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존재의 고립과 자기기만에 대하여

by 호수를 걷다





여러분은 정말로 자유를 선택했나요?





서론

영화 미드소마와 드라마 파고, 그리고 ‘stabbing mass murder’


2000년대 유럽에서는 도로에서 사람들을 차로 밀치거나 칼로 공격하는 대량살상 사건(stabbing mass murder)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검거된 이들은 대부분 청년들로, 체포 후에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들의 침묵은 범행 당시의 대담함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최근에도 유사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024년 영국의 Axel Rudakubana 사건, 그리고 2023년 한국의 신림동,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이 그 예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고립된 개인이 파괴적 신념 속으로 스스로를 던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본론

서사에 갇힌 기만에 대하여




1. 고립된 개인이 파괴적 신념 속으로 스스로를 던지는 과정

이들의 범죄는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해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대량살해(mass killing)’로, 내면의 결핍을 구조적으로 메우지 못한 채, 존재를 과시하고자 하는 파괴적 자기서사를 실행하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의 밑바닥에는 쾌락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그 대신 극도의 외로움과 고립감이 자리합니다.


“그들은 왜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세상에 신호를 남기려 하는가?”




영화 〈미드소마〉 (2019)

주인공 대니는 가족을 잃은 뒤, 해체된 정체성과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에 매혹됩니다. 스웨덴의 이교도 공동체는 그녀에게 따뜻함과 일체감을 제공하지만, 그 중심에는 집단적 광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 대니가 공동체의 희생 제의를 수용하는 장면은 “외로움이 집단의 폭력에 동의하게 만드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그 의식은 단순한 종교의례가 아니라, 고통을 ‘의미화’하려는 인간의 욕망, 파괴를 ‘의식화’함으로써 죄책에서 벗어나려는 심리적 기제를 미학적으로 표현합니다.


후반부에서 대니의 눈물은 구원이 아니라 동화(同化)의 증거입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기만된 구원’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드라마 〈파고〉 (2014)

미드웨스트의 평범한 사람들을 그린 이 시리즈는, 작은 욕망과 모멸감, 사회적 고립이 어떻게 범죄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줍니다.

시즌 1의 주인공 레스터는 ‘자기 통제를 상실한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파괴자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사회 구조 안에서의 무력감, 실패, 존재감 결핍을 느끼며, 살인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감각을 경험합니다.






2. 자기기만의 시작: 존재가 자기서사에 갇히는 과정


찰리 맨슨의 영화감독·배우 살인사건 (1969)

1969년 여름, 미국 로스앤젤레스. 사이비적 공동체 ‘맨슨 패밀리(Manson Family)’의 지도자 찰리 맨슨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살인을 지시했습니다. 그 대상은 당시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의 아내이자 배우였던 셔론 테이트(Sharon Tate)와 그녀의 지인들이었습니다.

테이트는 임신 8개월이던 상태였고, 맨슨의 추종자 4명은 그 집에 침입해 그녀를 포함한 다섯 명을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그다음 날에도 맨슨의 추종자들은 또 다른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 이 두 사건은 ‘테이트–라비앙카 살인사건(Tate–LaBianca Murders)’으로 불립니다.


‘맨슨 사건’의 사례를 통한, ‘불안한 개인들의 심리적 결속으로 이루어진 허상’

찰리 맨슨은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자기 파괴와 구원의 서사를 결합한’ 교주형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자유를 위한 살인", "사회 규범의 파괴를 통한 진정한 구원"이라는 반윤리적 계명을 내세웠지만, 실은 자기 권력과 열등감의 보상구조에 불과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그는 나르시시즘적 카리스마(Narcissistic Charisma)를 가진 전형으로, 타인의 불안과 고립을 포착하고, “너는 세상과 다르다”라는 메시지로 소속감의 환상을 제공하며, 그 환상 속에서 ‘신적 권위’를 획득합니다.


여기서의 기만(欺瞞)은 ‘교주가 따르는 자들을 속이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고립된 개인이 스스로를 속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즉, “나는 선택받았다”는 자기최면적 거짓입니다.






3. 미디어 시대의 신(新)사이비

오늘날의 무차별적 대량살상은 교리나 이념이 아니라, ‘서사’를 통한 자기 존재의 과시로 나타납니다.


이들은 공동체의 연대가 아니라, 온라인 상의 자기 확증 루프(algorithmic self-validation)속에서 신념을 만들어냅니다.


극단주의 커뮤니티는 개인의 고립감과 불안정한 정체성에 ‘가짜 의미’를 제공합니다. 그 결과, 현대판 ‘디지털 맨슨가족’이 재현됩니다.


“그들은 공동체가 아니라, 기만된 존재감의 연대에 속한다.”

2011년, 서울 신천 일대에서 발생한 대학생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여러 언론과 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뤄지며, 젊은 세대 간의 폭력성과 고립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시켰습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인간의 고립 구조는 형태를 바꾸어 반복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결론

외로움의 윤리 —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들은 단순히 악인이 아닙니다. 의미를 잃은 시대의 극단적 표본입니다.


사이비와 테러는 모두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이 왜곡된 형태”이며, 이는 사회가 제공하지 못한 존재의 연결감(connectedness)의 붕괴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고립된 개인이 다시 관계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는 사회적 회복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 리터러시, 사회적 감응력, 연결의 윤리 등이 그 대안으로 논의될 수 있습니다.






프롬의 통찰: 자유는 고독을 낳는다

에리히 프롬은 1941년, 나치즘의 대두를 보며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썼습니다.

그는 “왜 사람들은 스스로 폭군에게 복종하는가?”를 묻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 자유를 추구합니다.


1. 외적 억압에서 벗어나는 자유 — Freedom from

2. 의미와 사랑을 스스로 창조하는 자유 — Freedom to


프롬은 두 번째, ‘무엇으로의 자유(Freedom to)’를 진정한 자유의 완성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해방’까지만 가고, 그 자유의 공허와 책임을 감당하지 못해 새로운 권위(국가, 교주, 집단)에 자신을 의탁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입니다. 그 도피는 심리적으로 안정감의 착각을 줍니다. 그래서 인간은 “내가 선택했다”는 환상을 가지지만, 사실은 타인의 신념 속으로 도피한 것뿐입니다.


결국 인간은 결핍 → 불안 → 도피 → 기만된 안도감의 순환 안에서 자유를 잃지 않으려다 다시 속박을 선택하는 존재가 됩니다.


“자유는 고독을 낳기 때문이다.”




고립된 인간의 심리적 공허

대량살상을 저지른 이들의 인터뷰를 보면, 공통적으로 극도의 고립감과 정서적 결핍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처럼, 공허 속을 걷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타인·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관계가 붕괴될 때, 그들은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장(場)”을 부수려 합니다.
그것은 현재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절망 속의 기대감, 즉 ‘왜곡된 희망의 발현’입니다.


이 기대가 파괴로 향하지 않고, 조금씩 쌓이는 변화의 희망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가 지속적인 병리를 겪게 됩니다.






마무리

이제 우리 사회는 단순한 통제나 처벌을 넘어, ‘고립된 개인이 다시 관계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는 사회적 회복 모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핵심은 감정 리터러시, 사회적 감응력, 연결의 윤리입니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화적 과제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과 제가 이 문제를 함께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 —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회복과 문화의 시작입니다.


그 시작은, 서로를 향한 이해와 질문으로부터 다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언제나 질문할 수 있고, 그 질문 속에서 다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고립이 아닌 관계의 세계로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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