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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대리 Oct 13. 2022

영어 공포증이었던 내가 글로벌 무대에 서기까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시작할 걸’ 생각하는 게 있나요?

“여기 영어 통역 가능한 사람 없나요?”


바비브라운 신상 파운데이션 론칭 행사에서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바비브라운 미국 본사의 수석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초청해 한국 수석 아티스트와 함께 메이크업 시연을 하는 행사에 통역이 갑자기 공석이 된 것이다. 그 모습을 무대 아래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만약 내가 지금 한국 수석 아티스트라면 무슨 기분일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내 인생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

평소 후회를 별로 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고등학교 3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시기다. 노는 것도, 공부도 어중간하게 하며 고등학교 2년을 보낸 뒤 3월 모의평가 점수를 받아 들고 처음 든 생각은 “그동안 나 뭐했지?”였다. 3월 모의평가 점수가 곧 수능점수라는 말이 있다. 이대로라면 4년제 대학도 어려워 보였다. 나는 아직도 가끔 고3이 되는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 당장 내일이 수능인데 나는 개념 공부를 하느라 울고 있다. 수험생 시절, 선생님과 주변 친구들 중 누구도 나에게 미리 수능 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 (라고 핑계를 대본다.) 수능은 고3 때 준비하면 되겠지,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개념부터 다시 잡아야 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정말이지 그때는 인생이 내게 등을 돌린 기분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운 좋게 수시로 내 성적에 비해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나름 내가 살던 지역에서 두 번째로 좋은 학교여서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대학 생활만큼은 고등학교 때처럼 어영부영 보내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정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지방대 타이틀로 시작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생각에 무조건 높은 학점으로 졸업하겠다는 목표가 생겼고, 다행히 좋은 조언을 해주는 선배들을 만나 성적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녔을 정도로 상위권을 유지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터닝포인트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나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영어라는 놈이었다. 지금도 수능 영어를 어떻게 봤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대학교 기본 영어 회화 교양 강의에서도 헬로, 하이 정도의 간단한 인사만 하고 영어를 쓸 자리는 필사적으로 피했다.

영어 공부에 결정적으로 불을 지핀 순간은 바비브라운의 신상 론칭 행사 날이었다. 군 제대를 하고 바비브라운 대외 활동을 했는데 신사동에서 열린 파운데이션 론칭 행사에 대학생 서포터즈로서 참석하게 됐다. 바비브라운은 외국계 기업이다 보니 직원들이 기본적으로 다 영어 회화가 가능했고, 행사장에서 한국인 직원들이 외국 고객님에게 영어로 응대를 하고 자유롭게 소통하고 있었다. 행사의 클라이맥스는 미국 수석 아티스트와 한국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동시에 메이크업 데모를 하는 코너였다. 그날 동시통역에 문제가 있어서 결국 마케팅 부장이 급하게 한국과 미국 아티스트 사이에서 통역을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유능해 보였다. 내가 운이 좋아서 바비브라운의 직원이 된다고 해도 영어를 못해서 외국계 회사에서 진땀만 흘리고 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공부를 피하려다 고3 때의 악몽이 또 일어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영어 공부를 늦추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휴학 중 월스트리트 잉글리시 영어 학원 6개월치를 결제했다. 하지만 학원만으로는 곧 한계가 찾아왔고, 어학연수를 가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영미권으로 어학연수를 가기엔 기초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영미권에서 어학연수를 할 돈이 없었다.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하니 발음 이상해진다, 공부 절대 안 한다는 등 주변에 말리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갓 제대한 24살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내가 어학연수를 갔던 곳은 필리핀 바기오라는 지역으로, 지금 내 영어 베이스는 다 필리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평일에는 외출도 못하고 출석 체크도 힘들게 하는 스파르타식 어학원에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마인드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2개월 동안 독하게 영어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 교내 영어 스터디도 나가고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한 학기를 미국에서 보내는 등 1년 반 정도 영어에 투자를 하고 나니 어느새 영어가 내게 들어와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26살에 취업 준비를 하며 토익을 약 2 달 정도 공부를 했다. 세상과 단절된 채 그때도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2015년 2월을 기점으로 마지막 토익 시험을 봤는데 그때 받은 점수는 아직도 나에게 밑기지 않는다. 914점. 항상 내 토익 목표 점수는 870점이었는데!

영어라는 베네핏을 얻고 나니 정말 많은 게 달라졌다. 아모레퍼시픽 글로벌 메이크업 아티스트 포지션에 지원했을 땐 영어로 스피치를 하면서 메이크업을 하는 영어 면접이 있었고, 입사 후에도 업무적으로 영어를 쓸 일이 많았다. 이제는 바비 브라운 행사처럼 미국 아티스트와 함께 시연하는 무대도 두렵지 않다.




어른들은 종종 ‘그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나에겐 특히 영어가 ‘그 나이 때 했어야 하는 것’이라 진하게 후회가 남는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제대로 해두었다면 20대에 1년 반을 그렇게 쏟아붓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고 아쉽고, 나이가 들어서 영어 공부를 하려니 공부를 1순위로 둘 수 없는 환경이기도 하다. 물론 체력과 암기력도 예전만큼 안 따라준다^^

하지만 비단 영어뿐일까? 영어는 하나의 예시일 뿐, 내가 20대 때 놓쳤던 것들 중에 나를 두고두고 피곤하게 만드는 게 있을까 봐 종종 소름이 돋곤 한다.

30대 혹은 나와 동년배인 33살인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어른들이 지금 나이에 하라고 하는 것들을 귀담아 들었으면 하는 것이다.

혹은 나보다 조금 더 먼저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이 되는 지인들이 있다면 예의를 갖춰 물어보자. 그 사람 또한 당신을 아낀다면, 솔직하게 진솔한 이야기를 많이 해 줄 것이다. 롤모델이 있다면 그들에게 조언을 얻고 실천에 바로 옮기자.


마지막으로 다소 꼰대스러운 말이지만 나의 뼈아픈 경험으로 꼭 말해주고 싶다.

“해야 하는데… 하며 미루는 공부가 있나요? 지금도 늦었습니다. 당장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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