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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호 Oct 1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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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자들에 대한 보편적인 의견을 적어두고 싶다.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부랑자들은 기묘한 결과물이고 자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수 천 명이 존재하는, 이 한 무리의 부족이, 방랑하는 유대인들처럼 영국 전역을 방랑하는 건 어딘가 괴상하다. 이런 사태는 분명 심사숙고가 필요함에도, 특정 편견을 깨기 전까지는 어떤 생각조차 시작할 수가 없다. 우리들의 머릿속에 박힌 편견은, 그들이 사는 삶 때문에, 부랑자들을 불한당으로 인식하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부랑자를 불한당으로 배워왔다, 교육의 결과로 일종의 부랑자의 이상형과 전형이 우리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다-역겹고, 심히 위험한 생명체, 일을 하거나 씻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사람들, 원하는 것이라곤 구궐뿐이고, 하는 일이라고는 취해서 닭장을 터는 사람들로서 말이다. 부랑자 괴물은 잡지 소설 속의 사악한 중국인보다 더 사실이 아니다, 편견을 깨는 게 어려운 거다. 부랑자라는 단어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믿음들은 노숙자법에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을 모호하게 한다. 


노숙에 관한 근본질문을 던져보자. 애초에 왜 노숙자가 존재할까? 궁금한 질문이다, 하지만 소수만이 무엇이 부랑자들이 거리로 내모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부랑자 괴물을 향한 믿음들 때문에, 환상적인 의견들이 제시된다. 예를 들면, 부랑자들은 일을 기피하고, 구궐이 더 쉽고, 범죄의 기회를 찾기 위해, 부랑을 한다고 여겨진다. 심지어-그나마 개연성 있는 이유가-그들이 떠돌기를 좋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느 범죄학 책에서는, 부랑자들은 유전적 문제로 인류가 유목생활을 하던 시절로 돌아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반면 부랑자가 생기는 명확한 원인은 아주 이해하기 쉽다. 당연히 부랑자들은 역유전으로 유목민이 된 게 아니다- 방문판매자들도 똑같이 원시유전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텐가. 부랑자들은 떠돌아다닌다, 좋아서 떠도는 게 아니다, 자동차들이 좌측통행을 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다, 법이 그렇게 강제하기 때문이다. 궁핍해진 사람들은, 행정 교구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보호소에서 한 숨 돌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각 보호소는 이 사람들에게 하룻밤만을 허용해 준다, 그렇게 자동적으로 계속 이동하게 된다. 그들이 불법부랑죄를 짓는 이유는, 현재의 법에 따라, 그리하거나 굶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부랑자 괴물을 믿게끔 양육되어 왔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뭐가 됐던 그들이 악랄한 동기로 부랑자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쪽을 택한다. 


실제로, 소수의 부랑자 괴물들만이 이 의문에 부합한다. 부랑자는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통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실제 경험을 떠나, 연역적 추리만으로도 아주 적은 수의 부랑자만이 위험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위험한 사람들이었다면 그에 적합한 처우를 받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호소들은 하룻밤에 백명의 사람들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백명의 사람들은 최대 한 명의 직원과 최대 세명의 수위가 통솔을 한다. 백 명의 깡패들은 무장도 하지 않은 세 명의 수위로 통제될 수가 없다. 실로, 스스로를 구빈원 직원들에게 괴롭힘을 받게끔 놔두는 부랑자들을 보고 있자면, 분명히 그들은 가장 유순하고, 더없이 상처받은 생명체들임이 명백해진다. 모든 부랑자들은 술고래라는 통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표면적으로 보아도 터무니없는 통념이다. 말할 필요 없이 많은 부랑자들은 기회만 생기면 술을 마실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다. 요즘 영국에서는 물처럼 묽은 액체가 맥주라 불리며 한 잔에 7펜스에 팔리고 있다. 취하고자 한다면 최소 반 크라운이라는 돈이 들어간다, 매일같이 반 크라운을 어떻게든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부랑자가 아니다. 부랑자들이 무례한 사회 기생충('뼛속까지 거지')이라는 관념도 전적으로 근거가 없다, 매우 낮은 비율의 사례만이 사실일 뿐이다. 잭 런던의 책에서나 읽을 수 있는, 의도와 냉소가 낀 미국 부랑자들의 기생 생활은, 영국인들의 성향이 아니다. 영국인들은 양심에 지배받는 종족으로, 빈곤은 죄악이라는 강한 생각이 있다. 평균의 영국인 중 의도적으로 기생충이 되려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누군가가 직장에서 쫓겨났다고 할 지라도 이 국민성이 꼭 바뀌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부랑자들이 일자리에서 쫓겨난, 법 때문에 떠돌이 생활을 하는, 영국인임을 기억한다면, 부랑자 괴물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부랑자들이 훌륭한 성품이라고 말하는 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못할지라도 이는 결과가 그렇게 된 것뿐이지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랑자들에게 향하고 있는 '그들에게 엿같은 대우를 해주자'라는 보편적인 태도는 병약자나 장애인들에게 같은 태도를 취하자는 것만큼 공정하지 못하다. 그들의  위치에 섞여 들기 시작하고, 그들의 삶이 어떤지 이해하게 된 사람으로서, 이걸 깨닫게 되었다. 말 도 안될 정도로 공허하고 참으로 유쾌하지 못 한 삶인 것이다. 보호소에 관한 묘사를 했지만-한 부랑자의 하루 생활이다- 이것보다 더 강조되어야 할 악독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굶주림이다, 거의 모든 부랑자들의 기본 운명이다. 보호소에서 음식을 주지만 배를 충분히 채우라고 주는 의도는 아닌 듯하다, 이것 말고는 구궐로 얻어 낼 수밖에 없다- 이는 법을 어기는 행동이다. 결과로 태반의 부랑자들이 영양실조로 썩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다면 보호소 밖에 줄 선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보면 된다. 부랑자 생활의 두 번째 악독한 점은-첫눈에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첫 번째 문제만큼 심각하다-이 들이 여자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거다. 이 부분은 자세한 기술이 필요하다. 


