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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Mar 20. 2020

산티아고 가는 길 - 열다섯 번째 날

부르고스 -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20km)




부르고스의 호스텔에서 먹은 뷔페식 아침. 취향 따라 몇 가지만 골라서 먹을 수도 있는 것 같았지만 알차게 다 챙겨 먹었다.


장트러블의 아침


  밤새 뒤척였고 땀을 많이 흘렸다. 타이레놀 하나 먹고 잤었는데 낫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5시 40분에 간신히 일어나 준비하고 (우리 방 D3는 다들 늦게 가는 건지 연박인지 아무도 안 일어났다) 6시에 뷔페식 아침식사로 토스트 2개, 시리얼, 파운드 케이크 작은 거, 과자, 버터 3개 오렌지 주스, 커피로 야무지게 먹고 버터도 한 개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7시 5분쯤 부르고스 대성당 서쪽  문 앞에 서서 기도 올리고 계단을 올라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해가 뜨기 전, 너무나도 시꺼먼 어둠 속이었지만 도시라 그런지 노란 가로등 불빛들이 군데군데 가득해서 걷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다만 노란 화살표가 노란 조명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까미노 어플과 구글 지도를 계속 확인해가며 걸어야 했다. 내 앞을 질러가던 자전거 탄 커플이 조금 뒤에 자박자박 걷던 나에게 따라 잡혀 내 앞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던걸 보면 그건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거다. 침침한 눈으로 간신히 까미노 사인을 찾아 그들에게도 알려주고 나도 같은 길로 내려갔다.






부르고스 외곽의 순례자 동상과, 더 지나서 나오는 시골길



  한참을 걸어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하늘은 밝아지는데도 아직도 부르고스 안이다. 부르고스에서 부르고스를 향해 걷던 어제와는 반대로 부르고스에서 부르고스 밖으로 걷고 있는 아침인 거다. 점점 낮아지는 건물들, 넓어지고 뜸해지는 도로를 따라 크고 멋진 도시, 부르고스를 벗어난다.


  몸상태를 확신할 수 없어 쉬엄쉬엄 걷는데도 점점 지치는 느낌이다. 안개 낀 하늘, 습한 공기, 자꾸 말 거는 한국 남자. 모든 게 싫어서 웃음도 잃고 말도 잃고 그냥  터덜터덜 걸어서 타르하도스에 도착. 마을과 까미노는 내가 걸은 갓길 쪽에 있었지만 몇 개 없는 바가 다 큰길 건너에 있었다. 용감하게 큰길을 건너 처음 보이는 Bar에 들어갔다. 얼핏 봐도 주문 대기줄이 길어 보여서 주문을 나중에 하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화장실로 직행.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배가 무지하게 아파서 내가 다 놀라버렸다. 식은땀을 닦으며 나와서 내 뒤에 기다리다 들어가는 외국인 순례자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하고 가게 앞의 작은 천막 밑에 야외 좌석이 있어서 거기에서 오믈렛과 커피 하나를 먹으며 발을 말렸다. 확실히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마을 할아버지 한 분이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며 큰 소리로 바른 방향을 알려주셨다. 어리바리한 순례자한테 길을 알려주고 호탕하게 웃는 상냥한 분이셨다.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에서 만난 멋진 그라피티들.

  


메세타, 신기하고도 힘든


  마을 끄트머리쯤에서 메세타가 보이기 시작하길래 벌써 시작인가! 싶었는데 그 뒤로 한참을 더 가고 마을 하나도 더 지나고 나서야 메세타가 시작되었다. 오르는 건 아주 완만하게 천천히 올라가서 힘들진 않았지만 쉴 곳이 마땅치 않은 건 좀 곤란했다. 적당한 쉼터란, 건물이나 나무 그늘이 있어서 햇볕을 피할 수 있으면서도, 베드 버그가 달라붙을 수 있는 풀밭은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마을을 지나친 지 한참 뒤인데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이런 상황(?)들에 대비한 건지 메세타 오르는 길 한쪽에 작은 샛길로 이어진 나무와 벤치가 있는, 예전엔 물도 나왔던 것 같은 샘터에서 발을 말리며 잠시 쉬다가 다시 진짜 고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운데의 작은 숲이 프라오토레 샘터. 샘은 없지만 나무 그늘이 많아 쉬어가기 딱이다.
오르니요스 가는 언덕의 아마도 랜드마크(?) 나 홀로 나무.




