리했고, 초원을 이동하기 위해 말을 이용하였어요. 초원 지대에서 자란 말들은 일반적인 말보다 더 강하고, 낯선 환경에서도 적응을 잘 했다고 합니다.
또한 몽골은 양질의 철광석이 풍부했는데요, 철 갑옷을 입은 중기병을 적극 양성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몽골제국의 년도별 팽창 이미지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력은 그야말로 대단합니다. 12·14세기의 세계사는 곧 몽골제국의 역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에요.  기본적으로 몽골 제국은 가축을 방목해 젖과 고기, 가죽을 얻는 단순한 유목 경제였기 때문에, 부족한 물자는 무역이나 전쟁을 통해서만 획득해야만 했어요. 칭기즈칸은 상인들을 중시하여 위구르인 등을 핵심 관리로 등용하고 ‘상인은 누구도 공격할 수 없다’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 즈음 실크로드는 매우 안전한 통행길이 되었죠.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몽골 제국의 끝부터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동서양의 교류를 활발하게 할 수 있는 촉진제가 되었고, '은'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의 초석도 이 때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글로벌 교역 덕분에  페르시아의 증류주 제조법이 고려로 전파되어 우리가 즐겨 마시는 소주가 됐고, 유럽에서 위스키가 됐다니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감이 오시나요?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서유럽, 이집트, 인도, 동남아, 일본조차도 정치, 경제, 문화, 기술, 과학, 사상, 종교 등 모든 면에서 몽골제국과 교류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몽골제국의 번영을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라고 합니다. 선거, 공립학교, 우편제도, 대포, 주판 등 우리가 누렸던 많은 문명의 산물은 사실 이렇게 만들어 졌습니다.

※ Pax : 라틴어로 '평화'라는 의미. 영어의 peace 가 pax에서 유래되었어요. 일반적으로 국가나 제국 앞에 붙여 '한 세력이주도하는 장기간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등이 있어요.


14세기부터 본격화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Renaissance)는 몽골제국이 이룩한 세계 규모의 경제교류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이탈리아의 상인들에게 시작되었어요. 또한, 왕권이 종교 지도자보다 더 높았던 몽골 제국에 대한 두려움과 팍스 로마나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을 거에요.

※ 르네상스(Renaissance) : 르네상스라는 말은 원래 ‘재생’을 뜻하며, 구체적으로는 14세기부터 시작된 그리스 및 로마의 고전 문화의 부활 운동을 의미한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칭기즈칸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없었어요. 오히려 신화나 전설의 일부로 취급하였죠. 전 세계를 통일할 뻔한 인류 최강의 황제에 대한 연구가 왜 없었을까요? 왜냐하면 칭기즈칸 사후 800년간 '칭기즈칸'이라는 단어는 전 세계의 금기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에요. 당연히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았죠.




중동의 쇠락


몽골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가장 먼저 피해를 본 곳은 중동의 이슬람 세력입니다.  당시 유럽에 비해 뛰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중동이었지만,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인해 수백 년 간 쌓아온 경제적, 문화적 토대가 한순간에 뿌리 채 뽑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 중동은 이를 복구하는데 수백 년을 낭비해야 했고, 서유럽에 추월당하게 되면서 오늘날 변방 취급을 받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죠.


이슬람 제국의 영토 - 몽골제국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된다.

원래 이슬람 문명의 황금시대에는 세계의 그 어떤 문화권보다도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이었습니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죠. 1258년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의 일부는 이슬람 제국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제국의 수도인 바그다드(Baghdad)는 인구가 12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세계 최대의 도시 중에 하나였어요.


지금의 이라크는 사막화가 진행되어 황량한 풍경이지만, 당시에는 수천 년에 걸쳐 유지되고 관리된 수로와 운하들 덕분에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농업 생산력에 힘입어 상업이 크게 성장했고 화폐 경제와 상업 도시들이 발달했습니다. 이슬람 상인들이 극동아시아까지 진출해 '고려'라는 이름을 Korea로 서방에 알 것도 이 무렵이죠. 이 시기를 이슬람의 르네상스라고도 부를 정도였어요.

