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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호 Sep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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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사는 접시닦이들의 삶에 관한 개인적인 의견들을 말해 보고 싶다. 생각해 보면, 대단히 현대화된 도시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눈 뜨고 있는 시간을 뜨거운 지하 소굴 안에서 접시를 닦으며 소비한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다.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의문점들은 이렇다, 어째서 이런 삶이 계속될까-그들의 삶이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이런 삶들이 유지되길 원 하는가, 그리고 어째서 나는 단순히 반항적인 태도도 게으른 방관자적 태도도 취하지 않는가. 나는 접시닦이 삶의 사회적 의의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자 노력해 보고자 한다. 


접시닦이들을 현대 사회의 노예들이라 칭하며 시작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이 사람들을 동정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이들은 많은 육체노동자들 보다는 상황이 더 낫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이 사고 팔리게 되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한 건 다르지 않다. 그들의 일은 기술 없이, 그저 굽실거리면 된다.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급여만을 받는다. 그들의 유일한 휴일은 해고다. 결혼도 가로막혀 있고, 결혼을 해도, 그들의 아내들 또한 일을 해야만 한다. 행운의 기회가 없다면, 이 삶에서 도망은 못 친다, 감옥은 제외하자.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학 졸업장을 가진 누군가는 파리 어딘가에서 접시를 10시간 15시간을 문지르고 있다. 누구도 그들이 게을러서라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나태한 사람은 접시닦이가 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생각이 불가능한 일상에 갇혀 있을 뿐이다. 만약 접시닦이들이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오래전에 노조를 조직해 처우개선 시위에 나섰을 거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여가를 즐길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접시닦이들의 삶은 노예로서 성공을 이루어 낸 것이다.


물음은 이렇다, 왜 이런 노예제는 멈추지 않을까? 사람들은 모든 일들이 행해지는 데는 타당한 목적이 있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어떤 누군가가 유쾌하지 않은 일을 하는 걸 보고, 그 일은 필요하니까 라고 말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긴다. 석탄 채광을, 예로 들어보자, 힘든 일이지만, 필요한 일이다-우리는 석탄이 필요하다. 하수도 작업은 불쾌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하수도에서 일해야만 한다. 접시닦이들의 일도 비슷한 맥락이다. 누군가는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일주일에 80시간을 접시를 닦아야 한다. 문명사회의 직업이다, 고로 의문이 필요 없다. 이 점이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접시닦이들의 일은 정말 문명사회에 필요할까? 우리에겐 무조건 그 일들이 "고된" 일이어야만 한다고 막연히 생각한다, 왜냐면 그들의 일은 힘들고 기피하고 싶기 때문이며, 우리가 육체노동을 일종의 집착같이 숭배해 왔기 때문이다. 나무를 자르고 있는 사람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사회의 필요 부분을 채우고 있다고 확신한다, 단순히 그가 근육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아름다운 나무를 잘라내고 그 자리에 흉측한 동상을 세우려 한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접시닦이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마 맺힌 땀으로 먹을 빵을 얻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필요한 일을 했다는 의미가 되진 않는다. 그들이 호사를 제공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호사는, 매우 자주, 호사가 아니다. 




