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사는 멋이고 재미 아닐까.

중년부부의 주말 놀거리(?)

by 김태선


주말이면 늘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앞섰다.

밀린 집안일을 하거나, 어디라도 나가야 제대로 쉰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런데 이번 주말은 조금 달랐다. 남편과 함께 텃밭에 나갔다.

올해 농사의 시작이다.


장날에 들러 모종을 고르는데, 괜히 마음이 들떴다.

수박, 참외, 토마토, 고추, 애호박, 가지, 각종 쌈채소, 대파 모종까지

이것저것 욕심내서 담다 보니 어느새 3만 원이 훌쩍 넘었다.

모종 한 개가 몇 백 원 정도이니 3만 원이면 꽤 많은 양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걸 다 언제 키워?” 하며 망설였을 텐데,

요즘은 그런 생각보다 “이걸 키우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기대가 더 크다.

올해 유독 더 모종에 욕심을 내는 이유가 있다.

올 11월 결혼하는 아들내외가 주말에 텃밭에 와서 이것저것 따서 먹고

재미를 느껴보라는 얘기를 해둔 때문이다.

텃밭에서 30분 정도 거리이니 바람도 쏘이고

처가에도 싱싱한 채소나 과일을 나눠드릴까 하는 작은 바람으로.

물론 사서 먹는 것이 편하지만, 무농약으로 우리의 정성이 깃든 맛과 비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밭에 도착하니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땅을 고르고, 고랑을 파고, 비닐을 씌우는 일까지… 힘든 일은 거의 남편 몫이었다.

나는 옆에서 모종을 건네고, 흙을 살짝 덮어주고 물을 주는 정도였다.

물과 풀 담당이 내 몫이다.

지난주에는 사과나무 사이에 난 풀들을 엄청나게 뽑았다.

풀멍의 시간을 오롯이 보냈다.

풀 뽑기 선수가 된 지 오래다. 이것저것 잡풀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다. 뽑아야 한다.

뽑고 뽑고 또 뽑다 보면 풀밭이 정원으로 바뀐다.

그마저도 얼마 못 가지만... 농사일은 풀 뽑는 게 전부다.


"주말에 집에 있어봐야 뒹굴뒹굴하면서 TV나 핸드폰 볼 텐데.. 바람도 쏘이고 흙도 만지고 힐링되지?"

"그럼, 그럼.. 힐링하러 가는 거지..."

남편과 둘이 쿵짝쿵짝 궁합이 맞다.

텃밭에서 즐기는 그 시간 자체가 참 좋고 즐긴다.

텃밭2.jpg 텃밭에 심은 작물들.. (26. 4.26)

흙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오고, 바람이 살짝 불어오는 그 순간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도시에서 바쁘게 살다 보면 잊고 지냈던 감각들이, 그날은 하나씩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라디오를 켜두었더니 ‘보랏빛 엽서’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를 들으니 괜히 마음이 차분해졌다.

젊은 시절, 이유 없이 센티해지던 날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때는 이별의 노래가 더 크게 와닿았는데, 지금은 그저 지나온 시간들이 담담하게 느껴졌다.


보랏빛 엽서에 실려온 향기는

당신의 눈물인가 이별의 마음인가

한숨속에 묻힌 사연 지워 보려 해도

떠나 버린 당신 마음 붙잡을 수 없네

오늘도 가버린 당신의 생각엔

눈물로 써 내려간 얼룩진 일기장엔

다시 못 올 그대 모습 기다리는 사연

- 보라빛 엽서 가사 중에서


다시 들어도 너무 아름다운 노랫말이다. ㅠㅠ


장례식2.jpg

아무튼.

모종을 하나씩 심고 나니 밭이 조금씩 채워졌다.

아직은 작은 잎사귀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제법 그럴듯한 모습이 되겠지.


생각해 보니 우리 삶도 그랬다. 처음부터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씩 쌓아온 시간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몸은 조금 피곤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하루를 잘 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무언가를 ‘해냈다’기보다, 그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게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꼭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이렇게 흙을 만지며 시간을 보내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며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하루라고.


텃밭에 심어놓은 작은 모종들이 자라듯, 우리의 시간도 그렇게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 같다.

이 또한 사는 멋이고 재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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