※ 황량(荒凉(흉작이 들(황), 서늘한(량)), desolate)한 : 집, 땅, 숲 등이 거칠어져 못 쓰게 되어 쓸쓸한
 황량하다에서 황(荒)은 흉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먹는 감자, 고구마 등을 구황작물이라고도 하죠? 구황(求荒) 작물이란 '흉년 즉 굶주림에서 구해주는' 작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면서 허기를 떼울 수 있는 소중한 작물이라는 말입니다.
※ 운하(運河(운전할(운), 강(하)), canal) : 선박의 통행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물길


도판: 집사 사본의 삽화에 묘사된 몽골 군대의 바그다드 포위

하지만, 칭기즈칸 사후 4대 칸이었던 몽케 칸의 명령으로 바그다드는 1258년 함락되고, 1주일 동안 몽골군들은 대대적인 학살, 약탈, 강간 그리고 파괴를 자행합니다. 몽골제국이 세워진지 50년만에 벌어진 참사였죠. 칭기즈칸이 이렇게 중동 이슬람 제국의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파괴되고, 문화적인 것들은 말살되었지요. 이후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은 이라크에서 몽골 침략을 물리친 이집트(Egypt)와 투르크Turk(티르키예, Türkiye)가 쥐게 됩니다.


이러한 원한 때문에 이슬람 문화에서 칭기즈칸은 악마로 여겨져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몽골의 후손인 중동의 하자르족(Hazaras)은 그때의 원한으로 지금도 온갖 박해를 당하고 있지요.




칭기즈칸의 죽음 때문에 기사회생한 서유럽


당연히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도 칭기즈칸을 매우 무서워했어요. 중동에서 전해진 '악마의 군대'라는 칭기즈칸의 소문이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미 5세기에 궁기병으로 유명한 훈족(Huns)이 서유럽을 침략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인데요. 훈족의 침입은 서쪽으로 밀려나게 된 동유럽의 게르만족으로 인해 결국 서로마가 멸망으로 귀결되어, 고대(古代, Ancient period)의 시대가 끝나고 '중세(中世, Medium aevum)'의 시대를 연 아주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 궁기병(弓騎兵(활(궁), 천리마(기)), Horse Archer) : 기마 궁수.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기병


과거 훈족을 연상케하는 칭기즈칸이 온다는 소식에 당시 유럽 최강 군대였던 폴란드, 헝가리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최정예 기사단 모두가  똘똘 뭉쳐 맞서 싸웠지만, 결국 칭기즈칸의 군대에게 대패하게 됩니다. 그래서 칭기즈칸의 서유럽의 정복은 시간문제로 보였지요. 실제로 1220년에서 1240년 사이에 몽골 제국은 볼가 불가리아(Volga Bulgaria), 쿠마니아(Cumania), 알라니야(Alanya), 키예프 루스 공국((Kievan Rus') 등 동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지요. 하지만 갑작스러운 칭기즈칸의 아들이자 몽골제국의 칸이었던 오고타이의 죽음으로 다음 칸의 추대 문제가 발생해 모든 몽골군이 1241년 레그니차(Leginica)와 모히(Mohi) 전투의 승리 직후 급하게 철군하게 됩니다.

※ 추대(推戴(밀(추), 떠받들(대), commend) : 윗 사람으로 떠 받듦


하지만 서유럽이 조금이라도 분열의 징후가 보이면 어김없이 습격해왔고, 이러한 대치는 13세기 후반까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1258년에 중동의 이슬람 제국을 멸망시켰고, 그 덕에 서유럽은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이런 두려움 때문에 이후 오랫동안 칭기즈칸은 유럽에서 잊힌 이름이 되었어요.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난 러시아