  고원 높은 곳에 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있는 풍경이 참 예뻤다. 삼각대를 꺼내서 셀카를 찍고 동영상도 찍고, 말도 안 되게 넓고 편평한 고원을 한참을 걷다 보니 ‘노새  죽이는 내리막’이 나타났다. 대체  어떤 내리막 일지 좀 궁금했었는데 정말 포물선을 그리는 급 경사 내리막이었다. 바싹 마른땅에 작은 자갈들까지 있어서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했다간  야고보 성인을 직접 만나게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노새뿐 아니라 순례자도 죽이는 내리막이 아닐까 의심하며 간신히 내려왔다. 높은 곳에서 내려가면서부터 평원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마을이 보였기 때문에 큰 걱정 없이 그 방향으로 계속 걷는데,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쉽게 가까워지질 않는다.








오르니요스에서


 가정집 분위기의 소박한 알베르게였다. 인원수에 비해선 부족한 느낌이지만 화장실도 깔끔하고 좋았다. 샤워하고 비누가 있는 빨래터에서 조물조물 빤 옷가지들을 타 죽을 것 같은 햇볕에 잘 널어놓고, 부르고스에서 샀던 순라면을 끓여 로그로뇨에서부터 소중히 가져온 리오하 와인으로 저녁을 먹었다. 이 알베르게의 주방은 오픈된 건 아니었지만 안주인분께선 라면을 끓이기면 하면 된다는 내 설명(.... 인지 절박한 표정인진 모르겠지만)을 듣고선 주방 한쪽을 내어 주셨다. 한국과는 조금 다른 가스레인지 점화 방식에 헤매고 있자 (저녁 준비 중이셨던 듯) 요플레를 덜다 말고 그것도 도와주셨다. 정말 다정하신 분이셨다. 그렇게 힘겹도록 정성스레 끓인 라면을 가지고 식탁에 앉아 냄비 뚜껑에 포크로 라면을 떠서 먹고 있는데 지나가던 안주인분이 ‘안쪽에 앞접시가 있다’며 냄비 뚜껑에 덜어먹는 나를 안쓰럽게 보셨는데, 뚜껑에 먹어야 맛(?)이 산다는 건 도저히 표현할 자신이 없어 그냥 웃고 말았다.




부르고스에서 구한 순라면(전편 참조), 로그로뇨에서부터 짊어지고 온 리오하 와인.


  설거지를 마치고 (그 새 마른) 빨래도 걷고 가든의 선베드에 누워서 한량짓 좀 하려는데  벌레가 너무 많아 바로 일어나야 했다. 노을 지기 전에 동네 구경이나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길을 나섰는데 마을의 성당에는 또 성모상과 알 수 없는 성인이 센터 자리에 있고 십자고상은 구석에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에서도 온갖  성인들의 모습만 가득했는데. 뭔가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나와서 성당 담벼락에 걸터앉아 있는데 왠지 눈물이 났다. 이냐시오의 기도를 허밍 하며 한국에 계신 최 신부님께 카카오톡으로 메세지 드렸다.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곳의 모습에서 정말 그게 맞는 건지 좀 헷갈린다고, 이게 순례길이 맞는 건지 회의감이 든다고...


    노을도 보고 울만큼 울고 나니 좀 괜찮아져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P남매와 S 씨를 다시 만났다. 며칠째 함께 걷고 있는 모양이다. 내일은 아마 같은 알베르게에 묶게  될 것 같다. 가끔 이렇게 마주치니까 괜히 더 반가운 기분이다. 숙소에서 휴대폰 충전하고 화장실 갔다가 잠드는데, 그제서야 계속 배가 아픈 게 아무래도 장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깨지 말고 푹 자고 싶었다. 진심으로.




유튜브에 동영상도 있어요~


>>https://youtu.be/6YCvML0af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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