부랑자들은 여자로부터 단절되어 있는데, 우선, 같은 사회계층에 극소수의 여자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극빈자층도 다른 계층과 마찬가지로 남녀의 비율이 동등한 비율을 이룰 거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거의 장담할 수 있는 건, 실제, 사회의 특정한 계층 밑은 전부 남자들이라는 점이다. 다음 수치는, 1931년 2월 13일에 실행된 밤거리 인구조사로서, 런던 시의회에서 발표하였고, 남성 극빈자와 여성 극빈자의 비례를 보여주고 있다. 


거리에서 밤을 보내는 인구, 남성 60명, 여성 18명


간이 숙박소로 등록되지 않은 보호소나 집에서 밤을 보내는 인구, 남성 1057명, 여성 137명


성 마틴 평야 교회 지하실 이용자, 남자 88명, 여자 12명


 런던 시의회 보호소 및 숙소 이용자, 남자 674명, 여자 15명


[*수치는 분명 과소평과일 테지만, 여전히 비율은 믿을 만하다]


이 비율은 자선행사에서 남자가 여자를 열명 중에 한 명 꼴로 웃도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원인은 실업률이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겉모습이 흉하지 않은 여성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자들에게 몸을 의탁할 수 있다. 결과론으로 보면, 부랑자의 경우, 남자들은 독신이 될 운명이다. 당연히 말할 필요도 없이 부랑자가 자신의 계층에서 여자를 찾을 수 없다면, 그 위의 여자들은-아주 바로 위에 있는 여자라고 할 지라도- 손이 닿을 수 없는 달만큼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이유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여자들은 절대, 아니면 거의 좀처럼, 그들보다 한 참은 더 가난한 남자들까지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 부랑자는, 그러므로, 거리에 나앉는 순간부터, 독신이 된다. 몇 실링을 모아 사창가를 찾지 않는 이상-정말 드문 일이겠지만-철저하게 아내나, 애인 또는 어떤 여자라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 못한다. 


결과가 무엇일지는 다음과 같이 명백하다-동성애와, 예를 들어, 종종 발생하는 강간 사건들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더 깊숙한 곳에는 자신이 결혼 상대자로 고려조차 되지 않음을 아는 남자들의 마음속에 자기비하가 꿈틀거린다는 것이다. 성욕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기본적인 욕구로서, 이에 대한 굶주림은 육체적 굶주림만큼이나 자존감을 잃게 한다. 빈곤의 악독함은 사람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황폐하게 만들고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욕구불만이 이 황폐화 과정에 기여하고 있음은 의심할 필요도 없다. 굴욕만큼 인간의 자존감에 상처를 줄 수 있는 건 없다.


부랑자들의 삶에 있어 다른 거대한 악덕은 강요된 나태다. 노숙자법에 따르면, 부랑자는 거리를 걷고 있지 않으면 수용소에 앉아 있어야 하고, 그 사이 시간에는, 부랑자 보호소가 문을 열 때까지 풀밭에 누워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확연히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고, 삶의 의지를 꺾어 버린다, 특히 교육받지 못 한 사람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여기에 더해 사소한 사실들도 열거할 수 있다-하나만 말해보자면, 불편함으로써, 거리의 생활과 떼어 놓을 수가 없다. 기억할만한 것은 평균의 부랑자들은 제대로 된 옷이 없고, 그들이 신고 있는 신발은, 발에 안 맞는다, 그리고 몇 달을 이어 의자에 앉지도 못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부랑자들이 겪는 고통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거다. 그들은 환장할 정도로 유쾌하지 못 한 삶을 살며, 아무 목적도 없이 그 삶을 영위한다. 수용소 방 아니면 거리에서 하루의 18시간을 보내거나, 감옥과 감옥 사이의 헛된 지름길을 개발하는 것 외에 할 게 없다. 영국에만도 최소 수 천명의 부랑자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매일같이 풋파운드의 힘을 쏟아 내는데-몇 천 에이커를 일구고, 몇 마일의 도로를 닦고, 몇 개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충분한 힘이다- 아무 의미 없는 걸음에 사용만 된다. 매일같이 수용소 벽을 바라보며 낭비하는 그들 전부의 시간을 더하면 아마도 십 년은 족히 될 것이다. 그들은 각 한 명의 부랑자에게 일주일 동안 적어도 1파운드를 국가가 쓰게 만든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갚지 않는다. 이들은 끝나지 않는 지루한 손수건 돌리기 놀이 속에서, 주변만을 끊이없이 맴돌고 있다, 무용지물이다, 누군가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의미조차 가지지 못한다. 법은 이 과정이 반복되게 하고 있고, 우리 모두는 이것에 적응해 있다는 게 새롭지도 않다. 하지만 굉장히 바보 같다.  