러시아는 칭기즈칸에게 가장 혹독하게 당한 국가 중 하나입니다. 초기 몽골제국은 유목민들이라 지배지에 정착하지 않았으나, 과도한 공납을 요구하는 등 혹독하게 착취하였죠. '몽골-타타르의 멍에'는 몽골 제국의 수탈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단어로 키예프 공국(Kievan Rus')이 멸망하고, 1240년부터 1480년까지 루스 지역 대부분이 몽골 제국(킵차크 칸국)에게 지배를 받던 기간 혹은 그 지배 자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키예프 루스 공국 지도 -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전쟁 중 대량학살, 포로나 노예 팔이 등 말로 열거하기도 힘든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발생했어요. 또한 도시가 파괴되면서 교역, 수공업의 기반이 무너지게 되어 러시아는 이후 농업국가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몽골에 바칠 공물을 마련하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기도 하였어요. 몽골 제국의 약 300년간 이어진 횡포와 수탈로 인해 그동안 서유럽과 대등한 지위를 누리던 러시아 유럽에서 가장 후진국으로 전락해 버렸어요. 서유럽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던 3백 년이 넘는 기간(14세기~16세기) 동안 러시아는 유럽 문명에서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칭기즈칸의 이름을 말하면 사형에 처한 중국


다른 국가들과 달리 몽골제국은 중국에 정착하고, 국호를 대원대몽골국, 약칭 원(元)이라고 정했습니다. 원나라는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남송을 정복하여 중국을 모두 통일한 뒤 1271년 건립한 중국 정복왕조로, 이후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의 다른 칸국들과 종속 관계를 끊고 독자적으로 현재의 중국과 몽골 지역들을 지배했으며, 일본, 베트남 지역을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 종속 관계(從屬(좆을(종), 이을(속)), Dependent Relationships) :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속하는 관계.
생물 분류 단계에서 종(Species)은 가장 하위의 단계이고, 속(genus)은 그 윗 단계입니다. 흔히 종-속-과-목-강-문-계-역-생명 순서로 분류하죠. 서로 생식을 통하여 같은 유전자 구성을 갖는 자손을 낳을 수 있는 개체군의 집단을 '종'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같은 속에 속하는 생물끼리 염기서열이 비슷한 양상을 띄죠. 예를 들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서 호모는 사람속이고, 사피엔스는 종을 의미합니다. 사람속에는 사피엔스 외에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등 여러 종이 있습니다.


원나라와 몽골제국 지도


비록 14세기 중반(1368년), 원나라가 명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몽골제국은 무너졌지만, 광활한 영역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어요 멸망 이후에도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다시 제국의 재건에 나서기도 했죠. 1449년 '토목보의 변 '이라고 불린 사건은 명나라 황제 정통제가 원나라의 잔당을 없애려고 하다, 오히려 몽골의 포로로 잡힌 사건을 말합니다. 덕분에 정통제는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야전에서 포로로 잡힌 왕이 되었죠. 그리고 몽골제국의 잔존 세력은 명나라 수도인 북경을 포위 공격한 적도 있을 정도로 강력했어요. 17세기 중국을 차지한 청나라 역시 몽골을 꺾기 위해 80년간이나 전쟁을 해야 했을 정도예요.

※ 야전( 野戰(들판(야), 전쟁(전), Field battle) : 야생의 산야나 들 따위의 야외에서 벌이는 전투
※ 잔존(殘存(남을(잔), 있을(존)), relict) : 다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음. 남을(잔)은 잔인하다, 잔혹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이렇게 몽골의 저항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중국에서는 칭기즈칸의 직계를 처형하고, 칭기즈칸의 이름을 말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할 정도로 칭기즈 칸의 이름을 두려워했죠. 이후 중국 내에서 칭기즈칸의 이름을 말하는 자가 없어지게 됩니다.

※ 직계(直系(곧을(직), 이을(계)), direct line) : 혈연이 친자 관계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는 계통으로, 수직적인 혈통 관계
직계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등을 의미하며, 형제자매나 부부는 직계가 될 수 없습니다. 직계는 존속(尊屬(높은(존))과 비속(卑屬(낮을(비))으로 구분하는데 존속은 나의 윗 관계 즉,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등이며, 비속은 나의 아랫 관계 즉, 아들, 손자, 증손자 등을 말합니다.
방계(傍系)라는 말도 있는데 같은 시조에서 갈라져 나온 친족을 의미하며 법률상 8촌까지를 뜻합니다.


