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버스, 다른 마음

18화

by 전석표

…어?

가시가 물은 순간에, 사내는 설화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지수를 좋아한다고 말한 그날부터 오늘까지의 수많은 풍경이 오래된 영화의 필름이 되어 떠올랐다.

좋은 사람인 척하고 싶었던 욕심. 책임지지 못할 말을 서슴없이 내던지던 어른 흉내.

내가 도와줄게. 큰 도움은 못 주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해볼게.

응. 그리고 이건… 너랑 나 사이에만. 지수한테는 말 안 할게.


‘아.’


무책임했다. 비겁했다. 스스로도 용서가 되지 않았다.


‘네 욕심 채우려고 곁에 있었던 거잖아. 도와주는 척하면서 뒤로는 그 애 마음이 네 쪽으로 오길 아등바등 바랐잖아. 너, 그런 놈이잖아.’


가시가 말하는 사내는, 변명할 수 없을 만치 이기적이었다. 흔들리는 내면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물음표에게 답을 내놓을 자신이 없어서, 미간이 고통스럽게 구겨졌다. 부정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더 정확한 표정을 빌리자면, 하면 안 된다. 사내는, 넋이 나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설화를 위로해 줄 자격이 없구나.’


숨조차 조심스러워진 의조 앞에서, 설화는 여전히 작게 떨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커다란 눈동자 안에는 오직 슬픔만이 비쳤다. 삐뚤빼뚤, 구부러진 음성이 사내에게 닿았다.

“지수랑 멀어지고 싶지 않아… 정말 싫어.”


그렇게 아파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의조는 애써 표정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조금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굳은 마음이 조용히 드러날 뿐이었다.


“설화야, 걱정하지 마. 내가 지수한테, 잘 얘기 해볼게. 그러니까 울지 말고….”


위로라는 말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가시가 들쑤신 마음은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 설화는 눈물을 닦지 못한 채 잠시 숨을 고르더니, 힘겹게 말했다.


“아니야, 의조야. 그럴 필요 없어.”


조금의 뜸. 그 뒤로 가늘고 신중한 음성이 따라왔다.


“실은… 나 이제 시간이 없어.”

“…뭐라고?”


입술이 제대로 붙지 않아, 말은 어설프게 새어 나왔다.

그 애가 뒤를 이은 문장은 사내의 몸에 있는 모든 피를 빠져나가게 하는 것처럼 고통을 안겼고, 아가리를 벌려 집어삼키며 처참하게 으스러트렸다.

어떤 표정을 짓는 게 정답이었을까. 설화는 사내에게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으려다 실패한 것 같은 초라한 얼굴로 말했다.


“나… 졸업하고 바로 이민 간대.”


그렇게 이어진 말은, 너무 가볍게 들리는데 너무 잔인했다.


“응… 고3 되면서 가족들이 몇 번 얘기했던 일이긴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

“뭐… 뭐라고…?”


술집 안의 소음은 그대로 흐르고 있는데, 의조의 세계에서는 모든 소리가 꺼져 있었다. 딱 하나, 설화의 목소리만 똑똑하게 떨어졌다.


“이민… 이민이라고? 갑자기가 아니라… 정말로 영영, 가는 거야? 유학, 그런 것도 아니고?”


설화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입을 열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이 어지러웠다.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듯 흔들렸다. 설화는 간신히, 무너지는 표정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어설픈 미소를 만들어냈다.


“제일 빨리 말한 거야. 그것도 너한테. 확실하게 결정된 건… 지수한테 고백하고 며칠 뒤였으니까.”

“그… 아… 그래.”


거짓말. 말이 되냐고.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내는 이게 도무지 현실 같은 말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러니까, 졸업하자마자 이민을… 가는 거구나. 아, 나…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늘 자신 있게 고개를 들고 있던 의조가, 처음으로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고백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깊고,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사실이 사내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럼… 우리도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된 거네.”


숨에서 나온 말이라기보단, 중력을 버티다 못해 흘러내린 한숨 같았다. 설화의 눈도 아주 조금 흔들렸다.


“…응.”


별다른 말을 자아내지 못하고, 고개만을 삐걱거렸다.

서로에게 오가던 문장이 사라졌다. 아무도 꼼짝하지 못했다.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여기까지 하기로 한 사내는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먼저 일어나고야 말았다. 핸드폰 화면을 한 번 켜서 시간을 본 척, 어색하게 그 애에게 말했다.


“벌써 시간이 꽤 됐네. 이제… 갈까, 설화야.”

“…응, 그러자.”


술집 밖으로 나온 둘은 시려운 거리를 걸었다.

길바닥에 내려앉은 눈들이 모두 떼가 타 더러워져 있었다. 사내는 그런 눈 위를 밟아가며 미약하게 휘청이는 걸음을 늘여놓았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어서 계속 나아가는 사람처럼.

둘은 같은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설화는 훗날에서야 알게 된다. 오늘 이 순간까지도 몰랐던 사실 하나. 송의조는, 원래 이 버스를 타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새해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 소망이 들어서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라디오를 듣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소망이 가슴에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고 계속 함께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까?


버스 안엔 운전기사를 빼고 나면 의조, 설화 단 두 사람뿐이었다. 라디오 속 목소리가 마치 두 사람에게 묻는 것 같았다.


―마음의 나침반이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올해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들어선 소중한 소망과 바람이 이뤄지는 멋진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디오를 들으며 버스가 내달렸다. 어두운 하늘에 대비되는, 환하고 역동적인 시내를 가로질렀다. 정류장에 내리고 나서야 둘 사이의 정적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설화였다.


“오늘은… 너 집 앞까지 타고 가지. 굳이 같이 내릴 필요 없었잖아. 춥지 않아?”


의조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가볍게 대답했다.


“춥잖아. 그래서… 데려다주고 싶었어.”

“…미안해. 나 진짜 괜찮은데.”


의조는 그 말에 희미하게 웃은 것 같았다. 근데 웃음이 아니라 체념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