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혹은 반항적으로… ‘킹덤’에 바치는 헌사
리카르도 티시의 버버리 첫 데뷔쇼를 마쳤다. 런던패션위크 기간에 진행된 남녀 통합 2019 봄/여름 컬렉션은 패션 하우스에 변화의 신호탄을 울렸다.
지난 9월 17일 오후 5시, 영국 남서부 복스 홀에 위치한 사우스 런던 메일 센터에서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의 버버리 데뷔 컬렉션이 공개됐다.
영국을 대표하는 브랜드 버버리는 17년간 브랜드를 이끈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후임으로 지난 3월 지방시 출신의 디렉터 리카르도 티시를 임명했다. 리카르도 티시의 버버리행은 시작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티시는 12년간 지방시를 이끌며 글래머러스한 고딕 룩을 재현해 매출을 6배로 키운 장본인이다.
작년에 버버리의 CEO로 임명된 마르코 고베티는 브랜드를 하이엔드 포지션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합리적 명품 (affordable luxury)에 더 가깝던 버버리를 루이비통이나 샤넬 같은 하이엔드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겠다는 계획이다. 그는 “현재 가장 수익성 좋고 지속력 있는 시장인 럭셔리 시장에 확고한 포지션을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스트릿 감성을 가장 럭셔리하게 풀어낼 줄 아는 리카르도 티시는 브랜드 수장으로 적임자였다.
리카르도 티시는 지난 5월, 피터 사빌과 협업한 버버리의 새 로고를 공개했다. 프로섬이 새겨진 말 탄 기사의 문양 대신 ‘버버리 런던 잉글랜드’라는 굵은 글자만 남겼다. 동시에 오렌지색 바탕에 붉은색과 흰색으로 T와 B를 패턴화한 모노그램도 공개했다. 브랜드 설립자인 토마스 버버리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버버리는 런던 리젠트 스트리트에 자리한 플래그십 스토어도 리뉴얼했다. 브랜드의 새 시대를 알림과 동시에, 영국 대표 브랜드로의 정통성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기대를 모은 티시의 첫 컬렉션이 공개됐다. 영국에 대한 경의를 담아 ‘킹덤(Kingdo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리카르도 티시는 버버리만의 헤리티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미국의 하위문화와는 구별되는 영국의 서브 컬쳐를 컬렉션에 녹여냈다. 섹스피스톨즈, 퀸, 축구 테라스와 영국식 가든 파티를 연상시키는 비주얼이 등장했다. 유려하게 재단된 베이지 아이템과 시그니처 아이템인 트렌치 코트로 브랜드 전통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리파인드(refined), 릴렉스드(relaxed), 이브닝(evening)의 세 파트로 컬렉션을 나눠 클래식과 펑크, 스트릿 감성을 아울렀다. 타겟이 분산된 어수선한 느낌이라는 평도 들렸지만, 운동화에 힙색을 매치한 남성 모델, 트렉수트를 입은 여성 모델은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에슬레저 룩과 스트릿 패션을 반영한 획기적인 시도라는 평도 많았다.
크리스토퍼 베일 리가 이끌던 버버리는 럭셔리 업계 최초로 ‘씨 나우 바이 나우(see now, buy now)'라는 선주문 시스템을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리카르도 티시는 이를 한걸음 더 밀어붙여 컬렉션 직후에 제품을 인스타그램, 위챗 그리고 오프라인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한정판매하는 24시간 캡슐 드롭 시스템을 도입했다. 드롭 방식은 슈프림 등의 스트릿 브랜드가 시도하면서 젊은 층의 폭발적 반응을 받은 판매 방식이다.
실제로 선판매된 제품들을 이미 많은 셀러브리티들이 입어 화제를 낳고 있다. 줄리아 로버츠, 리한나, 비욘세, 마돈나 등이 리카르도 티시의 봄/여름 컬렉션을 입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버버리는 윤리 무역 이니셔티브에 가입한 최초의 럭셔리 브랜드로써 지난 9월 6일 재고 소각과 모피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지난해에만 약 415억 원의 재고를 불태운 것으로 알려져 여론의 물매를 맞은 뒤였다. 이 역시 패션계의 오랜 관행에 반기를 드는 움직임으로 주목을 받았다.
쇼가 끝난 후에 리카르도 티시는 “첫 번째 버버리 컬렉션을 시작하면서 20년전 이곳 런던에서 졸업 컬렉션을 선보인 개인적 여정부터 지금의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까지 삶의 여정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나는 런던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이곳은 나에게 디자이너의 꿈을 갖게 하고 나를 성장시켰다. 이번 쇼는 문화, 전통, 이 역사적인 패션 하우스의 코드 그리고 아름답게 다양한 영국을 구성하는 절충주의를 기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수트에서 스포츠웨어, 이브닝웨어까지, 버버리의 전통을 컨템포러리하게 풀어낸 리카르도 티시의 첫 컬렉션은 안정적으로 브랜드 재탄생의 포문을 열었다. 독창적이고 반항적이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는 이 디자이너의 차후 행보가 주목된다.
사진 제공 - 버버리
자료 제공 - 버버리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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