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VU Amsterdam)의 과거와 현재
휴학과 자퇴, 그리고 재입학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통과한 후 나는 드디어 학부 생활을 마쳤다. 내가 최종적으로 졸업장을 받은 학교는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자유대학교 (Vrije Universiteit Amsterdam), 우리에게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운 대학”으로 알려진 곳이다. 나는 신학을 전공하진 않았고, 평소 관심이 많았던 역사와 국제학, 또는 국제사(International History)라고도 불리는 학제적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는 네덜란드가 예전부터 유럽 곳곳에서 피난처를 찾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며 특유의 ‘관용 제국’ 문화를 형성하고, 세계대전 당시에는 중립국으로서 전쟁과 평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자리 잡혔다는 사실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지금 변화하는 세계 질서를 연결 지어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커리큘럼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여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지난 3년 간의 나의 학부 생활을 쭉 돌아보면, 네덜란드 교육 분위기상 내가 특정하게 “이 나라” “이 학교” 혹은 “이 학과”에서 공부하는 이유에 대한 성찰을 할 기회가 많았다. 네덜란드는 대학 간의 서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각 학교마다 특성화되어 있는 분야가 뚜렷하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런 교육 시스템도 내가 “무엇을 배우기 위해 이곳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필수적으로 만드는데 한몫한다.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하며 들었던 수업 중 “지식의 역사”라는 2학년 교양 강의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자유대학교 인문학부 학생이라면 필수로 들어야 했던 수업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10-15명씩 나눠서 듣는 세미나 수업들과는 달리 이 수업은 꽤 규모가 큰 강의실에서 진행되었다. 처음 봤을 때 “지식에도 역사가 있어?”라는 막연한 질문만 떠오르던 수업 이름이었는데, 학기가 끝나갈 무렵쯤 나는 묘한 짜릿함을 느꼈다. 내가 매일 접하는 공부의 내용, 커리큘럼의 형태, 연구 방법론, 그리고 내가 몸 담고 있는 대학의 구조까지. 지금의 내가 하고 있는 지식 습득의 환경이 모두 어디서 출발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내 앞에 놓이게 되었는지 배웠다. 300 BCE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부터 시작해서 각 시대마다 지식이 축적되고 기록된 형태의 변화가 특히 눈에 띄었다. 수업에서는 당시 사라졌던 그리스 고전 문헌들을 발견하고 재해석했던 아랍 아바스 왕조(750-1258CE) 학자들의 번역 운동(Abassid Translation Movement)을 시작으로 중세 수도원 중심의 지식 전달, 도시의 발달에 따른 대학이라는 새로운 교육 제도, 17-18세기 “편지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라 불리던 당대 서구 남성 지식인들의 장거리 지식 공동체, 박물관 문화의 등장 등을 하나의 타임라인처럼 쭉 훑었다.
19세기부터는 서구 유럽 고등 교육 시스템에 개혁이 일어나면서 ‘근대적’ 대학 제도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소수 엘리트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대학 교육이 기존의 전통적인 모습에서 탈피하여 폭발적인 인구수의 증가와 산업/기술의 발달로 인해 평범한 학생들을 위한 배움터의 모습을 띠게 된다. 그리고 1880년, 낯익은 이름과 얼굴이 강의 자료에 등장했다. 우리가 흔히 알 듯, 점점 대중화되는 대학 교육의 물결 속에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새로운 형태의 종합 대학을 세웠다. 당시 병립화(pillarization)된 네덜란드 사회 속에서 “칼빈주의 기둥”의 지도자였던 카이퍼였지만, 그는 단순히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 전문대학이 아닌 교회와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종합 대학을 짓기로 했다. 신칼뱅주의를 기초로 하는 대학 교육을 통해 과학적 사고력과 기독교 세계관은 서로 긴장관계에 놓여 있지 않음을 드러내고자 했고, 그 결과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육관을 오랜 기간 연구하신 교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기초로 세워진 대학들은 자유대학교의 초기 비전을 모델 삼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분위기는 잠시, 바로 다음에 이어진 강의 자료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빨간 글씨로 적혀있었다.
물론 (우리나라와는 달리) 빨간 글씨라고 해서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아니었다. 교수님께서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들을 던져주셨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20세기 이후 자유대학교가 거쳐온 변화와 세속화의 역사 이야기가 쭉 이어졌다. 1886년 개혁교회가 분리되면서 카이퍼 중심의 애통파 (Doleantie, 돌레안시) 교회들이 목회자를 배출하기 위해 자유대학과 긴밀한 연결고리를 이어간 이야기, 1895년 자유대학교 법학과 교수였던 로우만 (A.F Savornin Lohman)이 당시 반혁명당의 지도자였던 카이퍼와 보통 (남성) 선거권 문제로 정치적 갈등을 겪어 결국 파면당했던 이야기, 1905년 교육법 개정안에 맞춰 학교 구조를 바꿔야 했던 이야기 등등. 영상 자료 속에는 지금 우리가 거니는 캠퍼스에 1960년대 깃발을 든 학생들이 뛰어다니며 대학 의회와 이사회의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 시위 운동의 한 장면이 담겼다. 그리고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국가 펀딩에 경제적 의존을 하기 시작하고 2015년에는 “개신교적 뿌리에서 시작되었지만 (…) 이제는 정의, 인류애, 서로와 대한 책임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 기여”를 목표로 삼는 학교로서의 변화된 정체성을 선언하기까지의 과정이 읊어졌다.
이제 자유대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세속화된 나라 중 하나인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그대로 이어받아 연구와 교육을 하는 곳이 되었다. 학생들과 교수진들 중 기독교인은 찾기가 힘들고, 교내에는 무슬림 학생들을 위한 기도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학교 자체 퀴어 축제를 열기도 하고, 기존의 예배실은 모두 ‘다종교실(multi-faith space)’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여전히 학교의 신칼뱅적 배경의 역사, 카이퍼의 철학, 그리고 대학의 성장 과정 속에서 학교의 정체성과 교육관을 위해 벌어졌던 첨예한 논쟁의 순간들을 촘촘히 배운다.
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 따라 때로는 굳건하게 학교의 철학을 지켜냈지만 때로는 (조금은 비겁하게)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던 학교의 발가벗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알게 되었다. 변화는 무조건 좋을 수도, 그렇다고 무조건 나쁠 수도 없다. 나는 오히려 신칼뱅주의 교육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해낸 자유대학교가 그 나름의 사회정치적 맥락 속에 어떤 고민의 과정을 거쳤는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그태도에 큰 감흥을 느꼈다.
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아무리 대학에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나열한 교육을 제공하려 해도, 결국 지식 습득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인 선택과 삭제, 집중과 간과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는 수밖에 없다. 지식을 얻고 습득하는 과정에 대한 날카롭지만 애정 어린 시선을 간직하고, “내가 배우는 지식은 어디에서 왔을까?”를 되묻고 성찰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올곧지만 입체적인 눈초리로 바라보며 정직하게 발견하려 노력한다. 결국 이것이 내가 배움을 지속하는 이유이자 목적, 그리고 기쁨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