내가 뜻하는 호사가 호사가 아님을 위한 예가 있다, 유럽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인도의 인력거꾼이나 마차 끄는 조랑말들을 가져와 보자. 극동에는 수 백명의, 샅바를 맨 깡마르고 검게 탄 불쌍한, 인력거꾼들이 있다. 누구는 병에 걸려 있고, 몇몇은 50살이 넘었다. 태양과 비를 맞으며 끊임없이 달린다, 머리는 숙이고, 흰수염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 손잡이 끝을 끌어당긴다. 그들이 늦게 달리기라도 하면 손님들은 그들을 여성 성기로 비하하며 욕한다. 한 달에 30 루피에서 40 루피를 벌고, 몇 년이 지나면 폐가 망가져 기침을 한다. 마차를 끄는 조랑말들은 깡말랐다, 악독하게도 이런 조랑말들이 싸게 팔리는 건 일 할 수 있는 시간이 몇 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들의 주인들은 채찍을 음식 대신으로 생각한다. 이 사람들의 일은 산수 비슷하게 표현되는데- 채찍 더하기 음식은 힘이다. 주로 60 정도가 채찍이고 음식이 40 정도가 된다. 어떤 때는 말들의 목에 넓은 상처가 띠를 두르는데, 속살로 온종일 마차를 끌고 다니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말들을 일하게 만드는 게 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말들을 채찍질로 엉덩이의 고통을 목의 고통보다 더 크게 하느냐라는 단순한 문제다. 몇 년이 지나면 채찍 조차도 장점이 사라지고, 조랑말들은 도축업자에게 넘어간다. 이 것들이 필요하지 않은 노등의 사례다, 실제로 마차를 끄는 조랑말이나 인력거꾼은 필요가 없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걷는 게 동양에서는 천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호사고 사치다, 한 번이라도 타 본 사람들이라면 알 고 있듯, 매우 허접한 사치들이다. 이 두 가지 노동은 얼마 되지도 않는 편의만을 제공하는데, 절대 사람과 동물이 겪는 고통을 상쇄시켜 줄 수 없다. 



접시닦이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들을 인력거꾼이나 마차를 끄는 조랑말과 비교하면 왕이지만, 그들의 사례도 유사하다. 접시닦이는 식당이나 호텔의 노예다, 그리고 이런 노예제는 거의 쓸모가 없다. 거대한 호텔과 깔끔한 식당의 진정한 필요성은 어디에 있을까? 호텔이나 식당은 호사와 사치를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실상 그들이 제공하는 것은 조잡하고, 가짜 호사와 사치들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호텔을 싫어한다. 어떤 식당은 다른 식당들보다 낫기는 하지만, 같은 가격으로, 집에서 먹는 음식처럼 좋은 음식을 식당에서 먹기란 불가능하다. 의심할 필요 없이 호텔과 식당은 존재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 백명의 사람을 노예로 만들 필요는 없다. 무엇이 호텔과 식당의 노동을 이렇게 만들었냐는 본질이 아니다. 호사와 사치가 됐어야 할 사기들이 요점이다. 세련됨이란, 그렇게 불리지만, 실제 의미는, 그저 직원들의 일은 늘어나고 손님들이 돈을 더 낸다는 뜻이다. 호텔의 듀빌에 휴양용 별장을 사게 될 소유주를 제외하면 득을 보는 사람은 없다. 기본적으로, '세련된' 호텔이란 백명의 사람들이 개 같이 일을 하고 이백 명의 손님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에 사실 자신들이 원하지도 않는 물건들을 사게 되는 공간이다. 만약 호텔과 식당에서 터무니없는 업무를 잘라내고, 업무들이 간단한 효율로 처리가 된다면 접시닦이들은, 거의 매일 같이 열다섯 시간씩이 아닌, 하루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만 일을 해도 될 것이다. 


사실상 접시닦이들의 일이 거의 쓸모가 없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따라오는데, 대체 왜 누가 그들이 계속해서 일 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나는 직접적인 경제적 원인을 넘어서, 평생 접시를 닦아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을 파헤쳐 보려 한다. 그런 사람들이 분명 있는데-편한 상황의 사람들이다-이런 생각들 속에서 하나의 기쁨을 찾아낸다. 노예는, 마르쿠스 카토가 말하길, 잠을 안 잘 때면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 했다. 노예들이 하는 노동이 필요한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노예는 무조건 일을 해야 한다, 노동 그 자체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노예들에게는 그래야만 한다. 이러한 정서는 여전히 살아남아, 쓸모없는 잡일들을 산 처럼 쌓아 놓고 있다. 


