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세지가 되거나, 쓰레기가 되거나.

#2_기획자는 소비자가 될 수 없다

by HOSHI

앞선 이야기에서 우리는 페이퍼 너머에 숨겨진 '진짜 문제'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만약 그 '진짜 문제'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면, 그제야 비로소 기획이라는 달리기의 출발선에 자세를 고쳐 잡고 서게 된 셈이다.


이제 출발 신호와 함께 달려 나가야 할 텐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연료로 삼아 스타트를 끊어야 하는 것일까?


그 연료는 당연하게도 수많은 '인풋(Input)'일 것이다. 자사 브랜드와 제품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부터 시작해 시장의 흐름, 경쟁사의 동향,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비자의 반응까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는 포털사이트 창을 띄우고 검색을 시작한다.


수많은 시장 조사 리포트, 통계청 데이터, 뉴스 기사, 그리고 커뮤니티에 올라온 소비자의 날 선 목소리들까지. 우리는 찾고, 또 찾고, 또 찾는다. 게다가 최근에는 AI라는 든든한 비서까지 가세해서, 예전 같으면 며칠이 걸렸을 방대한 자료를 단 몇 분 만에 긁어모으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렇게 수집한 데이터를 스터디하고, 분류하고, 장표에 예쁘게 정리해 넣으면서,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인풋을 하나하나 새겨 넣는다. 그리고 확신한다. 이 탄탄한 데이터들이 나를 '진짜 문제'에 다가서게 하고 그 해결책으로 안내해 줄 것이라고.


바로 여기에 우리가 빠지기 쉬운 가장 큰 맹점이 존재한다.

진짜 문제와 그 해결책은 책상 위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한 **레고(LEGO)**의 사례를 보자. 2000년대 초반, 레고는 사상 최악의 경영난을 겪으며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당시 책상 위의 기획자들과 데이터 분석가들이 내놓은 결론은 명확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요즘 아이들은 인내심이 부족하다. 그들은 즉각적인 만족(Instant Gratification)을 원한다."


빅데이터와 수많은 리서치 결과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진득하게 앉아서 블록을 조립할 시간이 없다는 것. 그래서 레고는 블록의 크기를 키우고, 조립 과정을 단순화하고, 쿨해 보이는 액션 피규어 등을 내놓는 전략을 택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회사가 무너지기 직전, 레고의 연구진은 데이터가 가득한 사무실을 벗어나 독일의 한 가정집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11살 소년을 관찰하던 중, 소년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며 낡아 빠진 아디다스 운동화 한 켤레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건 내 트로피예요. 내가 이 동네에서 스케이트보드를 가장 잘 탄다는 증거거든요."


운동화의 한쪽 면이 닳고 닳아 구멍이 날 지경이 된 그 신발은, 소년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연습하고 노력했는지를 증명하는 훈장이었다. 그 순간, 기획자들은 깨달았다. "아이들은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시간을 쏟고 '숙련도(Mastery)'를 증명하고 싶어 한다."


이 현장의 발견 하나가 모든 것을 뒤집었다. 레고는 다시 블록의 크기를 줄이고, 더 복잡하고, 더 정교하고,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완성할 수 있는 제품들을 내놓았다. '어른들의 데이터'가 예측한 것과 정반대의 길이었지만,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레고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만약 그들이 끝까지 사무실 안에서 데이터만 파고 있었다면?

오늘날의 레고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The key to success is to get out into the store and
listen to what the associates have to say."

"성공의 열쇠는 사무실을 나와 매장으로 가서, 그곳의 목소리를 듣는 데 있다."

월마트의 창업자 샘 월튼의 이 말은, 레고의 사례처럼 오늘날 데이터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경고다. 우리는 절대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무실과 회의실, 그 안에는 소비자가 없다. 나조차도"


아이러니하게도, 기획자는 소비자와 가장 먼 사람인 듯하다.

많은 기획자들이 "나도 퇴근하면 소비자니까 소비자의 마음을 안다"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착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프로젝트를 맡아 기획을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뇌는 이미 공급자의 논리로 오염되어 있을 것이다.


소비자는 직관으로 느끼고 반응하는 반면, 기획자는 분석하고 논리를 세우는 존재이다.

이 간극은 좁혀지려야 좁혀질 수 없다.


오히려 데이터를 많이 알면 알수록, 소비자를 잘 안다는 착각에 빠져 소비자의 '진짜 마음'과는 가장 동떨어진 사람이 되어버린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기획자는 결코 순수한 소비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상에서 시작해서 책상에서 끝나는 기획은, 논리정연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이라는 세계에서는 처참하게 실패하거나 외면받을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책상 위에는 '평균의 함정'에 빠진 숫자들만 존재할 뿐, 닳아 빠진 운동화를 자랑스러워하는 소년의 속마음은 담겨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밤새워 서치한 데이터와 스터디한 내용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획의 뼈대가 되는 필수적인 기본 지식이다. 하지만 그 지식이 문제를 해결하는 날카로운 지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비자가 모이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그들이 어떤 표정으로 물건을 집어 드는지, 친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며 제품 앞을 지나치는지, 제품 선택을 포기하고 돌아설 때의 표정은 어떤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공간의 공기를 함께 경험해야 한다.


물론 밖으로 나가는 일은 쉽지 않다. 투입하는 시간 대비 확보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으로만 따지자면, 사무실에 앉아 클릭 몇 번으로 얻는 정보량에 비해 훨씬 미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현장에서 건져 올린 단 하나의 발견은, 책상 위에서 긁어모은 수천 페이지의 데이터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인풋을 줄 것이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애석하게도 기획자가 넘어야 할 산은 눈앞에 보이지 않을 뿐, 안개 속에서 끝없이 펼쳐져 있다.

쉽지 않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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