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킨 마음을 마주하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과 대상을 상실하는 경험을 한다. 어떤 것도 덜 고통스럽거나 더 고통스러운 건 없다. 감정이 말로 바뀌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은 충분히 허락되어야 한다.”
이해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해 갈 곳을 잃었다. 속하지 못한 존재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 서로간에 느껴지는 똑같은 일과 타인을 바라보지 않는 허공의 시선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일종의 코드 같다. 관계의 동역 속에서 감정이 움직이는 것처럼.
나는 정말 속해 있는가. 단지 연결되어 있다는 공허한 상투어를 뱉지 않으려 애쓰는 길은 너무 힘들다. 상처받을 수도 있고, 소외될 수도 있다. 또 소외될 수도 있고, 상처받을 수도 있다. 나 역시 상처받은 경험이 있고, 소외된 경험이 있다.
이 두 감정은 따로 경험될 수도 있고, 하나만 경험될 수도 있다. 그렇게 감정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결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왜 그 자연스러움을 이론적으로는 이해하면서도, 무언가 가로막힌 듯한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걸까.
이 두 감정 모두를 내 안에서 경험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느끼고 있다. 나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실습에서 관계 속 감정은 때로 존재가 도구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관계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생각과 감정을 나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관계다.
나는 그 속에서 전혀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서로의 말에 따뜻하게 미소 짓는 시선들. 나서서 발표하는 사람의 말에 호기심 어린 눈빛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주치는 눈길들.
그건 지나간 시간이지만, 그때의 자리가 진짜 나로 존재한 순간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순간을 줄 수 있다는 건, 너무 어려운 바람일까. 내 곁에서 고통을 함께 나누는 동료들의 고백은 나를 다시 서 있게 한다.
나는 조용히 고백해 본다.
“상담이 별거 있나요.”
상담사가 아닌 어느 상사의 말은 나를 흔들었다. 건네진 그 말은 내 마음과 시간을 너무 쉽게 스쳐 지나갔다.
그 무게를 감내해 온 사람으로서, 나는 그 말 앞에서 점점 사라지는 나를 느꼈다.
이해받지 못한 감정은 때로 언어 이전에 지워진다. 어쩌면 그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그러나 나는 그걸 알면서도,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행정업무가 계속 쌓이는 속에서 나를 표현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말하지 못한 채, 시간에 밀려 급하게 상담실로 향했다.
회피의 언어를 사용한 그 사람에게, 나 역시 회피로 답한 채 상담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담자와 마주했다. 내담자와 이야기하는 시간 속에는 외면할 수 없는 시간이 존재했다.
묘하게 존재는 사라지고, 다양성만 강요하는 산들 앞에서 단절감과 절망을 호소하는 그들과의 대화. 그 속에서 내 한계가 계속 부서졌다.
부서진 한계들이 쌓이고, 결국 무너지고 나서야 나는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영화 마루 밑 아르헨티나 속 존재처럼, 나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세상을 바라보는 작고 연약한 존재 같았다.
나는 시간과 싸우고 있는 것 같다.
내 고통과 그들의 고통이 마음 속에서 얽히기 시작했다. 얽힌 마음 속에서 상담사이자 연구자인 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느 저녁, 나는 더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품고 식탁에 앉았다. 엄마에게 대화를 청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는 내 마음을, 형식이 아닌 대화로 풀어 보았다.
통과되지 못하는 불안과 얽매인 형식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철저히 이성적이기만 했던 논문과 이론의 공간에서, 감성의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이야기하는 동안 존재가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스쳤다. 그러나 앞에서 나를 바라보며 괜찮다고 말해 주는 존재가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다 풀지 못한 두려움조차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작은 희망을 느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표현하며 살아간다. 그 방식은 조용할 수도, 클 수도 있다. 대화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엉킨 마음을 조용히 표현해 본다.
나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말할 수 없는 공간에서 벗어나, 말하고 싶다는 걸. 그러나 실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그렇기에 나는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편에는 ‘그런 존재여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있었다.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프란츠 카프카, 엘리자베스 길버트, 마르타 아르헤리치, 아툴 가완디. 그리고 나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선생님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 주는 어른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길을 따라 걷고 싶어졌다. 초대받은 그 길로 걸어가 보고 싶어졌다.
(계속)
“지금은 두렵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상과 연결해보려 합니다. 당신도, 그 시도에 함께 걸어와 주실 수 있나요? 우리가 감정과 말들로 서로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