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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잡남 May 08. 2019

#15. 세상을 좀 더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

미움받을 용기에 대해서

   제법 유명한 책이었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관심도가 사라져서 읽지 않았던 책이다. 그런데 어제 서점에서 나의 눈을 사로 잡았다. 그리고는 앉아서 2시간 안에 삽시간에 읽어 내려갔다.


  그 중 감명깊게 읽었던 구절들을 중심으로 책에 대한 내용을 적어보려 한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듯한 이 책에서 첫 번째 중요글귀는 경험에 의해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즉,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이야기한 '트라우마'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겪은 일들이 내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것들을 내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하면 새롭게 탄생할 수 있다고 책에서는 이야기한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의 과거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거가 앞으로의 나의 삶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 과거로부터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실수한 것에 대한 예방책을 얻을 수 있다는 것뿐이다.


큰소리를 내기 위해 화를 낸다.


  우리는 일이 풀리지 않거나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면 화를 내고 분노를 표출한다. 화가 났기 때문에 큰소리를 내도 된다고 자기합리화를 통해 상대방에게 큰소리를 전달하기 일쑤다. 그러다 보면 상대편이 큰소리를 당장에는 들을지 모른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앙심을 품고 복수의 칼날을 갈기시작한다는 점이다. '언젠가는 내가 당신에게 큰소리를 내겠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큰소리를 내기 위해 화를 낸 것이라는 것은 '원인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말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납득 불가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화내지 않고서도 해결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나를 포함한 수 많은 이들은 환경 탓을 할 때가 많다. "내가 금수저였다면 지금처럼 고생하지 않을텐데"라던가 "내가 키가 10cm만 컸으면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을텐데" 라던가 "내가 존경을 받으면 행복할텐데" 등등. 무엇이 주어졌는가에 대한 관심도만 높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이것이 없어서 할 수 없어', '내가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건 내 환경탓이야!'라고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아프리카에 있는 삶이 힘든사람들더러 그냥 만족하라는 소리야?'라는 뚱딴지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미움받을 용기에서도 정확히 비슷한 이야기를 청년이 철학자에게 물었다.

  이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의견은 '지금 너의 삶을 돌아보라'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되면 직접가서 물 한모금 내가 가진 것으로 나누면 된다. 

  당신의 삶 자체도 힘든 판국이라고 했을 때 그럼에도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면 간접적으로라도 누군가를 통해서 필요한 것을 전달하는 편이 훨씬 낫다. 먼나라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가져와서 당신에게 주어진 것을 탓하기 위한 합리적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결국 우리는 선택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고 무방하다. 주어진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좀 더 고민한다면 적어도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는 식의 핑계를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서이다.


  변한다는 의미는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다. 본질적인 내가 가진 성격들과 생각을 바꾸어 나간다는 것이고 내가 익숙치 않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사람은 관성에 따라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음에 있다.


나인채로 생활양식을 받아 들여라.


  나라는 존재가 가진 생활양식에 문제가 있구나! 혹은 나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스스로를 받아 들여야 변화할 수 있다.


우리의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다.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 거리를 삼기 시작한 상태


  누구든지 개개인마다 열등감이 하나둘씩은 지니고 있다. 지금은 코가 큰 것이 자랑스럽지만 이전에는 얼굴에 비해 코가 좀 커서 콤플렉스였고 작은키가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재밌는 것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코가 큰게 객관적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코가 커서 생길 수 있는 단점에 대해 말하라면 어떻게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반대로 장점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게 될 수도 있다.

  단점도 장점도 될 수 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 되어질 수 없다. 객관적 사실이라는 건  '코가 큰 것은 단점이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출발해야 하는데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명제가 생기게 되니 주관적 견해라고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키의 경우도 마찬가지. 책에서의 철학자는 155센티이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는다. 철학자가 친구에게 '내가 10cm만 더커야 하지 않을까'라는 식의 이야기를 건네자 친구가 답하기를 '말도 안되는 소리다. 155cm이긴 해도 너는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철학자는 그 때 깨달았다. 키가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목소리가 '키 작은 건 별로야 좋지 않아'라고 주관적 해석을 곁들이고 있음을 말이다. 어떤 콤플렉스가 당신에게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주관적 견해인 만큼 스스로 정의를 다시 내리기를 추천한다.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
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


  열등감은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타인과 비교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나보다 저친구가 더 뛰어난걸...' '나는 보잘 것 없어' '나는 늘 왜이러는 것이지?' 라는 식의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을 열등감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건전한 열등감은 이와 같은 것이다. 가령 '작년에 나는 기타로 한 곡 밖에 연주하지 못했군. 올해는 작년보다 더 나은 실력을 길러야 겠다.' 처럼 과거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도록 뛰어갈 수 있는 동기를 부여 하는 것이 바로 건전한 열등감이다.

인간관계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옆 친구가 나의 경쟁상대라고 생각하거나 나와 친한 친구가 경쟁상대라고 생각해 버리게 되는 순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상대방이 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니 상대방을 음해하거나 뒷담화를 통해 상대방을 깔아뭉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버리는 순간 영영 '그'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뒷담화와 소문을 퍼트렸음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잘 나가는 상대로부터 경쟁심리가 아니라 분노의 감정을 갖게 될 수 있다. 이는 저질러서는 안되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혹은 죽기를 바라는 무서운 상상이나 현실까지 이어지게 된다. 

  결국 평생 불행함 속에 갇혀 지내게 되는 슬픈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 밖에 없는 문제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 : 공동체감각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고 나름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며 삶을 살아간다. 1인 가구가 대세라고는 하지만 어떤 루트를 통해서든 사람은 공동체에 속해 있다. 가족이든 친구든 동호회든 교회든지간에 혼자서 잘 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마다 각자에게 인생의 과제가 주어지는데 이는 타인에게 공헌할 때 과제를 발견하게 된다.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공헌하는 가치를 추구할 때 인생의 과제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일맥상통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사랑하라.


   혹시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고 공동체의 삶을 누리고 싶다면 공동체가 주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획득하는 것이야 말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지름길이다.


관계가 깨질까봐 전전긍긍하며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사는 부자연스러운 삶이다.


  꼭 나한테 하는 말 같았다. 누군가에게 호감이 있으면 사랑을 표현하고 고백하면 된다. 정말 단순한 진리지만 서로의 관계가 깨질까봐 또는 공동체 내에서의 관계들이 흐트러질까 무서워 나 스스로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내 삶에서 내가 최선을 다한게 아니라 타인을 위해 부자연스럽게 삶을 살기로 결정한 것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나와는 관계 없다.
나부터 시작하라.


  책에서 말한 내용을 내 친구에게 동료에게 수백번 말해도 협력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그렇다고해서 아무도 시작하지 않으면 관성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누구라도 시작해야 하므로 나 스스로가 변화할 것을 약속하며 좀 더 나은 자 자신이 되기 위해 새롭게 선택해 나가고자 한다.

 책을 보면서 감동이 실려 있었던 것인지 생각보다 리뷰보다는 감상문에 가까운 글을 적게 되었다. 왜 베스트셀러인지 지금에서야 알 것 같은 기분이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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