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과거의 방식으로는 미래를 살아갈 수 없다.
아직도 과거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고 있다. 학부모들은 학교에 가지 못해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서든 학교 수업을 따라가게끔 수업을 시키고 있다. 2.5단계에서는 위험하니 보내지 않았던 보습학원을 2단계로 내려가니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왜냐하면 코로나 19로 인해서 모든 사물이 연결이 되고, 내가 필요한 지식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세계에서 먹히지도 않는 오래된 교과서로 아이들을 교육하기 때문이다. 20년 전쯤에는 토론과 생각을 키워내는 방향으로 아이들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앞서가는 교육이었다.
이제야 학교는 토론, 논술을 중심으로 교과목을 변경시키면서 과도기에 들어섰다. 18년 전에 앞서가던 방식을 20년이 다된 지금에서야 도입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코로나가 터졌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날로그 세계에 갇혀 있던 선생님들이 갑작스레 디지털로 넘어와야 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아이들이 아날로그 세계에 머물러 있던 선생님들의 수업이 재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는 초, 중, 고, 대학교를 막론하고 모든 학생들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즉, 학교가 경쟁력이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로 귀결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된 걸까?
이에 대한 3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을 하고자 한다.
권력이 사라졌다
코로나 19가 터지면서 아이들이 집에 머무르게 되는 시간이 길어졌다. 5일 중에 길면 하루, 짧으면 이틀 정도만 학교에 등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사람은 오래 머무는 곳에 금세 익숙해지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주 5일을 학교에 있을 때에는 학교의 룰을 따랐다. 그러나 현재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자유롭게 수업을 시청할 수가 있다.
그 이야기 즉슨 학교의 권력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유현준 교수님께서 세바시에서 그리고 다양한 매체에서 늘 이야기를 해왔던 내용이다. 학교의 구조에 대해 생각해 보면 쉽다.
외국학교의 모습이지만, 한국의 학교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양새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조금 바뀐 게 있다면 초등학교는 좌석이 적고 모둠활동을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결국에 아이들은 어디를 향해 앉아 있든지 앞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선생님은 칠판을 등지고 앞을 바라본다. 대략 20명가량의 아이들이 앞을 바라보게 되므로, 알게 모르게 선생님의 권력이 강해지게 된다. 설령 체벌을 하지 않더라도 이는 변함이 없다. 모든 시선이 앞을 바라보게 되므로 선생님에게 권력이 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업이 재미가 있건 없건, 질이 좋건 나쁘건 간에 아이들은 반항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선생님의 한 마디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의 형태는 온라인 수업이 길어지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어떤 학생은 온라인 강좌를 켜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귀찮고 별로지만 학교 출석을 위해 수업을 빠르게 듣고 숙제를 마치는 학생들도 늘어나고 있다.
학교에서 1시간 넘게 걸리던 일들을 집에서 30분 안에 해치우게 된 것이다. 일처리 하는 시간이 빨라지니 개인의 시간이 훨씬 더 늘어나는 것이다. 또, 7시면 일어나서 8시 30분이나 50분까지 출석을 해야 하는 자유가 없는 삶에서 8시 50분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수업을 들어도 되는 자유가 생겼다.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하고, 이야기를 하지만 교실에서 만큼 의 권력은 느껴질 수가 없다. 1:1로 전화를 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수업이 재미없다고 느껴지면 듣지 않아도 무방한 시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교육을 온라인에서 접할 수 있다
또 다른 변화는 바로 모든 교육을 학생들이 온라인 상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을 직접 유튜브에서 검색하여 들을 수 있고, 스스로 학습이 가능하다. 수학에 관한 지식이 궁금하다면, 수학에 관련된 강좌를 검색하면 수백수천 개가 검색이 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설명하던 느릿느릿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직접 본인이 수업을 골라서 재밌는 강좌를 듣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디지털 세계가 지금처럼 확장되기 이전에는 선생님의 지식 전달이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고 업무였다. 그 업무가 온라인 강의로부터 밀려나게 되었다.
