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은 마음은 눈처럼 쌓였다

14화

by 전석표

한동안은 약속 없이 쉬거나 운동을 하며 집에만 있었다. 분리수거나 장을 보러 가야 할 때를 빼면, 거의 밖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예외가 있었다. 반찬통을 돌려주어야 해서 지수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초인종을 누름과 동시에, 문 너머로 지수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문이 열리자마자 소년은 지수에게 반찬통이 든 종이봉투를 말없이 내밀었다.


“맞다! 하마터면 안 받고 그냥 갈 뻔했네.”


지수는 잊고 있던 걸 그제야 떠올린 얼굴로 말했다.


“돌려주러 왔다. 어머니께는… 늘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짧게 말한 뒤, 의조는 곧바로 돌아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을 닫으려다 말고, 손이 멈췄다.

지수의 차림이 눈에 밟혔다. 외출 준비를 막 끝낸 사람의 분위기였다.


“너 지금 어디 나가냐?”


그런 기분이 들어 넌지시 묻자, 지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 설화 만나러. 오랜만에 연락 와서, 단둘이 술 마시자고 하더라?”

“…뭐?”


말 한마디에 의조의 눈이 단번에 커졌다.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지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름만 들어도 바로 반응 나오네. 표정 봐라, 딱 티 난다.”


여유있는 지수의 모습과 눈이 커진 사내의 모습이 대조되었다.


“아… 아니, 설화한테 연락이 왔다고? 방학하고 나서 아니지, 크리스마스 이후부터 난 한 번도 설화랑 연락이 안 됐는데?”


의조의 말에 지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곧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음, 그래? 에이 뭐 별일 있을까. 나한테도 오랜만에 연락 온 거야. 혼자서 바쁘기라도 했나 보지, 별걸 다 사서 걱정하냐 너는!”

“근데… 왜 너한테만….”


의조의 말끝은 힘없이 흘러내렸다. 그 표정을 본 지수는 의조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걱정 그만 하십쇼. 조만간 연락 오겠지, 인마. 네 속 마음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근데 오늘은 나랑 설화 둘이 보는 날이니까, 낄 때 끼고 빠질 땐 빠지는 걸로 부탁 좀 하겠습니다? 자, 나 준비해야 하니까. 얼른 가. 퇴장!”

“지수야! 설화 만나는 김에 내 얘기도 좀!”


사내의 다급한 부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얄궂을 만치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닫힌 문 앞의 의조는 잠시 얼이 빠져 멍을 때리다, 힘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집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맥이 빠져있었다. 발걸음뿐이 아니라 얼굴, 목소리, 몸 모든 게 처져 있는 사내였다.

“김지수한텐 연락이 왔는데… 왜 나한텐 오지 않는 거지. 정말… 내가 설화를 부담스럽게 한 걸까? 혹시, 알아버린 걸까. 내가 좋아한다는 걸.”


설화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게임장. 도서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었었다. 그게 전부,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설화는 착하니까… 거절을 못 해서 받아준 걸까.’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불안이 마음속 깊은 곳에 흐르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똑같았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지만, 자기만 제자리였다. 나날이 선명해지던 불안감은 그때부턴 서서히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체념으로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었다.


“그래… 내가 부담스럽긴 했겠지. 그러니까… 연락을 안 하는 거겠지.”


집에 혼자 있을 때마다 그 애의 생각이 몇 번이고 사내를 붙잡아 괴롭혔다. 하루를 계속 괴롭게 마음고생하던 사내는 결국 도저히 이렇게는 못 지내겠다 싶은 생각에, 버티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몸을 힘들게 하자. 생각할 틈도 없게.’


겨울 공원. 숨만 쉬어도 코끝이 얼얼해지는 날씨였다. 그럼에도 의조는 매일 5km를 달렸다. 뛰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겨울바람이 땀 위로 스치면, 차갑기보다 오히려 시원했다. 그 해방감 때문에, 그는 계속 달렸다.

오늘도 달리고 난 후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얀 입김이 천천히 허공에 흩어졌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고요를 깨뜨린 건, 주머니 속에서 울린 핸드폰의 진동이었다.

핸드폰을 꺼내어 고개를 돌렸다. 화면엔, 지수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 알림이 여러 번 찍혀 있었다. 뒤늦게 안 사내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거의 기다림이 없이 단번에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공원이야, 왜.”


평소였다면 공원에 있다는 말에 ‘얼어 죽을 날씨에 무슨 공원이야’ 하며 바로 투덜거리거나, 장난부터 치고 봤을 지수였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그렇구나.”


담담했다. 툭, 하고 떨어지는 말 한 마디. 의조는 잠깐 말이 막혀, 되려 먼저 물었다.


“왜 전화했어?”


평소와는 다르게 단정한 목소리가 소년에게 말했다.


“너네 집에서 치맥 어때. 내가 사 갈게.”

“…치맥을? 갑자기?”

“응, 별로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말투는 익숙했지만, 힘의 결이 달랐다. 까불던 기색 대신 조용하게 눌러 담은 톤. 평소였다면 분명 서로 한두 번씩은 툭 하고 쏘아붙였을 텐데, 대화가 이상하리만치 매끄럽게 흘렀다. 그게 오히려 거슬렸지만,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본론으로 돌아와서 지수에게 대답했다.


“알겠어, 몇 시에 올래?”

“한 여덟 시?”

“그래, 그때 와.”


통화를 끊고 나서도 사내는 잠시 볼 것 없는 핸드폰 화면에서 시선을 떠나지 않았다. 그대로 아주 잠시 동안은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살짝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 다시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풀어주고 나서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썼다. 사내는 집까지도 뛰어가기로 했다. 여덟 시까진 시간이 충분하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집 청소를 할 생각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차근차근 준비하고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지수와 약속한 시각이 되었다. 시계 침이 여덟 시를 가리키자 마침 문을 발로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노크가 집안을 울렸다. 문을 여니 롱패딩 차림에 양손 가득 봉투를 든 지수가 있었다.


“으, 추워라, 방바닥 온도 올려 놨어?”

“올려놓긴 했는데 아직 안 따뜻할 거야.”

“뭐, 됐어.”


미지근한 반응의 지수가 사내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접이식 나무 테이블 위로 지수가 준비해 온 치킨과 생맥주가 올려졌다. 롱패딩을 벗은 그녀는 편한 추리닝 차림으로 바닥에 앉았다.

먼저 맥주 뚜껑을 따자 턱, 하며 경쾌한 소리가 공간에 짧게 퍼졌다. 그대로 마주 앉은 지수는 소년에게로 캔을 들며 말했다.


“짠 해.”

“어 그래, 건배.”


서로의 캔이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