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 Z사이
오늘 아침에 읽은 기사의 제목이 "연애 하기 점점 힘들어진다."였다. 내용은 20대 초중반은 취업준비와 자금난으로, 20대 후반 30대 초반은 바쁜 직장 생활과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이유로 연애가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625 때도 결혼하고, 사람이 굶어 죽던 60 년 대에도, 아이들을 낳았던 우리 조부모님, 부모님 세대들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실지 궁금하다. K양의 이야기는 우리가 겪는 세대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K양의 모습은 마치 두 남자 사이에 있는 모습이 아닌 현실과 이상 그 어딘가 즘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세상 문제가 대부분 그렇듯 어떤 문제를 설명할 때 한 가지 이유로만 설명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가지 시점으로 문제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남녀 문제가 그렇다는 건 이상할게 전혀 없다.
예전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산속에 위치한 승마장을 찾은 적이 있다. 말이라고는 사진에 담긴 자연농원에서 조랑말을 타고 있는 내 모습의 기억 밖에는 없었지만 말을 타보는 경험을 꼭 해보고 싶었기에 승마장을 찾았다. 울타리가 쳐진 공간 안에 여러 말들이 있었고 그 안에서 말을 한 마리씩 골라 타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내심 크고 건장해 보이는 말을 찾았지만 말을 처음 타보는 나는 우물쭈물하다 가이드가 정해준 -다른 말에 비해 다소 호리호리한- 백마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산속의 오솔길을 코스를 한 바퀴 도는데 조금 타다 보니 긴장감도 줄고 겁도 살짝 없어지고 말의 고삐를 쥐고 내 마음대로 조종도하고 평지에서는 말을 달리게 하기도 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원했던 말은 아니지만 꽤 재밌게 탈 수 있었다.
그러고는 두 번째 방문, 이 번에는 재빠르게 내가 직접 건장해 보이는 다른 말에 비해 덩치가 큰 갈색 말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다시 똑같은 오솔길 코스를 도는데 이 놈의 말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 고삐를 돌리면 힘을 주고 움직이지 않고 아무리 달리라고 신호를 주고 발길질을 해도 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 갈색 말은 손님을 태우고 수 없이 다닌 그 오솔길을 자신의 속도에 맞춰 걸었고 승마장까지, 나와는 전혀 타협하지 않은 채, 나를 안전하게 모셔왔다. 분명 말을 탔던 재미는 첫 번째 말이 더 재밌었다, 내 말도 잘 듣고, 뛰라면 뛰고, 천천히 가라면 천천히 가고, 고삐를 움직이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반면 두 번째 말은 자기 고집대로 움직이고 내 말은 전혀 듣지도 않았다. 힘도 좋고 노련도 해서 초짜인 내가 다루기엔 힘든 말이었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이 고집 쌘 말을 다루고 싶다, 순종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오기가 생긴 다랄까. 그 이후로는 승마장을 찾을 기회가 없었지만 만약 또 같은 승마장을 가게 되었더라면 아마 나는 또 그 갈색 말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어 갈색 말과의 승부를 하게 됐다면 아마도 내 오기는 포기가 되었거나 애착으로 변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만약, 가이드나, 말 조련사가 그 갈색 말을 타지 못 하게 했거나, 사정이 있어 못 타게 되었다면 나의 애착은 더 심해졌을 수도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랄까.
A군은 능수능란한 남자다. 대화를 할 줄 알고, 여자에게 어떻게 어필해야 되는지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고집이 있고, 여유도 있고, 자신감도 있다. 내 말을 듣지 않는 이 남자, 나를 어디로 모셔갈지 궁금해지게 만드는 남자다. 하지만 A는 정확히 밝히고 있다. 지금 당장 K양을 원더랜드로 모셔 갈 수 없다고 말이다. 피터팬처럼 등장했지만 원더랜드로 함께 가자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원더랜드가 아닐지도 모르는 곳으로 갈 수 있는데 그 장소가 괜찮냐고 물어보고 있다.
