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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호 Oct 12. 2017

35

로워 빈필드에 도착한 우리들은, 정문에 선 농부들의 시선을 받으며, 풀밭에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한 성직자와 그의 딸은 우리 쪽으로 와서는 , 우리가 수족관의 물고기라도 되는냥, 한 동안 조용히 쳐다 보고는, 다시 돌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레드와 윌리엄도 있었는데,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는 길에 싸웠던 남자, 거지 빌도 있었다. 빌은 빵가게 주인에게 구궐 하던 중이었고, 맛이 간 빵을 꽤 얻어내 자신의 맨몸과 외투 사이에 집어넣었다. 빌은 빵을 나눴고, 우리는 감사해했다. 무리에는 여자도 한 명 있었는데, 처음 보는 여자 부랑자였다. 바닥까지 끌리는 긴치마를 입은 이 여자는, 뚱뚱한 체구에, 허름하고, 아주 더러운 행색을 한 60세 정도의 여자였다. 대단히 품위가 넘치는 여자로, 누군가 옆에 안기라도 하면 코를 킁킁 거리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디로 가십니까, 여사님?' 부랑자 중 한 명이 크게 외쳐 물었다. 


여자는 콧방귀를 뀌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러지 마쇼, 여사님, ' 남자가 말을 이었다, '기운 내시고. 다정하게 굽시다. 여기 우리 모두 같은 처지 아니오'


'고맙군요, ' 여자가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당신네 부랑자 무리에 섞이고 싶어 지면, 내 알려 드리리다, ' 


나는 부랑자라고 말하는 그녀의 어투가 마음에 들었다. 마치 순식간에 온전히 다른 영혼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작고, 보수적인, 여성스러운 영혼은, 거리의 생활 몇 년 동안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분명, 존경받던 미망인이었을 것이고, 터무니없는 사건으로 부랑자가 됐을 것이다. 


수용소는 여섯 시에 문을 열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기에, 주말을 그곳에서 갇혀 있어야 했다, 통례가 그랬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일요일은 뭔가 불편해야 한다는 막연한 기분 때문이 아닐까 한다. 등록을 할 때 직업을 '기자'로 적었다. '화가'보다는 더 솔직한 대답이었다, 예전에 신문사에 글을 써주고 돈을 벌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멍청한 짓이었다,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수용소에 들어가자마자 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섰는데, 부랑자 대장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40세 전후의 뻣뻣한 군인 같았다, 퇴역 군인의 무뚝뚝함은 있었지만, 소문처럼 고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날카롭게 질문을 했다.


'아무개가 누구지?' (어떤 이름을 썼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접니다.' 


'그래 기자라고?' 


'그렇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질문과 사실이 달라 내가 거짓말한 게 되면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랑자 대장은 나를 위아래로 단지 훑어 보기만 했다. 


'그럼, 자네는 신사로 구만.'


'그런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나를 길게 쳐다보았다. '그거 참, 운이 없구먼 그래, '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정말 지지리도 운이 없군.' 그 후로 나를 부당한 편애로 대해주었다, 심지어는 존중 같은 것도 곁들였다. 나를 검사하지도 않았고, 욕실에서는 깨끗한 수건도 주었다-전례가 없는 호사였다. '신사'는 퇴역 군인의 귀에는 영향력 있는 단어였다. 


7시가 까지 방안에서 빵과 차를 먹어 치웠다. 우리는 같은 방에서 잤다, 침대와 밀짚 요가 있었기에, 잠을 편히 잘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완벽한 수용소는 없다, 로워 빈필드의 이상한 결핍은 난방이었다. 고온 수관은 작동을 하지 않았고, 주어진 두 장의 담요는 얇은 면이어서 쓸모가 없었다.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그 긴 12시간을 보냈는데, 잠깐 잠이 들었다가도 추위에 떨며 다시 깼다. 담배도 필 수 없었다, 담배를 숨겨 들어오기는 성공했으나, 우리의 옷은 아침에나 찾을 수 있었다. 복도 전체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와, 가끔은 욕설의 외침이 울렸다. 내 생각엔, 단 한 명도,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이상은 못 잤을 것이다. 


