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타인을 해칠 권리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의 상처를 면죄부 삼아 타인의 생동감을 파괴하려 합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상처를 세상의 법이 아닌, 심리학과 윤리의 시선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상대를 볼 때, 그 생생함을 꺾고 싶어합니다.
그들에게 상대의 생생함은 ‘부러움’ 이전에 과도한 자극입니다. 그래서 그 자극을 제거하고 싶어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대개 자신을 피해자로 세우며 상대를 밟는 행동을 합리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해 스스로 감탄하고 감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죽어 있는 삶’에 가까운 상태로 살아온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생생함은 단순히 상대의 활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생생함은 곧바로 그들에게 자기 존재의 비참함과 공허함을 더 선명하게 느끼게 만듭니다.
이들의 분노는 대개 겉으로 폭발하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침식되어 깊은 곳에 침잠해 있다가, 특정한 순간에 파동처럼 올라옵니다. 반짝이는 눈빛, 분명한 행동, 생생한 주체성. 그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불편한 자극이 됩니다. 그래서 상대를 볼수록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이 쌓이고, 알 수 없는 피곤함이 밀려오며, 그 피곤함은 곧 상대에 대한 불만으로 변합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오래된 ‘항상성’이 있습니다. 딱히 행복하지는 않았고, 멀리서 보면 오히려 불쌍해 보이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기에 그 상태가 익숙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극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 생깁니다. 타인의 생생함을 지우면, 다시 무감각하고 익숙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위험한 흐름을 스스로 자각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신의 심연을 끝까지 바라보지 않습니다.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왜냐하면 그 심연은 ‘타인을 보고 순간 흔들리는 파동’보다 훨씬 크고, 거대하게 일렁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의 행동과 특성을 제거하려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집단의 규칙이나 자신의 규칙을 근거로 상대의 행동을 문제화하고, 타당화합니다. 폭력으로 위축시키거나, 고립시켜 침묵하게 만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스스로 피해자가 되어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상대의 개인적 특성과 행동을 말살시키려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변명은 늘 비슷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상처 속에서 살아왔다.”
“나는 지금 고통스럽다.”
“내 행동은 정당하다.”
이렇게 상처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자기정당화의 근거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타인의 행동에 아무 자극도 받지 않는 사람 역시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만 ‘특별히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타인을 밟아도 되는 것일까요. 고통을 겪었거나 겪는 중이라면, 타인을 상처 줘도 그것이 타당해지는가라는 질문에 이르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서사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반복해서 지적되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상처받았으니 가해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도 이러한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소비하지 않도록 경계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상처 서사를 쉽게 소비하는 집단에서는 이 감각이 부족합니다. 상처를 받은 서사를 함부로 쓰는 것과, 피해자가 고통을 표현하는 것 사이의 경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이를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틈에서, 이유 없이 상처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 상처를 입을 수 있고, 그 상처를 견디며 살아내는 이야기는 숭고하고 인간적입니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상처가 타인에게 상처를 줘도 되는 면허가 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줘도 되는 존재가 됩니다. 즉, “알면서도 상처를 줘도 괜찮다”는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언제나 경계해야 할 지점입니다.
“과거에 상처받았으니 나는 그렇게 행동했다”는 합리화가 시작되는 순간, 윤리의 기준과 타인–자기 경계는 흐릿해집니다. 그리고 인간성은 계속 추락하면서도, 정작 그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이미 그 경계를 의식적으로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카뮈의 《이방인》입니다.
뫼르소는 살인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태양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는 그의 행적을 따라가며, 그를 그렇게 만든 이유를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국, 그 모든 서사를 집어삼킨 행위 자체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가해자가 들고 오는 특별한 서사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서사를 우리가 이해해야 할 필요 역시 사라집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알제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남자입니다. 어느 날 요양원에 있던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르지만, 그는 사회가 기대하는 방식의 슬픔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장례 이후에도 그는 일상으로 돌아가 수영을 하고, 영화관에 가고, 연애를 시작하는 등 비교적 평소와 다름없는 삶을 이어갑니다. 뫼르소는 옛 동료 마리와 가까워지고, 이웃 레몽과도 어울리게 됩니다. 레몽은 연인과의 관계에서 폭력적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이지만, 뫼르소는 그 문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은 채 레몽과 함께 움직입니다.
이 시기 뫼르소는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 판단보다는, 그저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몽 일행과 함께 간 해변에서 갈등이 격화되고, 뫼르소는 총을 쥔 채 상대와 마주하게 됩니다. 강한 햇빛과 열기, 땀으로 압박되는 감각적 조건이 겹친 순간, 그는 한 남자를 쏘아 죽입니다.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은 뒤, 뫼르소는 감옥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합니다. 종교적 회개나 위로를 요구받지만, 그는 끝까지 거짓된 위안 대신 사실을 직면하는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세계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할 수 있다는 감각—카뮈가 말한 ‘부조리’—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그 속에서 이상한 평온에 가까운 상태에 도달합니다.