K양의 마음엔 이미 A가 들어와 있다. 둘은 대화도 잘 통하고 분명 A의 남자다운 매력에 빠져있다. 넘어올 듯 넘어오지 않는 A와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는 K양의 줄다리기는 여전히 진행 중으로 보인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생각은 언제나 잘 해야 된다.- 둘이 어디서 만났고 어떻게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동안의 벌어진 둘 사이의 삐걱거림에서 A가 그렇게 여유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A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 수도 있고, K양처럼 연락을 주고받으며 원더랜드가 아닌 원더랜드로 가는 길목 어딘가에서 함께 날고 있는 여자가 있을 수도 있다. 여자가 없더라도 여전히 A의 여유로운 점은 K양에 대한 마음이 그리 크지 않다는 걸 반증하는 거라 할 수도 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둘이 아무리 연락을 길게 했고 깊은 속마음의 이야기를 하고 진지한 만남에 대해 타진했을 지라도 둘이 실제로 만난 것도 몇 번 되지 않는다. K양과 A가 서로 지나쳐 갈 인연일지 아니면 서로가 정말 원하는 사이일지 둘 다 저울질을 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둘이 그렇게 쿵작 잘 맞고 마음이 통했다면 만남의 횟수가 지금보다는 더 많았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둘이 제대로 시작한 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자그마한 그 느낌과 확신이 혹시나 착각은 아닐지, 그 착각이 책임감이 되어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그 책임감이 돼버린 착각이라는 실수가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하고 있는 듯하다.
A군이 잘 못을 하고 있는 것도 없고 K양이 무언가 실수를 저지르고 있지도 않다. 다만 A군은 지금 당장 K양과의 관계를 시작하더라도 이 관계의 목적을 정하지 않고 시작하고 싶어 한다. 스스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K양은 그렇지 않다. 관계를 명확히 하고 싶고 뭔가 확신을 얻고 싶어 한다. 전형적인 남자와 여자의 생각 차이라고 할까.
A와 K는 서로를 길들이고 싶어 하지만 옆에서 보는 입장에선 A가 K양을 길들일 수 있는 확률이 더 커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K양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전적으로 A를 만나야 한다. 행복이 연애의 기본 조건이고 전부 일 수도 있다. 현재 소원한 상태인 A에게 연락을 하는 것은 언제가 됐던 상관이 없다. 타이밍을 봐가며 연락을 하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연락을 했을 때 그 사람이 받아주느냐고 첫 번째이고, 그 사람의 마음이 여전히 K양에게 호감을 보내고 있는지가 두 번째다. 이 두 가지가 충족이 되면 K양이 할 일은 다소곳한 말투로 잘 못 한 점이 있다면 정중히 사과하고 애정을 표현하면 된다. 만약 호감이 사그라들고 있었다면 다시금 호감이 끌어 오를 수 있게끔 해야 하는데 방법이 무엇인지는 K양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것만큼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 연락을 다시 해 본다고 A가 K양의 피터팬이 되어 줄지도 의문이고 피터팬이 되어준다고 해도 K양이 원하는 원더랜드로 함께 입성하고 싶어 할지는 미지수다. 개인적으로 줄 수 있는 의견은 하나다.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최고다 라는 것이다. 어차피 옆에서 아무리 이 사람이 좋다 저 사람이 좋다, 이 사람은 아니다 저 사람도 아니다 라고 해 봐야 결국 사람은 자기 마음 가는 사람에게 가고 싶어 한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A군이 피터팬이 되어 K양을 웬디로 대해줄지, 웬디로 대해준다고 해도 K양이 원하는 원더랜드로 함께 날아갈 준비가 언제 될지, 준비가 된다고 하더라도 실천을 해 줄지에 대해선 미지수 일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연애를 위한 연애가 되더라도 후회 없는 연애를 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A군에게 먼저 손 내밀고 A군이 원하는 관계로 두 사람의 사이를 정리하면 된다. 그러다가 혹시 아는가 그렇게 둘이 원더랜드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딘가에서 훨훨 날아다니다가 A군이 피터팬에서 갑자기 어른이 되어 K양에게 어른으로서의 책임감과 남자로서의 신뢰를 보여줄지. 사람 일은 절대 모르는 거니까. 다만 이런 일의 가능성이 적어 보이는 이유는, 지금도 K가 스스로를 보호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며 밀어낼 때마다 자연스레 멀어져 주고 있다.