쓸모없는 일을 영구화하려는 이 본능은, 근본적으로, 군중을 향한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군중들은(흔하게 퍼져있는 사상이다) 너무 저급한 동물들로서 여가 시간을 가지면 위험해질 수 있다. 생각을 하지 못 하도록 바쁘게 만들어 놔야 더욱 안전하다. 지능적으로 정직한 부자가 있다고 치자, 그가 만약 노동여건 개선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면, 대개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빈곤이 불편함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빈곤이라는 게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우리는 빈곤의 불쾌함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실로 잘 괴롭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에 있어 어떤 행동을 할 거라 예상은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낮은 계층인 당신네들을 안타까워는 합니다, 피부병을 앓고 있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안타까워하듯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들 노동조건 개선에는 악마처럼 맞서 싸울 겁니다. 당신들이 지금처럼 있어야 우리는 더 큰 안도감을 느낍니다. 현재 상황이 우리들에게는 딱 맞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 단 한 시간도 그렇게는 못 합니다. 자, 존중하는 형제분이여,  보아하니, 우리들의 이탈리아 여행경비를 대주기 위해 땀 좀 흘려야 할 것 같은데, 어서 땀이나 흘리다 뒤져버리시지요.'


지성과 교양을 갖춘 사람들의 태도가 딱 이렇다. 이 사상의 실상은 수 없이 많은 글들 속에서 읽을 수 있다. 극소수의 교양을 갖춘 사람들은 일 년에(얼추) 400 파운드 미만의 수익을 번다, 이들은 자연스레 부자들의 편에 서는데, 약간의 자유라도 가난한 자들에게 이양되는 건 자신들의 자유에 위협이 된다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암울한 칼 마르크스의 유토피아가 대안으로써 예견되기에, 지식인들은 현 상황의 유지를 선호한다. 이들은 그들 주변의 부자 친구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부자들 중에서도 가장 천박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들 보다는, 그들의 행복에 해로움을 끼치지 않고, 자신들과 같은 부류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부자들 편에 서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의 의견으로는 이른바 위험한 군중에 대한 공포심이 거의 모든 지식인들을 보수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군중에 대한 공포는 미신적 공포심이다. 이 공포심은, 마치 이 두 부류가 다른 인종인 것 마냥, 흑인과 백인처럼,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괴상한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은 소득에 따라 구분될 뿐이다 그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 보통의 백만장자들은 보통의 접시닦이들이 새양복을 입은 것뿐이다. 위치를 바꿔보고, 어느 쪽이 누구인지 맞춰보자, 누가 판사고 누가 도둑일까? 가난한 사람들의 조건에 버무려져 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다. 문제는 지성과 교양을 갖춘 계층들인데, 진보적인 의견을 가졌다고 기대될지 모르지만, 절대 가난한 부류와는 섞이지 않는다. 지식인들이 가난에 대해 대체 뭘 안단 말인가?  내가 가진 프랑스 시인 비용의 시집의 편집자는 '빵을 창문 넘어로만 보고 있다.' 구절에 각주로 설명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배고픔 조차도 이 지식인의 경험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이다.    


이런 무지 때문에 군중을 향한 미신적 공포심이 아주 자연스럽게 결실을 맺는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멍청한 무리들이 단순히 하루의 자유를 원해서, 그들의 집을 약탈하고, 책을 불사 지르고, 기계를 다루게 하고, 화장실을 청소를 시킬 거라 상상을 한다. '뭐가 됐던'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 어떤 부당한 행위도, 군중을 속박을 풀어 주는 것보다는 낫다.' 지식인들은 태반의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의 다른 점이 없고, 그렇기에 대중을 자유롭게 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음을 보지 못 한다. 사실 대중들은 이미 풀어져 있다, -부자의 외양을 갖추고- 그리고 그들의 힘을 사용하여 '세련된' 호텔이라는 쳇바퀴를 설치하고 있는 중이다.


요약을 해 보면, 접시닦이는 노예다, 필요 없는 노예로서, 대체로 우습고 쓸데없는 일을 한다. 접시닦이는 일에 얽매여 있는데, 궁극적으로, 여가를 가지게 되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얼빠진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이들 편에 서야 함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은 이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하나 없다 그 결과로 이들을 무서워한다. 내가 접시닦이를 적용한 이유는 이러한 그들의 삶을 내가 살펴보아왔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가, 틀림없이 진부했을,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은 참조하지 않은, 접시닦이 삶의 기본적인 사실들에 관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이다. 나는 이 의견들이 호텔에서 일하며 머릿속에 박혀버린 여러 생각들의 견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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