몽골제국 이후 역사에서 사라진 칭기즈칸의 이름


현대의 몽골인

그렇다면 이 모든 일들을 벌인 몽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기억 속에 몽골은 시력이 좋고, 초원에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라고 남아 있나요? 그렇다면 칭기즈칸을 잊게 하려는 그들의 작전이 제대로 먹힌 겁니다.


몽골제국은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가장 끔찍한 적과 마주하게 됩니다. 피부가 검게 변해 흑사병이라고도 부르는 페스트(plague) 말이에요. 1347년부터 1351년 사이 약 3년 동안 페스트는 2천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습니다.(페스트는 6세기 동로마 제국에서도 퍼진 적이 있습니다.)  원나라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Toshkent) 지역을 건너 흑해, 크림 반도를 거쳐 이탈리아까지 퍼졌습니다. 이후 이탈리아를 거쳐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죠. 페스트가 짧은 기간 동안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이유도 몽골 제국의 넓은 영도와 빠른 교통망 때문이기도 합니다.

17세기 유럽에서 페스트 전문 의사들이 입었던 복장


하지만 페스트에 감염된 지역은 점차 고립되었고, 역병 앞에 넓은 국토와 빠른 기마술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씨족 국가이자 약탈 경제 기반의 대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결국 세계사 최후의 부족 제국이라는 이름만 남긴 채 세계사의 주인공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죠.


그 이후 청나라에 의해 내몽골과 외몽골로 찢긴 몽골은 외몽골만이라도 독립하기 위해 애썼지만 중국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된 노력 끝에 1921년 드디어 독립을 이루었어요. 비록 공산화를 이룬 소비에트 연방(soviet union, 약어 소련)의 도움을 받았긴 했지만요.


하지만 소련은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후 소련은 몽골의 민족주의 부활을 우려해 약 70년간 몽골 내에서 칭기즈칸의 흔적을 다 지워버렸어요. 학교 교과서에서도 칭기즈칸의 이름을 삭제하고, 칭기즈칸과 관련된 책을 불태우는 등 다시는 칭기즈칸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이후에도 칭기즈칸 이름 부르기 금지, 외지인은 칭기즈칸의 고향 방문 금지 등 다양한 금지 정책이 계속되었어요.


이러한 러시아 + 서유럽 + 중동 + 중국의 분노와 두려움 콤보로 인해 칭기즈칸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몽골에서는 이러한 여러 나라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암암리에 칭기즈칸 연구와 흔적 보존을 계속하였어요. 그리고 1961년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을 맞아, 소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칭기즈칸의 기념비를 세우게 됩니다. 바로 이 일이 서구에 알려지면서 칭기즈칸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죠. 지금으로부터 불과 60년 전 일이에요.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 기념비




제2의 몽골 제국을 꿈꾸는 미국


1970년대 팍스 몽골리나를 꿈꾸는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외치며 전 세계에 칭기즈칸의 열풍을 일으킵니다. 칭기즈칸의 연구와 더불어 역사책에 위인의 이름으로 재등장시켰죠. 대표적인 사례로 1995년 워싱턴 포스트지(The Washington Post)는 지난 1천 년 동안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하였어요. 미국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를 대변하는 논평이라고나 할까요?

 “우리가 선택한 ‘천년의 인물’은
그 시대의 박애자도 뛰어난 사상가도 위대한 해방가도 아니었다.
사실 그는 깡패였다.
그러나 역사는 때때로 깡패에 의해 만들어진다.
역사는 성인이나 천재, 해방가들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 워싱턴 포스트 : 지난 1천 년 동안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


미국은 정복과 교역을 통해 역사상 최초로 세계화를 이룬 몽골을 미화하면서 자신의 역할모델로 삼으려는 듯이 보이는 건 저뿐만이 아니겠죠?

※ 미화하다(美化, beautify) : 아름답게 꾸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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