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적 언어가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과정
인간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생명이며, 관계를 벗어나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언어가 세상의 체계와 사람의 마음을 예상보다 쉽게 바꾼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합니다.
통제의 역설은 “통제하려 할수록 오히려 더 통제되지 않는다”는 마음의 구조를 말합니다.
불안이 커질수록 우리는 더 빨리 판단하고, 더 단순한 기준을 붙잡고 싶어집니다. 그 판단은 잠깐의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감각을 밀어냅니다. 감각이란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몸과 마음의 경험으로 확인하는 능력인데—판단이 단순해질수록 그 능력은 얇아집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질서’, ‘상식’, ‘정의’ 같은 듣기 좋은 언어가 감각을 대신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선택이 유도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이번 화는 판단이 단순해질 때 감각이 어떻게 대체되고, 그 대체가 어떻게 개인과 집단의 통제 구조로 이어지는지—상징적 언어가 마음을 바꾸는 과정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1955년 여름, 시카고에서 미시시피로 휴가를 온 14세 흑인 소년 에멧 틸은 친척들과 함께 시골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그는 동네 식료품점에 들렀고, 계산대 뒤에 있던 백인 여성에게 말을 건넸다.
며칠 뒤 새벽, 무장한 백인 남성들이 소년이 자고 있던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에멧 틸을 강제로 끌고 나갔고, 그날 밤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며칠 후, 심하게 훼손된 시신이 강에서 발견되었다. 소년은 잔혹하게 폭행당한 뒤 살해된 상태였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를 데려간 남성들은 계산대에 있던 여성의 남편과 그의 친척이었다. 그들은 소년이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며 수작을 걸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시시피 사회에는 흑인을 ‘백인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강력한 통념이 존재했다. 이 통념은 개인의 감정과 선택을 집단적으로 정당화하는 언어로 작동하고 있었다.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가해자들은 무죄를 주장했고, 배심원단은 모두 백인이었다.
심리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평결은 무죄였다. 법정 밖에서 가해자들은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수년이 흐른 뒤, 당시 ‘피해자’로 불렸던 여성은 인터뷰에서 소년이 자신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한 적은 없었으며, 그날 자신이 했던 진술의 핵심 내용이 사실과 달랐다는 취지의 증언과 보도가 제기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미국 사회에서 ‘증언’, ‘통념’, ‘집단적 공포’가 어떻게 폭력으로 연결되는가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남게 된다. 사실관계의 확정 여부와 별개로, 이 사건은 한 개인의 판단이 개인 내부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문화·언어의 결합 속에서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안에 있는 무의식적 증오나 용납하기 어려운 충동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반대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이 닥치면 억압되었던 그림자는 ‘정당화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급격히 표면으로 솟구치고, 사람은 무의식적 타당화를 통해 자아를 보호하려 합니다.
이 혐오가 어떻게 집단으로 유지되고, 공유되고, 무뎌지는지를 분석한 사람이 한나 아렌트였습니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포착한 것은, 극단적인 잔인성이 ‘특별한 악마성’이 아니라 언어와 규범 속에서 평범한 얼굴로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혐오는 어떻게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걸까요?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감정임을 알면서도, 왜 사람은 그 감정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걸까요?
인간은 누구나 그림자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대개 어렵고, 종종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동시에 관계 속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두려움, 수치, 열등감, 질투, 박탈감—을 마주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그림자를 내 안에 두기보다, 집단의 언어 속으로 밀어 넣어 보편화합니다. 그림자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상식”이 되는 순간, 사람은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덜 부끄럽고, 조금 덜 외로워집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타인을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역사는 이 메커니즘을 반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미지의 세계가 두려웠던 시대에는 ‘마녀’라는 표적이 만들어졌고, 죽음과 패배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던 시대에는 ‘노예’라는 구조가 정당화되었습니다. 전쟁과 경제 위기 속에서는 박탈감을 견디기 위해 특정 집단이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형태만 바뀐 채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누군가를 타깃으로 삼아 조롱과 비난을 조직하고, 도덕성을 심판하며, 자신의 불안과 무능감이 들키지 않도록 “나만은 괜찮다”는 확인을 집단 속에서 얻습니다.
그렇다면 그림자가 사회적 언어 속에서 보편화되기만 하면, 인간은 정말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되는 걸까요?
SNS와 매체가 나의 그림자를 “옳은 감정”처럼 떠받들어 준다면, 나는 정말 편해질까요?
물론, 일시적으로는 고통이 줄어드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집단이 내 감정을 ‘정당한 것’으로 승인해 주면, 나는 잠시 안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내가 나의 그림자를 이해하고, 다루고, 수용하려는 능동적 작업이 빠져버리면 역설이 발생합니다. 고통은 줄어드는 듯하지만, 동시에 인간성은 얇아집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현대사에 흔적을 남긴 사건과, 그 사건을 해석한 사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1961)을 지켜보며, “극단적인 악이 어떻게 평범한 얼굴로 나타날 수 있는가”를 기록했습니다. 나치 체제하의 유럽, 특히 1930년대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수치의 출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히틀러 정권은 그 불안의 방향을 유대인이라는 특정 집단으로 고정시키며, 분노를 결속으로 바꾸는 언어를 조직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선동’이 아니라, 언어가 사람들의 감정과 판단을 재배열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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