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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호 Sep 25. 2017

20

주인장은 나를 주방의 접시닦이로 일하게 했다. 업무는, 접시 닦기, 주방 청소, 야채 준비, 차와 커피 끓이기, 샌드위치를 만들기, 간단한 조리, 잡심부름등 이었다. 고용조건은, 다른 곳과 다름없이, 500 프랑의 월급과 식사였다, 하지만 쉬는 날이 없었고 고정된 근무시간도 없었다. 나는 무한한 돈과 양질의 체제를 갖춘 호텔 X를 보았다. 지금은, 러시아 식당에서, 대단히 질이 낮은 식당은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배우게 되었다. 묘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게, 이런 류의 식당이 파리에는 몇 백개나 있었고, 파리의 모든 방문자들은 이런 식당에서 한 번이라도 식사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 하자면, 여담이긴 하지만, 이 러시아 식당은 학생이나 노동자들이 찾는 평범하고 저렴한 식당이 아니었다. 적절한 음식은 25프랑 밑으로는 제공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풍스럽고 심미적인 분위기는, 우리 식당의 사회적 위신을 올려주었다. 외설적 그림들과 노라망디 풍의 장식품들이 술병들 사이에 걸려 있었고-인조 불빛들과 촛대 모양 전등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농노의 도자기도 있었다, 심지어는 입구에 승마 디딤대도 있었다-여기에 주인장과 웨이터들의 우두머리는 전 러시아 장교들이었고 손님들은 떠돌아다니는 러시아 망명자들이었다. 짧게 말해, 우리는 확실히 세련됐었다. 


그럼에도, 주방문 넘어의 상태는 돼지우리나 하기에 적절했다. 주방 배치 덕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방은 세로 15피트에 가로 8피트 정도 되었고, 이 중 절반은 스토브와 식탁이 차지했다. 모든 냄비들은 손도 닿지 않는 선반에 놓아져야 했다, 그리고 쓰레기통도 하나였다. 이 쓰레기통은 오후가 되면 꽉 찼고, 바닥은 통상 1인치 높이의 뭉개진 음식 퇴비들이 쌓여 있었다. 


불이라고는 오븐도 없이, 가스스토브 세 개가 전부였고, 모든 술은 빵 굽는 곳에 빼놓아야 했다.


식품 저장실도 없었다. 식품 저장고를 대신 한 건, 반쯤 지붕으로 덮인 뒷마당에 자라던 한 나무의 그늘 밑이었다. 고기나 야채 같은 식재료들은 맨 땅위에 방치됐고, 쥐 나 고양이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려면 냄비에 물을 끓여야 했지만, 설거지가 쌓였음에도, 음식이 요리될 때는 물 끓일 자리도 없었다, 대부분의 접시는 찬물로 닦여졌다. 부드러운 비누와 파리의 센물로 닦아야 했는데, 기름기를 신문지로 문질러 닦아 내야만 했다. 


냄비도 부족해서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저녁까지 놔두지 못하고, 바로바로 닦아 두어야 했다. 이 것만 해도 한 시간을 잡아먹기도 했다. 


설치비를 제대로 지불치 않은 덕분에, 저녁 8시가 되면 전등이 자주  나가고는 했다. 사장은 촛대 세 개 만을 주방에서 켤 수 있게 허락했다, 하지만 주방장은 세 개는 재수 없다 했다, 그래서 두 개만 켰다. 


