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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Oct 07. 2020

산티아고 가는 길 - 스물세 번째 날

레온-비야르 데 마사리페(20km)






    많이 걷는  일정은 아니라서 조금은 느지막하게 준비했다. 5시 40분에 일어났는데 같은 방을 쓰는 미기는 이미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3층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옷 입고 선크림 바르고 다시 2층의 침대방으로 내려와서 다시 짐 챙겨 3층에 돌아와 어제 사둔 바나나 두 개와 오렌지 절반을 까먹고 짐을 꾸렸다. 캔 김치 하나와 작은 맥가이버 칼 하나 더 생겼다고 좀 더 무거워진 듯한 가방을 메고 6시 50분쯤 출발했다.



걷다가 문득 돌아본 일출. 도시가 깨어나려면 아직 멀은 듯하다.



    확실히 시골에 비해 별이 적다. 어제 못 봤던 산 마르코 성당도 슬쩍 보면서 도시를 1시간 넘게 걸어 레온 교외의 공업지역을 지날 때쯤  해가 뜨기 시작했다. 별은 못 봤지만 마침 오르막을 오르고 있어 높은 곳에서 만난 멋진 일출이었다.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들을 지나 작은 마을 비르헨 델 까미노에 도착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편이라 두어 시간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복잡한 도시의 표지판들 사이에서 까미노 표시를 찾아 걷느라 지친 건지 너무 배고파서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케이크가 맛있다는 리뷰가 있었지만 아침에 먹고 남은 오렌지와 그 전 식사 때 키핑 해둔 바게트 조각까지 있어서 굳이 케이크를 시키진 않고 커피만 시켰는데 무료로 케이크이나 또르띠야 중에 하나를 준다길래 케이크를 골랐다. 어젯밤 바에서도 음료 하나에 무료 타파스를 주더니, 카페에서도 커피에 무료 커피 안주(?)를 주는구나. 괜찮은 동네다.



파운드 케이크와 커피, 그리고 잔반(?)들



  함께 받은 케이크는 약간 파운드 케이크 재질이었는데 가장자리가 바싹 익어 바삭한 캐러멜 향이 나는 맛있는 케이크이었다. 맛있게 먹고 화장실도 한번 갔다가 짐 챙겨서 길을 나섰다.




혼자 걷는 길



    아스토르가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두 갈래 길로 나뉜다. 북쪽 길과 남쪽 길. 전전날부터 어느 쪽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남쪽 길에 있는 알베르게로  예약해두었었다. 나보다 약간 앞서 걷던 한국인 무리는 북쪽의 도시에서 묶기로 한 듯한 데 뭉쳐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로 향했다. 익숙한 언어와 웃음소리가 멀리 작게 사라지며 나는 바람소리만 가득한, 조용한 남쪽 길로 들어선다. 


  잠깐 만나서 인사하거나, 쉬는 동안 같이 앉게 되거나, 일정이 끝나고 숙소나 길에서 만나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곤 난 걸으면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사색에 잠길 여유가 필요해서,라고 하면 그럴듯한 말이겠지만 사실 걷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는 편이라서 말까지 하면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해서인 이유다. 외국인에겐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표정과 제스처면 걷는 동안 긴 대화를 피할 수 있지만 왠지 한국인끼리는 그게 잘 안된다. 언젠가 만난 누군가는 순례길을 걸으며 운명의 상대를 찾아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말했었는데, 천생 혼자 걷기 좋아하는 나에게 '까미노 러브'는 확실히 먼 이야기인 듯싶다.




내리쬐는 햇살에 지칠때쯤 나타나는 마을에서 간단한 음식을 먹는다

 



  오르막에 이은 편평한 시골길을 조금 걷다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만난 마을은 프레스노 델 까미노. 레온의 작은 교외 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그 뒤로 오르막을 하나 더 지나 만난 마을은 온시나 데 발돈시나.  작고 조용하고 예쁜 마을이었다. 바람에 천천히 춤추듯 일렁이는 나뭇잎이 너무 아름다웠다.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와 바람소리, 새들의 지저귐 소리만이 가득했다. 순례자들이 많이 묶는 마을은 아닌 듯 바도 1~2개밖에 없어 보였지만 만약 이 길을 다시 걷게 된다면 이 마을에서 하루쯤은 묶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다시 오르막을 올라 한참을 걸어 초사스 데 아바호에 다다랐다. 뭔가 먹을 타이밍이 되었기에 눈에 불을 켜고 악착같이 Bar를 찾았다. 마을에 하나 있는 듯 크고 넓은 바에서 또르띠야 하나 시켜 먹으면서 발가락도 말리며 쉬다가 다시 출발.