부랑자들의 삶을 무익하다고 인정했을 때, 질문은 그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나 있느냐 이다. 당연하게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부랑자 보호소를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장소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진행 중인 곳도 있다. 작년 한 해 동안에도 몇몇의 부랑자 보호소들이 개선이 되었고,-그곳에 머물러 본 사람들의 말이 맞다면,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모든 수용소가 똑같이 해야 된다는 여론도 있다. 하지만 이 것으로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지 못한다. 문제는 부랑자들을 반즘 죽어 가며, 지겨워하는 노숙자에서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으로 어떻게 되돌려 놓느냐 하는 것이다. 단순한 편의시설의 증강은 이를 해결할 수 없다. 부랑자 보호소가 아주 사치스러워진다고 할지라도(절대 그럴 일은 없다) 부랑자들의 삶은 여전히 허투루 쓰인다. 여전히 극빈자로서, 가정생활과 여자로부터 단절이 될 것이고, 사회에 불필요한 사람들로 남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극빈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는 오직 그들에게 일자리를 찾아 주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다-노동을 위한 노동이어서는 안 된다, 성과가 있어야 한다. 현재도, 대다수의 부랑자 보호소에서는, 부랑자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한 번은 그들의 식사를 위해 돌을 부수는 일을 대신해야 했는데, 앞으로 몇 년을 쓸 수 있는 돌을 부수고 나자 일은 정지가 되었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지금도 그들은 빈둥거리도록 내평겨져 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그들을 유용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각 구빈원은 작은 농장이나 텃밭을 운영할 수 있다, 그리고 신체 건강한 부랑자들에게 하루치 일을 하게 만들면 된다. 텃밭이나 농장의 생산물은 부랑자를 먹이는 데 사용이 될 수 있다, 최악의 경우라도 음식 같지도 않은, 차와 빵 그리고 마가린보다는 나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부랑자 보호소는 자립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립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길게 보아 결국에는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기억되어야 할 부분은 지금의 제도로는 부랑자들이 국가에 무익할 수밖에 없다, 단지 일을 안 해서가 아니라, 부랑자들이 먹는 음식이 그들의 건강을 약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제도는, 그렇게, 인명과 돈을 함께 잃고 있다. 적절한 음식을 제공하고, 적어도 그들이 먹을 음식은 스스로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계획은, 분명 시도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공정하게 말하면, 근래에 들어, 최소 소수 보호소의 잠자리 상황은 개선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보호소의 상황은 변함이 없고, 음식 부분에서는 실질적인 개선이 되지 않았다.]


농장이나 텃밭이 임시 노동자들에 의해 운영이 될 수 없다는 반대의견도 가능하다. 하지만 부랑자들이 각 보호소에서 하루만 머물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만약 그들이 보호소에서 할 일이 있다면,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머무를 수 있어야 한다. 부랑자들을 끊임없이 순환시키는 건 매우 억지다. 현재 부랑자는 지방세를 축내는 비용이다 그래서 다음 보호소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런 이유와 규범은 부랑자를 단 하룻밤 만을 보호소에 머무를 수 있게 한다. 만약 부랑자가 한 번 머물렀던 곳으로 한 달안에 다시 돌아간다면 일주일간 잡혀있는 처벌을 받게 된다, 감옥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고로 자연스레 이동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부랑자가 구빈소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구빈소는 적절한 음식을 제공한다면, 이는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구빈소는 부분적으로 자립 기관을 설립을 할 수도 있고, 부랑자들은, 자신이 필요한 곳에서 자리를 잡아, 부랑자 생활을 청산할 수도 있다. 부랑자들은 상대적으로 유익한 일을 하고, 적절한 음식을 얻고, 안정된 삶을 얻을 수 있다. 서서히, 제도가 자리를 잡게 된다면, 부랑자들은 극빈자 생활을 멈추고, 결혼을 통해 사회의 안정된 곳에서 자리를 잡을 수도 있다. 


이는 개략적인 의견일 뿐이고 빤한 반대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견은 세금에 새로운 부담 없이 부랑자들의 현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여하튼 해결방안은, 이 방법과 비슷해야 한다. 제대로 먹지도 못 한 나태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나,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그들의 음식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자.-자동으로 해결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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