우리의 커피 분쇄기는 인근의 술집에서 빌렸고, 빗자루와 쓰레기통은 식당 안내원에게 빌렸다. 첫 주가 지나고 세탁소에 맞긴 행주들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세탁비를 지불 못 했기 때문이다. 식당에 프랑스인이 한 명도 고용되지 않은 것을 발견한 노동 감독관과 문제가 있었다. 사장은 몇 번의 개인적인 면담을 가져야 했고, 내 믿기로는, 뇌물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기회사 직원들은 여전히 빚 독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술 아페르티프를 뇌물로 줄 수 있다는 걸 알자, 매일 아침마다 찾아왔다. 식료품점에도 외상을 지고 있었는데, 만약 식료품점 사장의 아내가(콧수염이 있는 60대 여자였다) 줄스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외상도 끊겼을 것이다, 줄스는 매일 아침 그녀를 달래기 위해 보내졌다. 나 또한 비슷했던 게 매일같이 야채값 몇 닢을 깎기 위해 커머스 거리에서 한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충분하지 않은 자본으로 식당을 시작한 결말들이 이렇다. 이런 조건들 속에서 주방장과 나는 하루 30 접시에서 40 접시를 내가면 될 거라 했었다, 후에는 100 접시를 내보고 있었다. 첫날부터 우리에게는 너무 고되었다. 주방장의 근무시간은 아침 8시부터 자정까지 였고, 나는 아침 7시부터 다음 날 밤 12시 30분까지 였다- 17시간 30분을 일했지만, 쉬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오후 5시까지는 앉을 시간도 없었는데, 이 보다 더 최악은 쓰레기통 빼고는 앉을자리가 없었다. 보리스는 식당 인근에 살았기에 마지막 지하철을 잡아 탈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아침 여덟 시부터 다음 날 새벽 두 시까지 일했다-하루에 18시간, 일주일에 7일을 일했다. 이런 장시간의 업무는, 평범하지도 않지만, 파리에서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이 식당에서의 삶이 고착된 일상이 되자 호텔 X의 삶은 휴가 같아 보였다. 매일 아침 6시에 침대에서 나를 끄집어내어, 면도는 하지도 못 하고, 가끔은 씻었다, 이탈리아 광장으로 달려가서는 전철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싸웠다. 7시 전에는 춥고 더러운 황량한 주방에 있게 된다, 감자 껍질, 고기 뼈들, 생선 꼬리들이 바닥을 덮고 있고,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접시 더미는 일치단결한 모습으로 어젯밤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이 차가웠기에 설거지를 바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우유도 가져오고 커피도 만들어야 했다, 8시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커피가 준비되어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닦아야 될 동으로 된 냄비들도 있었다. 이 동으로 된 냄비들은 접시닦이 인생의 골칫거리들이다. 이 구리 냄비들은 쇠수세미와 모래로 박박 문질러 닦아야 했는데, 개당 10분을 잡아먹었고, 밖에서 브라소 약품으로 광까지 내야만 했다. 천만다행으로, 이 구리 냄비를 만드는 기술이 잊혀 갔고 프랑스의 식당에서는 이 냄비들이 천천히 사라져 가는 중이다, 물론 여전히 중고로는 구매가 가능하긴 하다. 


내가 설거지를 시작할 때면 주방장은 나를 데려다가 양파 껍질을 벗기게 한다, 내가 양파 껍질을 벗기기 시작할 때면 사장이 와서 양배추를 사 오라고 시켰다. 양배추를 사들고 돌아오면 사장의 아내가 볼연지 한 통을 반 마일이나 떨어진 상점에서 사 오라고 시켰다. 돌아왔을 때는 더 많은 야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여전히 접시는 그대로였다. 이렇게 무능함이 각각의 일에 하루 종일 쌓였고, 모든 일이 늦어졌다. 


10시까지는, 일은 비교적 쉽게 흘러갔다, 일은 빨리 했지만, 아무도 성질을 내진 않았다. 주방장은 그녀의 예술가적 기질에 대해 떠들 시간이 있었고, 톨스토이는 대단하지 않냐고 말할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도마 위에 고기를 다지며 듣기 썩 괜찮은 소프라노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열 시가 되면 웨이터들이 점심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점심을 일찍 먹었다, 11시즘이 되면 첫 손님이 들어왔다. 갑자기 모든 것이 바빠지고 성질이 나기 시작한다. 호텔 X에서 처럼 맹렬한 재촉이나 고함은 없었지만, 정신없는 분위기, 사소한 신경전과 분노는 똑같았다. 불편함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주방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접시들은 바닥에 놔둬야만 했고, 사람들은 접시를 밟지 않으려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주방장의 넓은 엉덩이는 그녀가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나에게 부딪혔다. 사람의 신경을 긁는, 그녀의 반복되는 잔소리는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멍청이가 있나! 내가 빨간 무는 짜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비켜요, 싱크대로 좀 가게요! 저 칼들 좀 치워주세요;감자 손좀 봐놔요, 내 거르개로 대체 뭘 한 거예요? 아, 그 감자들은 그냥 놔둬요, 내가 닭 고깃국의 기름을 걷어내라 하지 않았어요? 설거지는 신경 쓰지 말고 이 셀러리부터 잘라요. 아니, 그렇게 말고, 멍청하기는, 이렇게 말이야. 저기 봐! 완두콩이 끓어 넘치고 있는데 그냥 놔둘 거예요! 일 좀 해요, 청어의 비늘을 벗겨야죠. 이봐요, 이 접시가 깨끗해요? 앞치마로 닦아요. 그 샐러드는 바닥에 두고요. 그렇죠, 내가 밟을 수 있는 곳에 그렇게 두셔야겠지! 저기 봐요, 저 냄비 끓잖아요! 저 냄비 하나 내려 주세요.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요. 이건 석쇠 위에 올리세요. 저 감자들을 좀 치워봐요. 시간낭비하지 말고, 그냥 바닥에 버려요. 발로 으깨 놔요. 그리고 톱밥을 조금 뿌려 놓으세요. 망할 바닥이 스케이트장 같네. 저 봐요, 멍청한 사람아, 고기가 타잖아요! 오 신이여,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멍청한 접시닦이를 나에게 보냈담? 말버릇이 그게 뭔가요? 내 숙모가 러시아 백작인 건 알아요? 끝이 없었다.


