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김지수. 그 이름 하나에 잔잔하던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의조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는 듯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나 부른 거 지수 얘기하려는 거 아니야? 뭐, 그 이유라도 상관없지. 이렇게 볼 수 있으면.”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너를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숨긴 감정일까.
말 끝이 자꾸 흐르는 게 의심을 남겼다. 의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사실… 저번 주에 지수랑 집에서 치맥했어.”
설화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정말?”
“응. 갑자기 연락 와서. 이래저래 얘기하다가… 너 얘기도 좀 나왔고.”
거기서, 설화의 눈빛이 순간 멈췄다.
“…지수가… 뭐라고 했는데.”
그 질문은,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꺼내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의조는 그 미묘함을 채 읽지 못한 채,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설화 너, 지수랑 싸웠다며. 그래서… 안 그래도 오늘 그 얘기하려고 했어. 지수 성격 알지? 항상 황소처럼 들이받던 애가 그날은 완전 딴사람이었거든.”
“의조야.”
말이 끊겼다. 설화가 의조의 말을 끊은 건, 처음이었다.
“어… 왜?”
설화는 숨을 고르듯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어렵게 의조를 바라봤다.
“나… 지수랑 싸운 적 없어.”
“…뭐?”
귀가 잘못 들린 건가. 하지만, 설화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그대로였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마주하자, 사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잠시 어색한 얼굴을 했다.
“나한텐 그렇게 들렸어. 지수가… 너랑 크게 다퉜다고 했거든.”
“지수가 너한테 그렇게 말했어?”
설화의 눈에 차오르는 감정은, 분노도 원망도 아닌 서늘한 슬픔이었다.
의조는 그 감정을 처음 보는 듯 낯설게 느꼈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상황이, 서서히 다른 무늬를 드러내는 기분.
“…그럼,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바보처럼 굳은 표정으로 묻는 의조 앞에서, 설화의 눈동자가 약하게 내려앉았다.
기류는 그 애의 표정이 힘을 잃으면서부터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나, 지수랑 싸우지 않았어. 그냥, 그냥.”
말을 잇지 못하는 목소리에 불안이 묻어났다. 의조의 머릿속에는 지수가 보였고, 지금 눈앞의 설화가 겹쳐졌다. 이상했다. 둘 다 왜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왜 나한테만 이런 표정을 보여주는 거지.
뒷말을 어려워하는 설화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긴장한 눈으로 그 애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설화는 숨을 조금 들이쉬었다. 마지막까지 망설이다, 조심스레 내려놓듯 말했다.
“나 지수에게 고백했어.”
“어?”
단 한 음절이, 너무 크게 들렸다. 의조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가슴 어딘가가 턱 하고 멈추는 느낌이었다. 말하는 방법을 잠시 잃어버린 사람처럼, 모든 것이 무음으로 흩어졌다. 그런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설화는 지금까지 의조만 모르고 있었던 진짜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려 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지수랑 단둘이 술을 마셨던 날 있잖아. 그때 내가, 지수한테 말했어. 좋아한다고.”
“…아.”
“근데… 지수가.”
설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음 말은 더욱 더디게 흘러나왔다.
“지수가… 내 말 듣고 그냥 자리를 나갔어. 나, 너무 놀라서 바로 뒤따라 나갔는데….”
의조는 알아챘다. 설화의 어깨가 잘게, 계속해서 떨리고 있다는걸.
“지수… 붙잡았는데, 그때 지수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설화의 시선이 의조를 향했다. 눈물이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이었다.
“그동안… 자기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고. 무섭대. 내가… 소름 끼친대.”
“….”
“나,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잘못한 거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너무 무서워…. 의조야….”
작은 두 손이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듯 떨렸다. 그리고 설화는, 결국 의조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숨을 삼키듯 울면서, 감정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의조는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무너지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 그 사람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손 하나 뻗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움직이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 있었다. 그 순간, 의조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깊게 부서졌다.
사고가 멈춘 것 같았다. 머릿속에 널려 있는 생각들은 다들 서로의 꼬리를 밟고 뒤엉켜 있었다. 설화의 울음을 바라보며 의조는 문득 며칠 전의 지수를 떠올렸다. 왜 그날, 지수가 말을 끝까지 못 했는지. 왜 그렇게 낯선 얼굴로 미안하다 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싸운 게 아니었다.
말하지 못한 것이다. 말해버리면 의조에게 너무 잔인해지니까. 그래서 거짓말을 택한 거였다.
심장이 크게, 일정하지 않게 뛰었다. 갈비뼈와 폐 사이에서 무엇이 계속 쾅쾅 부딪히며 울리는 느낌. 입술이 떨렸다. 그래도 의조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설화야. 일단… 눈물 좀 닦아. 괜찮아. 여기 있으니까.”
서로를 눈동자에 비추는 자리에서 사내는 알았다. 그 표정. 그 목소리. 그 무너지도록 간절한 마음.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게 아니고서야 절대 나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설화는 정말로… 지수를 사랑한다.
어두운 술집 안에서 조명이 비춘 석양빛 같은 풍경이 느린 속도로 흘러갔다. 의조는 존재 자체가 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마저도 방금 설화가 한 말을 닮아가려 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애의 슬픔을 어떻게든 덮어주고 싶지만, 자신이 미워질 정도로 예사로운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에게 뭐라도 하라고 재촉했다. 제발 그래야만 했다. 제발….
그러는 사이에, 마음속 깊은 도랑에 숨어있던 무언가가 가시가 되어 솟아오르더니 그대로 심장을 꿰뚫었다. 깊게 파고든 가시는 그렇게 사내에게 물었다.
‘애초에 네가 위로를 해줄 자격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