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오늘이었다.
낮 동안 계속 소파에만 늘어진 채로 TV를 보던 사내의 시선이 돌려진 건, 핸드폰을 울리는 벨소리 때문이었다.
“누구지? 애들인가.”
별다른 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방금까지의 시큰둥했던 표정을 잊은 듯 사내의 두 눈이 커졌다. 핸드폰 화면엔, 정말로 오랜만에 그 애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어… 어떡해. 설화다. 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부여잡은 의조는, 급하게 목을 가다듬고 나서야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설화야.”
사내의 대답에, 핸드폰 너머 그 애의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의조야. 오랜만이다. 뭐 하고 있었어?”
“나? 그냥… 집에 있었어. 왜?”
조심스레 묻는 말에, 설화가 가볍게 이어서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있어?”
“시간? 응… 있어. 왜?”
잠시 망설이는 숨이 들렸다. 설화가 말했다.
“…오늘, 나랑 술 한잔할래?”
“어… 뭐라고?”
의조의 심장이 또렷하게 뛰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설화가 부드럽게 반복했다.
“술 마시고 싶어서. 너 괜찮으면 오늘… 같이.”
뒷말을 기다리는 그 애에게서 사내가 내놓을 대답은 당연했다.
“응. 괜찮지. 너무 좋지. 어디서 볼까? …그래. 알겠어. 이따 보자!”
통화를 마치자마자 의조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닥을 딛는 발끝까지 들뜸이 차올랐다.
“진짜… 설화가 먼저 술 마시자고 한 거야…?”
말은 중얼거렸지만, 입가엔 감출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한순간이었다. 그 애에게서 연락이 왔고, 전화를 받으니 얼굴까지 보게 될 약속이 잡혔다.
그동안 그렇게 보고 싶어도 연락이 닿지 않아서 속앓이를 한 게 말이 아니었는데, 그랬던 지난 시간이 한꺼번에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약속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음에도 의조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욕실로 들어가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까지 정리했다.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 섰다. 의조는 마지막으로 머리를 손바닥으로 정돈하며 중얼거렸다.
“오케이… 오늘 머리 잘 됐다. 얼굴도… 음. 괜찮네.”
말투는 담담하려 했지만, 눈매와 입가에 스치듯 올라오는 설렘은 감출 수 없었다. 설화를 다시 만나는 오늘이, 의조에겐 오래 기다려온 날이었다.
동양식 실내장식이 어우러진 술집 안. 천장의 전등들이 사방에 부드러운 석양 색 빛을 던지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의조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을 괜히 한 번 더 만지작거리며 숨을 골랐다.
만나기로 한 술집 안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사내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을 괜히 한 번 더 만지작거리며 숨을 골랐다.
“너무… 티 나는 건 아니겠지?”
핸드폰 화면을 켜, 전면 카메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머리 모양, 옷깃, 표정까지. 어딘가 어색하면 어쩌나 하는 긴장에 손끝이 조금씩 굳어갔다.
“나쁘지 않아, 오늘 모습 괜찮―”
혼잣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사내의 뒤로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실례합니다.”
놀란 사내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그 애가 사내 앞에 서있었다.
“어어! 언제 왔어, 설화야!”
“제시간에 맞춰서 딱 왔지?”
방금 했던 말 설마 들었을까? 민망해진 사내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고치고 나니 그 애의 복장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오버핏 코트에 체크무늬 목도리, 긴 생머리가 자연스레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익숙하면서도, 이상하게 또 달라 보이는 모습이었다.
설화는 자리에 앉자마자 손을 모아 품을 잔뜩 웅크렸다가, 금세 환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오는 길에 생각보다 춥더라. 의조는 괜찮았어?”
“어? 아… 나는 괜찮지.”
“그럼 다행이네! 아무튼, 진짜 오랜만이다.”
밝았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의조는 잠시 멈칫했다. 며칠 전 지수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정말 괜찮은 걸까.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건, 일단 눈앞의 설화를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러게. 방학식 이후로 처음이지.”
“시간이 그렇게 지났구나… 나도 몰랐네. 정신없이 다녔나 봐.”
의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어땠는지 좀 들려줘. 궁금했어.”
“아, 물론이죠. 그 전에 메뉴부터 고를까요?”
“아, 안 그래도 여기 안주가 되게 맛있는 집이라 했어.”
사내는 그 애와 같이 메뉴판을 둘러보며 술과 안주를 골랐다.
“짠.”
“짠.”
서로의 술잔이 가볍게 부딪혔다. 술 한잔을 털어 넣은 둘의 표정이 일순 똑같아졌지만, 입에서는 서로 반대의 말이 나왔다.
“크… 좋다.”
“으악… 이 쓴맛은 언제 적응되지?”
의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뭐야, 설화 너 술 잘 못 마시는구나?”
“아, 아니야! 나 잘 마셔.”
“방금 이 쓴맛은 언제 적응되냐고 말한 사람이….”
“그, 그건… 그냥…!”
얼굴 한구석에서부터 붉어지는 설화의 모습이 오랜만에 의조의 입가를 부드럽게 풀어놓았다.
정말, 오랜만에 편안했다. 주문한 안주와 함께, 둘의 술자리는 천천히 무르익어갔다. 빈 술잔을 내려놓은 사내는 자연스레 근황을 물었다.
“곧 개학이고… 졸업도 코앞이네. 아, 그건 그렇고. 사실… 너랑 연락이 안 돼서 조금 걱정했어. 무슨 일 있는 건 아닌 거지?”
지수의 말을 떠올리며 슬쩍 건넨 말이었다. 설화는 짧게 웃더니 말투에 장난스러운 힘을 살짝 실었다.
“그냥! 가족이랑 상의할 일도 좀 있고, 이것저것 한꺼번에 겹쳐서… 정신 없었어. 그래서 연락을 못 받은 거야. 미안, 의조야.”
“괜찮아. 별일만 아니면 돼.”
“응. 의조 너는? 잘 지냈어?”
그 물음에 의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도, 다시 입꼬리를 오리며 대답해 주었다.
“응. 잘 지냈어. …이렇게 보니까 좋다.”
“나도. 의조랑 이렇게 다시 마주 앉으니까.”
시간은 자연스레 흘렀고, 어느새 술병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희 사이다 하나랑요. 물 한 병 더 주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주량 차이가 꽤 나는 것 같아 사내는 술 대신에 음료수와 물을 주문했고, 받자마자 두 개를 모두 설화 쪽으로 밀어두었다. 조금이라도 천천히. 오늘은 설화의 속도에 맞추기로 했다.
그때, 물끄러미 사내를 바라보고 있던 설화가 조용히 의조를 불렀다.
“의조야.”
“응?”
고개를 들자, 설화가 아주 약하게 웃고 있었다. 입꼬리보다는 눈빛이 먼저 흔들리는 표정이었다.
“지수는, 잘 지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