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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Mar 31. 2020

산티아고 가는 길 - 열일곱 번째 날

카스트로 헤리츠 - 이테로 라 베가 (10km)


쉬엄쉬엄 가는 길  


   간만에 푹 잔 느낌이다. 오랜만에 컵라면에 소주를 마셔서 그런가. 천천히 갈거라 늦게 일어나도 크게 지장은 없었지만 6시에 눈을 뜨고 말았다. 배 상태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된장국을 먹으면 나을 거라는 나의 믿음은 플라세보 효과조차도 일으키지 못했다. 속이  안 좋으면 응당 알코올 섭취를 자제해야 할 테지만 무려 3주 만에 소주를 만난 한국산 술쟁이에게 그 정도의 사리분별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7시에 토스트와 잼, 버터, 블랙티와 오렌지 주스로 제공되는 아침을 먹고 천천히 출발 준비해서 7시 45분에 숙소를 나섰다. 어느새 하늘에선 비가 오고 있다. 늦은 출발이라 어둠 속을 걷진 않았지만 머리 위까지 내려온 구름이 보슬비를 흩뿌리는 사이로, 빨간 우비를 도롱이처럼 두른 채 걷기 시작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눈앞에 올라야 하는 메세타가 떡하니 보인다. 딱 봐도 엄청난 급경사라 신발끈, 배낭끈 다시 조이고 열심히 올랐다. 메세타 위쪽에는 쉼터가 있어 벤치에 앉아 잠시 발을 말릴 수 있었다.




 

발을 말리면서 처음 발견한 물집. 아주 작은 거라 통증도 없었다.      메세타에서 내려가는 길




    비가 오는 데다 바람도 많이 불어 그런지, 조금 앉아 쉬는데도 금방 추워져서 조금만 쉬고 일어나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봐도 봐도 적응 안되게 편평한 고원, 메세타를 한참 걸어 내리막을 지나 또다시 평지를 걷는다.  


    걷는 동안 2-3일에 하나 정도로, 길 가에서 순례자의 비석을 보게 된다. 국적도, 나이도 모두 다른 그들은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와서 걷다가 목숨을 잃었을까. 그리고 그가 걷던 마지막 길에 이 비석을 세운 가족, 친구들의 마음은 대체 어땠을까. 실제 무덤은 아닐지 몰라도 아마도 까미노, 바로 이 길 위에서 세상을 떠난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 그 비석들을 볼 때마다 나는 잠깐이라도 서서 그들의 이름을 되뇌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이곳까지 와서 걷고 있는 이유를 이 지나간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옥수수밭



   적당한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평원을 지나서, 이테로 다리에 도착했다. 예쁘지만 오르막인 다리라, 어딘가 불편한 배를  부여잡고 다리를 건너서 푸른 하늘 아래의  옥수수밭을 지나,  마을에 도착했다. 평소 같았으면 두 번째 아침을 먹을만한 마을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속이 좋지 않아서 오늘을 아예 조금 걷는 날로 정해둔 터였다. 아예 안 걷고 한 숙소에서 연달아 묶으며 연박을 했어도 되었겠지만 어차피 체크인 시간 전까지는 숙소 정리를 위해 나가 있어야 하니, 호텔에서처럼 침대에서 쭉 쉴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걸어서  앞으로 나가는 게 낫겠다는 나름의 신념....이었다고 할까.




쉴 수 있을까....?


    공립 알베르게 주소를 구글 지도에 찍고 찾아간 곳은 어쩐지 허름한 느낌이 물씬 나는 사립 알베르게였다. Bar도 같이 운영하는 작은  알베르게였는데  왠지 별로 느낌은 좋지 않아 이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위치가 헷갈려서 계속 헤매다 보니 그냥 아무 데나 얼른 들어가고 싶어져 그 허름한 숙소로 체크인했다.


   들어가서 시설 보고 나니  더 허름하다. 그동안의 알베르게들이 중~상정도의 시설이었다면 이곳은 단언컨대 ‘하’다. 화장실, 세면대, 취사 가능한 주방, 침대 등등 하나하나 따지면 빠지는 곳은 없었지만  뭔가 빈민국 난민촌에서도  제일 최신시설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관리를 거의 안 하는 건지 주방은 몹시 더러웠고 샤워실은 곰팡이 냄새와 하수구 냄새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며 세탁을 할 수 있는 야외 싱크대는 지붕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있는 데다 너무 더러워 살짝 씻어보려고 집어 든 수세미는 싱크대에 문지르는 족족 바스러진 가루들이 나왔다. 싱크대에 내 빨래를 내려놨다간 빨래가 전혀 안될 거 같아 빨래를 손에 든 채로 비누를 묻혀 손으로만 조물조물해야 했다.


   동네 마트에서 닭고기 수프 분말이 있길래  사 와서 (더러운 주방을 최소한으로 정리하고) 구글 번역기로 스페인어를 해석해가며 물 양을 맞춰서 수프를  만들었는데, 정말 소금을 들이부은 듯이 짠맛이었다. 나름 속이 좋지 않으니 따뜻한 닭고기 국물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고른 닭고기 수프였는데, 이걸 다 먹으면 속이  더 안 좋아질 판이었다. 물을 잔뜩 부어 주스 정도의 점도로 만들고 나서야 간신히 떠먹을 만 해졌다.

 

  구글에서 이 숙소 후기를 찾아보니 역시나 악평이 굉장히 많다. 언제 또 이런 데서 묵어보겠나,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자. 하고 체념했다. 그래도 직원들은 친절해서 다행이었다.







   한 시간 반쯤의 낮잠을 자고 침대에서 뒹굴거릴 때 같은 방을 쓰는 미국인, 독일인 일행이 같이 뭐 먹으러 나가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엎드려서 나의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설사가 무엇 때문인지 검색해보았다. 가장 유력한 것이 ‘여행자 설사’라는  질환. 너무 성의 없는 작명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서 치료방법을 봤더니 수분 섭취만 잘하면 일주일 이내로 호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부르고스에서부터 딱 3일째인데도 이 모양인데, 앞으로 4일이나 더 이런 상태로 걸어야 한다면 난 답이 없다.

 

   원인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확실친 않지만 걷다가 떠먹었던 많은 물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오래된 역사만큼, 오래된 샘터도 많았고 그중에 어느 것에 문제가 있어도 크게 이상하진 않을 상황이었다. 아니면  정말 그 여행자 설사라는 이름처럼 잘 못 먹은 음식 없이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탈이 났을 수도 있고.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아픈 뒤로 계속 물을 사 마셨지만, 앞으로도 물은 계속 마트에서 사서 마셔야겠다고 다짐했다.  




유튜브에 동영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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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_VmMLMdO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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