Z군은 더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K양의 정보만으로는 Z군을 판단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Z군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Z군이 더 끌리는 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서 그런 듯 싶다. 조용하고, 차분하고, A군에 비해 재미없을 듯 한 Z 군이지만 왠지 안정적이고 A군만큼 솔직하진 않지만 진실된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다. 갈색 마와 흰색 말의 차이랄까. 그래도 사람을 너무 쉽게 믿고, 그저 느낌 때문에, 조건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건 조금 위험하니, Z와의 시간을 늘려 갈 수 있다면 더 늘려 가는 게 좋을 듯하다.
Z군의 상황과 A군의 상황을 비교하면 Z군과의 상황에선 K양이 피터팬의 위치로 보인다. 피터팬처럼 등장한 그녀를 Z군이 웬디처럼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물론 사람 속을 다 읽을 수는 없으니 빨간 망토를 뒤집어쓴 웬디 속에 늑대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조금 더 시간을 가지 져야 한다. A와는 다른 목적 다른 의미로 Z와는 목표를 정하지 않은 연애를 위한 연애를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Z군을 다시 만날 기회가 된다면 뭔가 속을 알 수 있는, 어느 정도 사람의 성격과 진심을 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게 좋을 듯하다. 그렇게 Z에게 대해 차분히 알아가다 Z가 정말 인간적으로 하자가 있다면 그때 가서 둘의 관계를 정리해도 늦지 않고, 그 사람과의 만남에서 도저히 연인으로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정리해도 좋지 않을까.
엘사도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처음 만난 사람과 결혼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한두 번 만난 사람과 어떻게 단숨에 사랑에 빠져 평생을 함께 할 연인이 되겠는가. 요새 10대 청소년도 그렇게는 생각 안 할 듯하다. 사실 A군도 Z군도 내가 봤을 때 K양이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다. 아무리 깊은 대화를 나눈 A군이라도 둘이 실제로 연인이라고 할 만한 일도 없었고 좋은 감정을 나눈 것이 전부다. 그러 던 와중에 밀당을 하고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A군이 실제로 K양에게 진지한 마음이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떨어져 나갔을까. K양도 A군이 확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리 쉽게 밀어낼 수 있었을까. 아직 둘 다 서로를 잘 모르고 확신이 없어 저울질하고 있는 상태로 보인다. Z군과도 그렇다. 혹시 K양이 Z군에게 조금이라도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품고 있다면 Z군과 만나는 시간, 대화를 나눌 시간을 늘리는 게 좋을 듯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A 군이건 Z군 누구를 선택하던 K양의 마음부터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다.
A군이 아무리 좋아도 A군이 원하는 연애를 하고 싶은 건지 K양이 원하는 연애를 하고 싶은 건지 명확하게 해줘야 A군도 결론을 내릴 듯하다. Z군과도 마찬가지다. Z군으로부터 뭔가 얻고 싶은 게 있고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면, 우선 확실히 이 사람과 관계를 이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저 관계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고민하는 행동은 전혀 K양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연애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이 자기도 모르게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렇다고 고민만 하고 있기엔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다. 이 상황의 결론을 딱 잘라 낼 수는 없지만 이 글의 결론을 말하자면 이야기는 이렇다. 나에게 맞는 사람을 찾을 것인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을 것인가, 나에게 맞춰 줄 사람을 만날 것인가, 내가 맞춰줘야 할 사람을 만날 것인가. 여우가 될 것인가, 어린 왕자가 될 것인가. 원더랜드에 가는 것이 목표인지, 원더랜드로 가지 않아도 그저 날아만 다녀도 행복할 수 있는지. 사랑을 줄 수 있을 만큼 신뢰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가. 결정은 언제나 당사자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