여기서 카뮈가 말한 부조리란,
‘의미를 갈망하는 인간’과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세계’가 맞부딪칠 때 발생하는 긴장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직접적 폭력이든 수동적 폭력이든, 폭력은 형태와 무관하게 동일하게 파괴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덴마크 원제는 Hævnen(‘복수’)이며, 해외에는 In a Better World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In A Better World 예고편
https://youtu.be/hSbc868dZe8?si=i1gVb39ignL3tVFN
https://youtu.be/AwCIoB7vLqw?si=Shc9F8rj9NIxWGxt
이 영화에서 중요한 점은, 등장인물들이 처음부터 공격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영화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관객에게 던집니다.
죽음을 포함한 폭력의 피해를 입은 사람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가.
그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분노, 수치, 무력감—은 어떤 선택으로 이어지는가.
그리고 그 선택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해야 하는가.
이 영화에서 “상처받았기에 타인에게 상처를 줘도 괜찮다”는 논리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크리스티안입니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 이후, 그는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분노를 키워갑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빠르게 정당화된 폭력의 형태로 전환됩니다.
엘리아스를 괴롭히는 아이를 향해 크리스티안이 휘두르는 무자비한 폭력은, 겉으로 보기에 ‘문제를 해결하는 힘’처럼 보입니다. 엘리아스는 그 순간 처음으로 강한 힘과 해방감을 경험하고, 그 감각에 이끌리듯 크리스티안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어느 날, 안톤은 아이들 앞에서 무례한 정비공에게 뺨을 맞습니다. 안톤은 폭력의 무의미함을 보여주기 위해 끝까지 참아내지만, 아이들은 그런 그의 태도를 ‘겁쟁이’로 해석하며 분노합니다.
이 장면은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폭력을 참는 것이 언제나 ‘선’으로 읽히는가.
혹은 참는 태도가, 보는 이에게 무력함으로 인식되면서 또 다른 폭력—조롱과 경멸—을 낳지는 않는가.
결국 크리스티안은 그 정비공의 차를 폭파시키려는 위험한 계획을 세우고, 엘리아스를 그 과정에 끌어들입니다.
영화는 폭력의 논리를 아이들만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안톤은 아프리카의 의료 현장에서, 잔혹한 폭력을 저질러온 가해자를 치료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합니다. 의사로서 그를 치료하던 안톤은, 치료 과정에서도 피해자들을 조롱하는 빅맨의 악마 같은 본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폭발하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그를 진료소 밖으로 끌어내 분노한 마을 사람들에게 내던집니다.
크리스티안의 폭발 계획은 결국 엘리아스를 다치게 만드는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크리스티안은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지만, 안톤의 도움으로 구조됩니다. 영화는 폭력이 폭력을 낳는 굴레 속에서, 상처 입은 이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다시 연결될 때 비로소 ‘더 나은 세상’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음을 보여주며 끝을 맺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결국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인은 고통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가진 의미는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폭력은 폭력으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순간, 상처받은 누군가가 아니라 결국 그 폭력을 정당화하려 했던 자기 자신의 영혼이 손상됩니다. 그래서 In a Better World는 폭력을 통해 해방감을 얻으려 하기보다, 용서를 통해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조심스럽게 제시합니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현 국제장편영화상)과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수잔 비에르와 덴마크 영화의 위상을 높였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게 되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피해받고 고통을 받은 사람에게 용서하라”는 말은 때때로 부당하게 느껴지고, 어떤 순간에는 이기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용서는 사실 거창한 요구가 아닙니다. 나를 상처 입힌 사람을 깊이 이해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그를 놓아주라는 제안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이해했을 때, 용서는 이기적인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피해자였고, 지금도 고통 속에 있으며, 이대로라면 복수와 분노 속에서 살아갈 것 같은 당신에게, 이제 그 지옥에서 빠져나와도 된다”는 말이 됩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내가 겪은 고통은 내 세계의 중심에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세상은 종종 그 고통보다 지금의 선택과 행동에 더 빠르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순간, 세상은 연민보다 책임을 먼저 묻습니다.
그러니 그런 냉정한 세상에 계속 설명을 요구하며 머무르기보다, 과거의 지옥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현실로 이동하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회복이란 고통이 없어진 상태가 아니라, 고통을 이유로 타인을 해치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 선택이 반복될 때, 비로소 나의 삶부터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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