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시작된 균열

15화

by 전석표

“크으, 좋다.”


지수는 한 모금 들이킨 뒤, 눈을 좁히며 만족스럽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야, 리모컨 줘봐.”

“어, 여기.”


리모컨을 받아들자 그녀는 대뜸 TV를 켜더니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돌리다 손을 멈춘 채널 화면엔, 오래전에 종영했지만 여전히 회자되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의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치맥 먹으면서 무한도전 보려고 우리 집 온 거냐?”


그런 물음에 잠시 브라운관 화면을 바라보던 사람의 고개가 다시 사내에게로 돌아갔다. 지수가 옅은 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럴 리가. 너랑 같이 술 먹고 싶어서 온 거지.”

“그래… 뭐.”


의조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다 지수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뭔 일 있냐? 어째 평소랑은 다른 거 같다.”

“왜, 어떻게 보이는데?”

“그냥, 평소엔 제어가 안 되던 황소가 마취총에 맞은 거 같아.”

“허! 지금까지 날 황소로 본 거야?”

“아니, 당연히 농담이지. 근데 정말로 평소랑은 좀 다른 거 같아서.”


지수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텅 비어 있었다.

맥주를 천천히 입에 가져가던 눈빛은 평소와 다르게 기운이 빠져 있었다. 의조는 점점 찝찝해졌다.


“뭔 일 있는 거 맞지? 뭐가 그렇게 어렵냐. 나한테 말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래?”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그래도 얘기 좀 해 봐라. 그런 얘기 안 하면 친구가 아니라 남이야.”


말의 진심이 닿자, 지수의 시선이 천천히 의조에게 닿았다. 말없이 보다가 조용히, 작게 말했다.


“참, 살면서 별일이 다 있네, 정말.”

“뭐?”


말의 의미를 제대로 잡지 못한 의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스무 살 입에서 듣기엔 어울리지 않는 무게였다. 의조는 괜히 등을 곧게 세우며 그녀를 기다렸다.


“아, 모르겠다 진짜.”

“뭔데 그러냐니까?”


평소처럼 툭툭 시원하게 내던지지 못하는 지수였다. 의조는 처음으로 지수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지수의 눈빛이 잠시 의조에게 머물렀다.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다가, 드디어 짧은 문장을 건넸다. 그러나 그 문장마저 어렵게 만든 느낌이었다.


“너한테, 미안해.”

“나?”


뭐가? 언제? 왜? 의조의 머릿속엔 단숨에 물음표가 수십 개는 박혔다.

심지어 지수는 사과 같은 걸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말은 더 낯설고, 더 서늘했다. 그동안의 왈가닥함과는 하나도 맞지 않는 느낌. 의조는 어딘가 씁쓸하고, 불편해졌다. 그래서 말투가 살짝 거칠어졌다.

“알아듣게 말을 좀 하라고, 미안한 건 알겠는데, 왜 미안한 건데, 이유가 있잖아.”


그 말에 지수는 아주 잠깐 멈춰 섰다.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표정이 흐물하게 무너졌다. 그리고 마침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설화랑 술을 마셨거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어, 어? 뭐?”


권설화. 그 애 이름 석 자에 커져가는 눈을 의식했다. 사내는 앉아있던 자세를 틀어 고쳤다.


“설화? 그래, 설화랑 술 마셨는데?”


지수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말을 꺼내고도, 마저 이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보였다.


“설화 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의조의 속도는 빨라졌고, 지수는 반대로 멈춰 있었다. 입술만 꽉 깨문 채였다. 그러다, 마치 어떤 결심을 온몸으로 끌어올리듯 지수가 확 내뱉었다.


“그냥! 설화랑 좀 다퉜다고. 나 걔랑, 다퉜어!”

“뭐, 뭐? 다퉜다고?”


의조의 목소리는 당황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표정도, 호흡도, 흔들렸다.

지수는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벌컥 마셨다. 목구멍으로 쏟아지듯 넘겨지는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렸다.


“아니 무슨! 넌 신년 초부터 다투고 그래! 그것도, 설화잖아.”


지수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이지만 속으론 설화를 걱정하고 있었다. 의조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거 때문에 기분 안 좋았던 거야? 너희 둘 그렇게 친했잖아. 왜 싸워. 얼른 풀어. 괜히 길어지면 더 꼬인다.”


고개를 숙인 지수의 표정이 힘이 빠져 있었다.

의조는 그 얼굴을 보고 잠시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묻듯이 내뱉었다.


“그리고… 나한테는 왜 미안해하는데. 내가 뭐, 설화 남자친구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방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는 지수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나지막하게 흩날리는 한마디를 집 안에 흩뿌렸다. 그 말에 둘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한순간에 무거워졌다.


“나 이제 설화랑은 친구로도 못 지낼 거 같은데.”

“…뭐?”


마주 앉은 자리에서 의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말 하나가 방 안의 온도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저 망가진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말의 의미를 의조도 알고 있었고, 지수도 알고 있었다. 의조의 입안에서 많은 물음들이 한순간에 뒤엉키려 했다.

친구로 못 지낸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얼마나 크게 싸웠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 널 좋아하는 설화는 어떻게 하라고. 의조는 진땀을 삼키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싸웠길래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나한테는 얘기해도 되잖아. 그래야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지.”


지수는 좀전의 말을 끝으로 설화 얘기를 더 하지 않으려 했다. 의조는 좀 더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고들면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오늘의 지수는, 어떤 말도 제대로 삼킬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 힘들어서 그런 거겠지. 그런 거라면 굳이 파고들려고 하지 말자. 억지로 이해하는 척, 의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화 너 많이 좋아하니까, 둘이 꼭 풀어.”


사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설화 얘기를 끝냈다. 얘기하느라 손대지 않았던 테이블 위에 맥주를, 그제야 한꺼번에 벌컥 들이켰다.

둘은 TV 속 예능 프로그램으로 애써 관심을 돌렸다. 지수가 웃으면 의조도 따라서 같이 웃었다. 그러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저, 별일만 아니기를 깊이 바라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 테이블엔 다 먹은 치킨 뼛조각들과 빈 맥주캔 네 개가 가지런히 놓였다.


“쓰레긴 내가 분리수거할 겸 같이 버릴 테니까 그냥 가. 잘 갈 수 있지? 바래다줘?”


신발장 앞에 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살짝 입꼬리를 올린 얼굴에는 맥주 때문인지 살짝 홍조가 올라있었다.

“나 알쓰 아니거든. 쓰레기는… 미안, 좀 부탁할게, 히히.”

“그래, 조심해서 가고.”


지수를 보내고 나서 사내는 바로 남은 쓰레기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정리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되짚어보았다. 머릿속이 너저분해지자, 생각하는 얼굴에는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그냥 다 캐물어 봤어야 했나… 김지수 걔는 진짜. 사람이 할 말이 있으면 다 해야지, 그럴 거면 처음부터 꺼내질 말던가. 남은 사람만 찝찝하게 만들어, 뒷맛 안 좋게.”


불만을 토해내다가도, 사내는 금방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생판 다른 사람이 될 정도면 그만큼 얘기하기도 힘든 거겠지. 걔가 무슨 잘못이 있어.”


설화와 지수가 만났던 그날의 풍경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대로 청소하는 동안, 10분이 넘도록 혼자 사색했다.


“아,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알아 진짜. 나도… 안 그래도 힘들어, 진짜로.”


결말엔, 마음만 지쳐서 주저앉아버린 사내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