아침에는, 아침식사와 의사 진료 후에, 부랑자 대장은 우리를 식당에 몰아 놓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회색칠 된 벽에, 돌바닥 식당은, 송판 탁자와 긴 의자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따분한 곳이었다, 그리고 교도소 냄새도 났다. 철창은 너무 높아 밖을 볼 수 없었고, 시계도 장식품이나 수용소 규칙을 적어둔 종이도 없었다. 팔을 따닥따닥 붙이고 앉았는데, 아침 8시밖에 안 됐음에도, 이미 지루함에 질려있었다. 할 것도, 말할 것도 없었고, 심지어 움직일 공간도 없었다. 유일한 위안은 담배를 필 수 있었다, 피다 걸리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는 묵인해 주었다. 글래스고 지방의 사투리 억양을 가진 털 많은 부랑자, 스코티는, 담배가 없었다, 검사를 받는 동안 신발에서 담배꽁초 통이 떨어졌고 압수를 당했기 때문이다. 담배를 함께 말기를 권했다. 몰래 같이 피웠고, 부랑자 대장이 오는 소리가 들리면, 마치 학생같이, 담배를 주머니에 재빨리 찔러 넣었다. 부랑자들은 이 삭막하고, 볼 것조차 없는 방에서 열 시간을 꾸준히 있어야만 했다. 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부랑자 대장은 몇몇의 사람에게 잡일을 시켰고, 나를 뽑아 구빈원 식당에 보냈다, 모든 잡 일 중에 가장 선망되는 일이었다. 이것 또한, 깨끗한 수건처럼, '신사'라는 단어의 부적이 가져다준 것이다. 


주방에서 할 일은 없었다, 나는 감자를 보관하는 조그마한 창고로 몰래 들어갔다, 구빈원의 극빈자들이 일요일 아침 일을 피해 빈둥거리고 있었다. 편하게 앉을 수 있는 포장용 상자와, 날짜가 지난 신문지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구빈원 도서관에서 가져온 잡지도 있었다. 그들이 말하길, 다른 그 어떤 것보다 구빈원에서 가장 싫은 건, 자선의 치욕 같은 것으로, 구빈원 복장이라고 했다. 만약 자신들이 평소에 입는 옷이나, 아니면 모자 그리고 목도리라도 걸칠 수 있다면, 극빈자여도 신경 쓰지 않는다 했다. 저녁은 구빈소 식당에서 먹었는데, 보아뱀이 먹을 법한 성찬이었다-호텔 X의 첫날 이후로 가장 양이 많은 식사였다. 구빈원 극빈자들은 일요일만큼은 으레 목구멍까지 차게 먹을 수 있었지만 다른 평일들은 충분히 먹지 못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주방장은 나에게 접시를 닦고 남은 음식을 버리라 했다. 낭비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상황을 감안하면, 충격이었다. 반만 먹은 고깃덩어리, 소쿠리에 가득 담긴 먹다만 야채와 빵, 다른 쓰레기들과 같이 함께 던져져 홍차잎들과 함께 버무려졌다. 나는 다섯 개의 쓰레기통을 멀쩡한 음식들로 흘러넘치도록 채웠다.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 일요일의 성찬으로 나온 빵과 치즈, 그리고 식어빠진 감자 두 알을 먹은 50명의 부랑자들이 반즘 배를 곯고 있었다. 극빈자들에 의하면, 부랑자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고, 음식을 버리는 건 의도적인 정책이라 했다.


세시가 되어 수용소로 돌아갔다. 팔도 못 움직이는 공간 속에, 부랑자들은 아침 8시부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지루함에 이미 반은 미쳐있었다. 담배도 다 떨어져 있었다, 바닥에서 주운 꽁초를 모아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거리에서 몇 시간을 더 떨어져 있던 것처럼 배고파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지루한 나머지 말도 안 했다, 쳐다볼 것도 없이, 그저 의자에 뭉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덥수룩한 얼굴은 거대한 하품으로 두 조각으로 분리되었다. 따분함의 악취가 났다.


패디는, 딱딱한 의자 덕분에 등을 아파했고, 음울해져 있었다, 시간을 보내고자 나는 상급 부랑자와 말을 섞었다,  그의 말로는, 도구가 부족해서, 거리에 나앉게 된 옷깃에 넥타이를 맨 젊은 목공이었다. 그는 다른 부랑자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고, 본인은 부랑자가 아닌 자유인이라 했다. 문학적 취미도 있어서, '퀜틴 듀라드'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자신은 배가 너무 고프지 않은 이상 수용소에는 절대 오지 않고 건초 더미나 수풀에서 자기를 선호한다 했다. 남자는 남쪽 해안을 따라 낮에는 구궐을 하고 밤에는 오두막에서 자기를 몇 주간 해왔다.