보통은 열한 시 즘에 정신적 한계를 맞은 주방장의 홍수 같은 눈물을 제외하면, 세시까지는 특별한 차이 없이 지나간다. 세시부터 다섯 시까지는 웨이터들에게는 제대로 된 휴식시간이다, 하지만 주방장은 여전히 바쁘고, 나는 가장 빠른 속도로 일을 하고 있을 때다, 더러운 접시들이 엉켜서는 기다리고 있다, 저녁시간이 시작되기 전, 설거지를 전부 끝내기 위한 시합이었다, 아니면 일부라도 끝내 놔야 했다. 좁은 식기 건조대, 미지근한 물, 젖어있는 행주들, 한 시간마다 막히는 싱크대로 이루어진 원시적인 조건은 설거지를 두 배로 힘들게 했다. 다섯 시가 되면 주방장과 나는 다리가 풀려간다, 아침 일곱 시부터 먹지도 앉지도 못 했다. 우리는 피곤에 지쳐, 그녀는 쓰레기통 위에 나는 바닥에, 주저앉고는 했다, 맥주 한 병을 마시며, 아침에 말했던 몇 가지 언사들에 대한 사과를 주고받았다. 홍차야 말로 우리가 일을 계속하도록 만들어줬다. 주전자가 언제나 따뜻할 수 있게 관리했고, 하루에 몇 리터를 마시고는 했다. 


다섯 시 반이 되면 긴박함과 말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이때쯤이면 더욱 심해졌다, 모든 사람이 피곤에 지쳐 있기 때문이다. 주방장은 여섯 시에 정신적 고비를 한 번 맞고 아홉 시에 다시 한번 맞이 했다. 그녀의 정신적 고비는 꽤나 정확한 주기로 찾아와서 그녀를 보고 몇 시인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쓰레기통 위에 앉아서는, 병적으로 울기 시작한다, 절대, 아니, 절대로 이런 삶을 살게 될 거라 상상도 못 해 봤다며 비명을 지른다. 나의 정신은 이런 일을 견디지 못했다. 비엔나에서 음악 공부를 했었다, 보살펴야 할 몸져누운 남편이 있다, 등등. 평소라면 사람들은 그녀를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지쳐있을 때였고, 그녀의 훌쩍거리는 목소리는 우리를 열 뻗치게 만들었다. 줄스는 문 옆에 서서는 그녀의 훌쩍거림을 흉내내고는 했다. 주인장의 아내는 바가지를 긁었고, 보리스와 줄스는 하루 종일 다퉜다, 줄스는 농땡이를 쳤고, 그리고 보리스는, 웨이터의 우두머리로서, 봉사료에서 더 많은 몫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식당 문을 연지 이틀이 지난 후였다, 그 둘이 식당에 들어와 2프랑의 봉사료를 가지고 싸우기 시작했고, 주방장과 나는 그 둘을 떼어 놓아야만 했다. 식당에서 예의를 잃지 않는 사람은 사장뿐이었다. 우리와 같은 시간을 식당에서 지냈지만, 그는 할 일이 없었고, 실제로 식당도 아내가 운영했다. 그의 유일한 업무는, 물건 주문을 빼면, 담배를 물고 술을 파는 곳에 서서 신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사장은 업무를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주로, 주방장과 나는 열 시와 열한 시에 저녁을 찾아 먹었다. 자정이 되면 주방장은 남편을 위해 훔친 음식을, 옷 밑에 숨겼다, 훌쩍거리며 이 생활 때문에 죽겠다며 아침에는 사표를 낼 수도 있다 말하고는, 황급히 달아난다. 줄스 또한 자정에 떠나는데, 통상 보리스와 말싸움을 끝낸 뒤다, 보리스는 새벽 두 시까지 술 파는 자리를 지켜야 했다. 나는 열두 시부터 열두 시 반까지 설거지 마무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설거지 마무리를 제대로 끝낼 시도조차 할 시간은 없었다, 식사용 휴지로 접시에 묻은 기름때를 대충 닦아 냈다. 바닥에 쌓인 쓰레기들은, 그냥 두고는, 그중 가장 더러운 것만 스토브 밑으로 안 보이게 욱여넣었다. 


열두 시 반이 되어 나는 외투를 입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주인장은, 평소같이 평온하게 , 술자리 옆의 좁은 통로를 지나가는 나를 멈춰 세웠다.'아, 신사 양반, 이렇게 피곤해 보일 수가! 제가 브랜디 한 잔을 대접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지요.'


그는 마치 내가 접시닦이가 아닌 러시아의 한 공작인 양 예의를 갖추어 브랜디 잔을 나에게 건넸다. 그는 우리 모두를 이렇게 대해 주었다. 그의 태도는 하루 열일곱 시간의 노동에 대한 보상이 되어주었다. 


마지막 지하철은 대체로 비어 있었다-큰 장점이었고, 자리에 앉아 십오 분은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통상 한시 반이 되면 나는 침대 속에 있었다. 막차를 놓치 면 식당 바닥에서 잤어야 했지만, 신경도 안 쓰였다, 그 시간이면 자갈 도로에서도 뻗어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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