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둘은 걸었다. 사내는 예전처럼 나란히 걸을 수가 없어서, 조금 뒤에서 발만 보며 따라갔다. 발자국이 구불구불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래… 설화가 지수를 좋아하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놀랄 일도 아니야. 당연한 건데. 근데….’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이민은 아니잖아.”
사내의 속에 있던 말이, 그냥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평소였다면 그런 자신의 행동에 헉 하고 놀라서 횡설수설 수습하기에 바빴을 것이었다. 설화가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어…?”
하지만, 그 길목에서는, 그 애에게 변명하지 않는 그대로의 사내가 있었다. 순간, 어지럽게 부유하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뒤엉키기 시작했다.
자책감, 미안함, 충격, 분노, 서운함, 당혹감.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이 사내의 안에서 피어올랐다. 사내는 똑바로 그 애를 바라보았다.
“이민은… 완전히 가는 거잖아. 그러면… 난 더는 너를 볼 수 없다는 거고.”
말의 끝이 아주 천천히 무너졌다. 놀란 건 설화였다. 늘 웃고 넘기던 의조가 이렇게 말하는 걸, 처음 봤으니까.
“의조야… 그건….”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조금… 아니, 많이… 그게… 그러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숨 하나하나가 버거워 보였다.
“네 얘기 들으면서 나, 정말 많이 놀랐어.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머릿속이 새하얘졌어.”
의조의 말은 숨을 고르는 듯 이어졌다.
“그동안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걸 내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너무 미안했고. 내 앞에서 그렇게 울고 있는데… 난 아무것도 못 했어. 그게… 너무 아팠어. 진짜.”
정리되지 못한 문장들이 엉키면서도, 지금 이 말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설화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이 살짝 번져 올라왔다.
“의조야… 미안해.”
그 한마디에, 의조는 더는 견디지 못했다.
“그 말 좀… 그만하면 안 돼?”
“….”
“네가 나한테 ‘미안해’라고 말하는 거… 나 진짜 무서워. 그 말 들으면, 머리고 마음이고… 울렁이다 못해 뚝 하고 다 무너지는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디까지 무너져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목소리가 떨렸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의조야… 괜찮아?”
설화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려 했지만, 멈췄다. 안절부절못하는 그 애의 모습에 사내는 위태롭게 부여잡고 있던 자신을 내려놓았다. 주저앉으려는 감정을 다시 붙잡아 일으킬 힘이 없었다. 그 순간부턴, 억지로 억누르려 하던 목울대가 울컥울컥 올라오면서, 눈앞의 시야가 부얘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떠나면, 너 진짜 떠나버리면… 남아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해?”
설화가 고개를 들었다.
“의조야… 그건….”
서 있는 길목엔 가로등만이 둘을 향해 은은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불빛 아래에서, 사내는, 그 애가 받아줄 수 없는 고백을 했다.
“나도… 너 좋아했어. 내 스무 살에도 네가 있었으면 좋겠을 만큼. 정말로… 좋아했어.”
설화의 눈동자가 커졌다.
오래도록 꺼내지 못한 문장이 마침내 터져 나온 곳에서, 사내는 참아온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잔뜩 힘을 준 얼굴에,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너무한다, 너무 슬프다.
왜 하필 이렇게 흘러가는 건가. 내가 널 좋아하는 게 그렇게 욕심이었을까.
설화에게 말하려는 목소리가 자꾸만 미어져서 나왔다.
“지수 집에서 같이 영화 봤던 날 기억해? 설화 네가 길을 잘 몰라서 내가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했었잖아. 실은 그때… 바래다주면서 너한테 고백하려고 했었어. 그런데… 설화 네가 집과 가까워지는 골목에서 나한테 말해줬어. 지수를 좋아한다고. 그 말을 듣는데 한 순간에… 내가 할 말이 다 사라지더라. 어떻게 해야 하지, 난 그럼 어쩌지. 모든 게 그냥… 다 너무 복잡했어.”
설화는 고개를 숙인 채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사내 역시도,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들이 아니었다. 어디로 떨어지는지 알 수 없는 겨울 하늘의 별똥별같이, 사내의 문장은 위태롭게 그 애 앞에서 추락했다.
“설화야. 네가 나한테 도와달라고 했던 말… 나는 그걸… 진심으로 들어야 했는데… 사실은… 그 말 뒤에 숨어서 네 마음을 조금이라도 나한테 돌릴 수 없을까… 그런 생각만 했어.”
“…미안해, 의조야. 너한테까지 상처 줄 마음은… 정말 아니었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라서… 미안해.”
의조는 애써 손질했던 머리를 그대로 헝클어 버렸다. 그 동작 하나에, 지금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설화가 자꾸만 자신을 탓하는 게 견딜 수 없었다. 잘못은 어디에도 없는데, 왜 자꾸 미안해하는 거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떻게든 애를 써도 또다시 울컥이기만 하는 자신이 있었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스스로를 자책하지도 말고. 넌 그냥… 네 감정에 솔직했을 뿐이야. 그건 잘못이 아니야.”
자신을 올려다보는 앳되고 슬픈 얼굴에게 말했다.
그제야 의조는 알았다. 아마 오늘이… 정말 마지막일 거라는 걸. 그 생각이 닿자,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내렸다. 이별이란 건, 이렇게도 사정없이 찾아오는 거구나.
단지 내 어린 날의 한 기억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지키고 싶을 정도로 설화가 소중했으니. 그런데 왜… 남이 되어야 하는 걸까. 정말 너무한다. 너무하도록 슬프다. 사내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히려… 미안해야 하는 사람은 나야. 정말 아무 잘못도 없는 네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나… 그거 보는 게 너무 힘들어. 진짜 아파. 내가… 내가 잘못한 거야.”
굳은살이 곳곳에 박힌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눈물이 반도 거둬지지 않았다.
“내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네 마음도 소중하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사랑이라는 이유 하나로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마음은 행복했던 만큼의 아픔을 짊어야 했다. 의조는 그게 되지 않았다. 심하게 아프기만 해서, 손으로 몇 번이고 눈물을 지워보려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루 사이에 어른의 나이가 됐어도 그는 아직 소년이었고, 그 애는 아직 소녀였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렸고, 다른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앞에서 져내리는 걸 보고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할뿐더러, 되려 그런 자신이, 그 사람 앞에서 똑같이 져내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설화야.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너를 탓하지 마. 원망해야 한다면 나를 원망해. 그게… 맞아.”
설화는 의조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명을 유지하고 있던 골목이었다.
열아홉의 첫사랑이 그곳에서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