그와 나는 거리의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부랑자를 14시간 동안 수용소에 머물게 하고 다른 10시간은 경찰들을 피해 거리를 배회하는 체제를 비판했다. 연장을 사기 위한 몇 파운드를 얻어 보고자 6개월 동안 생활보호대상자로 지낸 본인 사례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말로는, 멍청한 짓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 버려지는 구빈소의 주방 음식물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주었다. 그러자 남자의 어조가 즉각 바뀌었다. 내가 모든 영국 노동자 안에 잠들어있는 교회 신도를 깨운 게 보였다. 그도 지금까지 다른 부랑자들처럼 굶주려 왔음에도 부랑자들에게 주어지기보다는 음식이 버려져야 하는 이유를 단번에 들이밀었다. 매섭게 나를 꾸짖었다.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 그가 말했다, '이런 장소를 너무 편하게 만들면, 나라의 모든 인간쓰레기들이 떼 지어 몰려오게 합니다. 썩은 음식만이 이런 인간쓰레기들을 쫓아낼 수 있어요. 여기 이 부랑자들은 너무 게을러요, 이 자식들이 잘 못 된 거예요. 이런 자식들을 부추겨 주면 안 돼요. 인간쓰레기들입니다.'


나는 그가 틀렸다고 반박하려 했지만, 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기 할 말만 반복했다.


'여기 이 부랑자들에게 연민 따위 품지 마세요-인간쓰레기들, 그게 이 자식들이에요. 당신과 나 같은 사람의 잣대로 저 사람들을 평가하면 안 됩니다. 인간쓰레기들입니다, 그저 인간쓰레기예요.'


교묘하게 자신을 '이런 부랑자들'과 분리하려는 걸 보고 있자니 재미가 있었다. 이 남자는 거리에 나앉은 지 6개월이 지났음에도, 신의 눈으로 보자면, 그렇게 암시하려는 듯했다, 그는 부랑자가 아니었다. 내 생각에는 자신이 부랑자가 아님에 신께 감사하는 부랑자가 꽤 많을 것이다. 이들은 마치 여행자 같다, 다른 여행객들을 욕하는 여행객들 말이다.


세 시간이 느릿느릿 지나갔다. 여섯 시에 저녁식사가 도착했는데,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빵이 아침에는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했지만(토요일 밤에는 조각으로 나뉘어 나온다), 저녁 것은 건빵처럼 단단했다. 다행히도, 양념이 발라져 있었고, 우리는 그 부분을 긁어내어 그 부분만 먹었다, 안 먹는 것보다는 몇 배 나았다. 6시 15분이 지나, 새로운 부랑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날 들어온 부랑자들과 섞이지 않기 위해(전염병 때문이다) 신입들은 우리가 썼던 방으로 보내졌고 우리는 기숙사로 보내졌다. 헛간 같은 기숙사에는 30개의 침대가 다닥 붙어있었고, 욕조는 소변기로 쓰였다. 지독한 악취가 났고, 한 늙은 남자는 밤새 기침하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찬 덕분에 방은 따뜻했고 그나마 얼마간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새로운 의료진료 후 점심용 빵 한 덩어리와 치즈를 받아 들고 우리들은 아침 열 시에 해산했다. 윌리암과 프레드는, 몇 실링을 쥐고 있다는 자신감에, 수용소 철책에 빵을 꽂아 넣었다-그들은, 이를 저항이라고 했다. 켄트 수용소 다음으로 그들을 들들 볶은 수용소이며,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로 생각했다. 둘은, 부랑자임에도, 쾌활한 영혼들이었다. 한 천치는(모든 부랑자 무리 중에는 한 명의 천치가 있다), 부랑자 대장이 떼어내어 걷어차기 시작할 때까지, 너무 피곤해서 걷지 못한다며 수용소 철창에 매달려 있었다. 패디와 나는 북쪽으로 몸을 돌렸다, 런던 쪽이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아이드 힐로 향했다, 영국에서 최악의 수용소로 소문난 곳이다.


[*후에 한 번 가보았으나,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다시 화창한 가을 날씨였다, 거리는 한 산 했고, 몇 대의 차만이 지나다녔다. 수용소의 배수구, 땀, 그리고 비누 냄새가 섞인 악취 뒤에 맞는 공기는 달콤한 들장미 향기 같았다. 거리를 걷는 부랑자는 우리 둘이 전부 인 듯했다. 그러다가, 뒤에서 누가 황급히 달려오며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글래스고의 부랑자, 스코티였다, 숨을 헐떡이며 우리를 쫓아왔다. 주머니에서 녹이 슨 깡통을 꺼내 들었다. 은혜를 갚는 사람처럼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여깄네, 친구'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담배꽁초를 빚졌어, 어제 나한테 담배를 권했으니까 말이야. 아침에 나올 때 부랑자 대장이 담배꽁초통을 돌려줬어. 도움을 받았으면 갚아야지-여기 받아, '


그러고는 내 손에 흠뻑 젖어, 일그러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담배꽁초 네 개를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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