코로나 19가 터지고 온라인 세계가 펼쳐지면서 선생님들의 강의가 온라인 세계의 강사보다 실력과 재미가 부족하다는 것을 학생들이 알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현상은 대학교에서 가장 심각하게 두드러졌다. 교수들이 올리는 강좌가 단돈 2만 원을 주고 듣는 강의보다 못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 수업으로 자신의 실력을 기르는 것이 아닌, 온라인 세계의 강좌를 듣고 대학교는 단순히 학위를 취득하는 곳이 된 것이다. 이는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게 나타났다. 오래전부터 스타강사로 유명했던 강사들의 강의를 듣고, 얼마든지 자신이 필요한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즉, 학교의 선생님들은 온라인 세계의 강사들과 붙게 된 것인데, 온라인 강의에 있어서 당연히 학교 선생님들이 밀려나버렸다. 콘텐츠를 제작하고 편집하고 업로드를 해보려 하지만 오랜 기간 아날로그에 익숙해진 선생님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노예를 만드는 학교 교육
사실상 학교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노예를 양성하는 교육이라는 사실이다. 코로나 19가 터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오전 8시 30분까지 학교를 가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왜 8시 30분까지 가야 하는가?','일찍 일어나는 게 좋기에 학교에 가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일찍 일어나는 게 좋다면 단순히 집에서 일찍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왜 학교에 정해진 시간에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저 나라에서 하라고 하니 했을 뿐이다. 학교가 아이들을 관리하기 편한 시간대에 강제로 불러들인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기계가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교육이랍시고 아이들을 기계가 할 일을 대신하게끔 만드는 강제적인 룰과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8시 30분까지 등교를 하고, 40분을 수업하고 10분을 쉰다.' 이 얼마나 기계적인 노예를 만드는 발상인가. 이 방식은 공장을 운영하는 방식과 같다. 제조업 회사에 취업을 해보면 알겠지만, 기계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운영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교체를 하거나 손을 봐야 하는 시간은 몇 시인지 스케줄을 짜게 된다.
학교의 룰과 법칙은 공장의 기계를 돌리는 시간을 정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아이들과의 사교성을 위해서 학교를 보낸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보면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도 의심스럽다. 똑같은 죄수복(?)인 교복을 입히고 똑같은 밥을 먹는데 무슨 정상적인 교류가 있겠는가?
교도소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교도소에서 살아남는 놈은 강한 놈만 살아남는다. 약육강식의 세계다. 그 세계의 모형이 그대로 학교에서 펼쳐지는데 어떻게 사교성이 길러지겠는가? 자유가 박탈되고, 힘이 약한 자는 짓밟히는 모습이 어떻게 사교성을 기르는 장이란 말인가?
똑같은 교과서에 똑같은 내용을 배우고,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받으니 여러 분야를 합성해야 하는 4차 산업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유연한 생각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지는 삶을 선택당하는 것이다. 자유도 없고, 유연한 사고도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누군가 말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삶이 과연 주인의 삶일까? 그러니 학교 교육은 결국 노예를 양성하는 교육인 것이다. 다행히, 코로나 19가 터졌고 아이들은 주 4일이라는 시간을 얻었다. 온라인상에서 수업을 켜놓고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되는 자율성이 주어졌다. 적어도 고급 노예가 되는 길을 가지 않아도 되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아마도 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너라는 놈이 좋은 대학 못 가고
좋은 직장 못 가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 아니냐?
라고 말이다. 좋은 대학은 못 갔고 좋은 직장은 못 갔지만, 좋은 대학에서 온라인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좋은 직장 내부에서 교육을 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내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 나는 전혀 열등감을 느끼고 있지 않다. 다만, 내가 받았던 초, 중, 고 시절의 교육은 솔직히 심하게 말하면 '쓰레기 교육'이었다. 지금 내가 먹고사는 모든 일들은 내가 하고 싶어서 선택했던 강의와 노력으로 얻어진 산물이다.
자유가 주어진 대학생 시절에 영상편집을 고수하며 공부를 했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발생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했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돈을 벌어서 이곳저곳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깨우쳤다.
그렇게 자유롭게 살았더니,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됐고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30이 훌쩍 넘은 시점에 내가 굳이 학벌에 대해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필요하면 돈 주고 다시 들어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내가 열등감을 느낄까? 대기업에 들어가도 40대 중반이면 해고가 되는 마당에 대기업을 부러워할 필요가 있을까? AI와 로봇이 곧 대체하게 되는 '사'자 직업을 부러워할까? 나는 그 시간에 차라리 내가 호기심이 생기는 일들을 하면서 나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게 훨씬 더 즐거운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워낙에 자유롭게 살아왔던 나이기에 지금의 학교 교육과 사교육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실정이다. 아이들은 자유를 갈망하고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그런데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학교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은 디지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과 갭이 이미 커져 버린 상태다.
그 갭을 줄이는 아이들과 선생님과 부모들은 다가오는 기회의 파도에 올라탈 것이고, 갭을 줄이지 못하는 아이들과 선생님과 학부모들은 가라앉고 말 것이라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