  목적지인 마사리페까진 5km 정도였고 길도 편평했는데 나무 그늘 하나 찾기  힘든 차도 옆길이라 그런지 걷는 내내 몹시 힘들었다. 사실 걷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던 건 숙소 문제였다. 모레 묵을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고 예약 문의해보려 연락한 숙소와는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스트레스가 꽤 컸던 것 같다.


-레세르바 포르 파보르, (예약 부탁합니다)

-마냐나 마냐나 (내일의 내일입니다)

-우나 페르소나, 꼬레아노 (한 사람이고 한국인입니다)


 누가 봐도 기초 스페인어로 천천히 물어봤는데, Si(예 됩니다) 인지  No(아니오 안됩니다)인지만 말해줘도 좋을 텐데, 길고 복잡한 스페인어로 말하니 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 다른 알베르게에 연락해보기로 마음먹으며 마사리페에 도착했다.


  예약해둔 알베르게는 다행히 바로 마을 입구에 있었다. 체크인후 샤워 + 빨래하고 휴대폰 충전과 다른 알베르게 예약까지 하다가 2시쯤 밥 먹으러 슬슬 마을 구경을 나섰다.









  마을에 하나뿐인 구멍가게에서 내일 먹을 것 좀 사고 언덕 위에 있는 바에서 감자 샐러드와 참치 파이 하나를 사서 맥주와 먹었다. 마요네즈에 청양고추 같은 매콤한 걸 넣어 감자와 버무린 게 생각보다 맛있었고, 빵 사이에 참치를 넣어 구운 참치 파이도 맥주랑 곁들여 먹기 딱 좋았다. 음식 맛이 괜찮아 타파스 하나 더 시켰다. 오믈렛 위에 고추 장아찌 하나가 올라가 있었는데 맵고 짭짤한 맛이 부드러운 오믈렛과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식욕 떨어지는 색의 접시에 플레이팅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맛은 아주 좋았다!


   먹는 동안 구경한 가게 내부는 그야말로 현지인들 사랑방이었다. 대부분이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로, 유일한 동양인에 유일한 여자애인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면서도 삼삼오오 모여 맥주나 와인 한잔과 함께 포커를 치고 있었다. 한낮의 더울 시간에 마을회관이나 아파트 정자 쉼터 같은 곳에 모여 고스톱을 치는 한국 어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여, 사람 사는 거 어딜 가나 다 비슷하구나 싶었다.


   꽤나 복잡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꼭꼭 눌러 연결에 성공하고 촬영한 동영상 업로드와 엄마와의 카톡 통화도 하고서 바를 나섰다. 마을 한 바퀴 슬슬 돌았지만 워낙 작은 마을이라 둘러볼 것도 없이 금세 숙소에 도착했다. 바람에 뒤집어진 빨래 정리 좀 하고 낮잠 한숨 자고 나니 그새 빨래가 다 말라있다.

 

  빨래를 정리하고 일정 정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7시 저녁 시간이다.

식당은 알베르게 지하에 있었는데 지하의 벽 두쪽은 문과 창문이 바깥을 향해 나 있는, 일종의 반지하라서 어둡거나 답답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스페인 가정식으로, 샐러드부터 차례로 서빙되었는데 채소가 신선해서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세컨드로는 가스파쵸가 나왔다. 스페인식 토마토 수프인데  말로만 듣다가 처음 먹어보게 되었다. 당연히 따뜻할 거라 생각했는데 차가워서 살짝 놀랐지만 걱정과 달리 맛은 있었다. 세 번째로 나온 것은 빠에야. 스페인 와서 ‘그래도 쌀인데 한국인인 내 입맛에 맛겠지’하고 먹었다가 낯선 품종의 쌀 식감에 당황한 나머지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몇 번의 빠에야 도전 역사 중 제일 맛있었다! 보통 1인당 와인이 절반~1병 기준으로 서빙되고 물이 유료인 다른 식당과 달리 와인과 물이 무제한 서빙되는 것도 참 좋았다.

 


   옆자리엔 호주에서 오신 순례자 세분이 앉아계셨는데 한분은 젊은 여성분, 다른 두 분은 연세가 많은 여성 두 분 이셨는데, 내 직업을 듣자 처음엔 갸웃하더니 젊은 여성분이 간단하게 설명해주자 반색하시며 본인들과 함께 걷자고 농담 반, 진담 반의 제의를 했다. 이틀 거리 정도 뒤에 오시는 한국 분 중에 아픈 사람들에게 침을 놔준다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을 만나셨어도 좋아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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