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에게 매실을 굴려보냅니다
“산책을 하다, 가만히 벤치에 앉아 있으면
고양이 한 마리가 조용히 다가와
풀밭 한 켠에 조용히 앉습니다.“
7월. 무더운 여름이 왔다. 가만히 있어도 금세 지친다. 올해 여름은, 걸으며 산책하는 시간을 나에게서 잠시 뺏앗아 가는 계절이다. 나는 풀 위에 조용히 서서, 나무를 바라본다. 그때, 고양이 한 마리가 뒤편에서 천천히 다가와 여유롭게 기지개를 켠다.
나는 잠시 뒤뜰 쪽을 바라본다. 그곳, 벤치 하나가 조용히 놓여 있다. 벤치 옆 매화나무 아래, 조그만 매실들이 하나둘 떨어져 있다. 나는 조용히 그 곁으로 걸어가 본다. 매실나무를 바라보던 그때, 고양이가 벤치 앞에 조용히 앉아 털을 고르기 시작한다. 나는 발끝으로 매실 하나를 툭 차서, 앞에 앉은 고양이에게 굴려보낸다. 고양이는 앞발로 그 매실을 툭 밀어, 내 쪽으로 다시 보낸다. 우리는 그렇게, 셋을 주고받고 멈춘다.
고양이는 다시, 조용히 자기 단장을 이어간다. 기분이 좋았는지, 벤치 위에 올라앉아 꼬리를 핥으려다 중심을 살짝 잃는다. 그러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바닥으로 내려와 양쪽 앞발을 모으고 엎드린다. 이런 능청스러움은, 참 사랑스러운 태도다.
가끔 나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을 때 그 시선이 닿는 방향이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고, 전부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런 한계를 조용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조금 다른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내 앞에 앉은, 능청스럽고 사랑스러운 고양이. 그 고양이가 응시하는 어딘가를 나도 몸을 낮추고, 조용히 곁에 앉아 바라본다. 나로서 서 있을 땐 보이지 않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건너편, 앞집의 울타리가 보인다. 저 울타리가 이렇게 높았던가. 나무들이 이렇게 드높았던가.
나는 아름다운 마을에 살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그 풍경을 애써 외면하기만 했다. 아름다운 그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풍경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소리에 괜스레 예민해지도 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 애써온 것 같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들이 눈앞에 있어도,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뻐할 수 있는 순간조차 조용히 미뤄두고 있었다. 그건 참, 모호한 일이다.
분명 내 마음은 조심스러움이었지만, 그 감정은 어느새, 점점 불편한 감각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배려의 마음과 행동이 너무 커져서, 결국 어느 순간, 한 번에 엉켜버린 것만 같다.
나는 오래도록, 배려를 조용히 지켜야 할 약속처럼 여겨왔다. 성숙한 사회란, 그런 약속을 자연스레 품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마음과 행동을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충분히 배워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조심스러운 내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방식으로 굳어 있었다. 그 마음은 정말 나의 것이었을까. 그리고, 누구를 위한 마음이었을까.
누군가는, 배려가 포장된 강요에 반발심을 느끼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안에서 적개심을 드러낸다. 그렇게 사회 안에서는, 배려라는 개념에 물음표가 생긴다. 그 물음표는 다시 공포와 분노로 이어지고, 결국 타자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번져간다. 그렇게 타자라는 존재는, 점점 의미를 잃어간다.
그리고 어느새, 극단적이고 강한 감정들의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존재가 그 자체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배려의 행동과 마음은, 단지 상대방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꼭 필요한 태도이다. 지금 우리는, 도덕성이 가진 깊은 의미를 다시 배워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타인을 배려하고 싶은 마음과,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겨온 행동을 조용히 떼어놓아 본다. 그러자 그 둘 사이, 오래 엉켜 있던 생각들 틈에 작은 간격이 생겨난다. 붙잡고만 있었던 긴장감도, 조심스레 내려앉는 듯하다.
엎드려 있는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린다. 내 시선을 함께 바라봐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고양이를 내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본다. 하지만 고양이는 이내 몸을 비틀며 발버둥친다. 나는 조용히 웃고, 다시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는다.
M. C. Escher의 《Relativity》(1953)에는 수많은 시선이 교차한다. 우리는 그 모든 시선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서로가 바라보는 시선을 함께 응시하려 할 때, 그제야 비로소, 시선은 공유되고, 하나의 장면이 된다.
나는 앉아 있는 고양이 곁에 가만히 몸을 낮춘다. 그리고 고양이의 시선에 따라, 나도 그 풍경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본다. 고양이가 바라보는 벤치 밑 풍경은, 내가 평소에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고양이의 이마를 한 번 쓰다듬고, 천천히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찬찬히 주변을 바라본다. 매실나무, 그 옆으로 우뚝 선 나무들, 벤치와 돌담, 낮은 계단, 풀잎과 고양이,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하늘과 구름까지— 나는 이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다.
고양이와 잠시 장난을 더 주고받는다. 그러다 고양이는 조용히 풀숲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남은 여운을 가만히 품은 채, 다시 고요한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걷는다.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 조용히 삶을 바라봅니다. 감정 회복은, 타자의 시선을 따라 걷는 데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함께 걸어봐요.”
이 글을 쓰는 시간은, 저에게 감정을 회복하고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하는 여정이 됩니다. 감정을 바라보며, 내 안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이해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